안보, 경재

푸틴과 손잡는 트럼프,

서석천 2025. 3. 26. 06:26

시진핑을 고립시킬 수 있을까

  • 기자명송승종 국제분쟁전문가·대전대학교 특임교수 입력 2025.03.10 
 
지난 3월 3일,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카니발에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손을 잡으며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압살하는 모형이 등장했다. photo 뉴시스

2016년 3월 당시 HBO의 CEO 리처드 플레플러는 트럼프의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를 오찬에 초대했다. 이 자리에는 ‘미국 외교의 전설’로 알려진 헨리 키신저가 동석했다. 트럼프의 1기 선거 레이스가 본격화되기 시작할 무렵 이뤄진 이 만남은 트럼프의 외교정책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애를 쓰던 쿠슈너에게 각별히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미국 미디어 업계에서 마당발로 통하던 플레플러의 광범위한 네트워크 덕분에 쿠슈너·키신저의 만남이 이뤄진 것이다.

이후 쿠슈너는 닉슨 전 대통령이 설립한 미국 현실주의 외교 모임인 ‘미국 국가이익센터(CNI)’ 행사 등을 통해 키신저와 교류를 이어갔다. 이 행사에서 쿠슈너는 트럼프의 외교정책 수립에 도움을 준 디미트리 사임스 CNI 회장도 만났다. 러시아 태생인 사임스 회장은 트럼프의 첫 번째 외교정책 연설을 메이플라워호텔에서 주관했는데, 그 자리에서 쿠슈너는 처음으로 세르게이 키슬랴크 당시 주미 러시아대사를 만났다. 훗날 쿠슈너와 트럼프는 키슬랴크 대사 같은 러시아인들과의 긴밀한 친분 관계로 인해 ‘러시아의 미 대선 개입’ 의혹에 휘말려 곤욕을 치렀다.

마이클 울프가 2019년 출간한 책(‘Siege: Trump Under Fire’)에는 키신저가 당시 유력한 미 대선 주자이던 트럼프에게 중국의 영향력 확대에 대응하기 위해 러시아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추구하라고 조언하는 대목이 묘사되어 있다. 이는 소련 견제를 위해 중국과 외교관계를 정상화한 자신의 전략을 정반대로 뒤집어 놓은 것이다. 울프는 저서에서 키신저를 ‘미국·러시아의 관계 개선을 열렬히 지지하는 인물’로 묘사했다. 키신저는 2023년 11월 세상을 뜨기까지 미국·러시아 동맹이 중국의 부상에 대응하는 최선의 방책이라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키신저는 미·중 패권경쟁 구도에서 러시아를 미국 쪽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며,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러시아와의 타협을 적극 주장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담이 파국을 맞은 후 지난 3월 2일 영국 런던에서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운데)와 회담을 가진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photo 뉴시스

“러시아를 끌어들여라” 키신저의 조언 

이런 키신저의 세례를 받아서일까. 트럼프는 작년 10월 터커 칼슨과의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놀라운 발언을 쏟아냈다. “나는 중국과 러시아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깨뜨릴(un-united) 것이다. 나는 그들을 다시 분열시킬 것이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트럼프는 아직 이 전략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지만, 이는 그가 대(對)중국 고립·봉쇄를 위해 러시아와 관계 개선을 구상 중이고 이를 통해 중·러 파트너십을 약화시키려고 계획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소위 ‘역(逆) 키신저 전략’은 실제 트럼프의 안보·국방·군사 분야의 측근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마이클 월츠 국가안보보좌관은 ‘이코노미스트’에 게재한 기고문(2024년 11월 2일 자)에서 바이든의 외교정책은 중동·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값비싼’ 분쟁에 미국의 주의를 분산시킴으로써 미국의 억제력을 약화시키고 중국에 유리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단호한 행동, 경제적 압박 등을 통해 이러한 전쟁을 신속히 종결짓고, 군사적 역량을 중국에 집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위협(특히 대만에 관한)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적 최우선 과제는 유럽과 중동의 안정 회복이라는 뜻이다.

J D 밴스 부통령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줄이는 것이 대중국 견제의 필요조건이라고 본다. 그는 미국이 유럽의 분쟁보다 동아시아 문제를 우선시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중국 부상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 태세의 전환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밴스의 적대적 태도다. 그는 작년 4월 우크라이나에 약 610억달러를 지원하는 원조 패키지에 반대표를 던지면서, “1000억달러를 지원해도 이루지 못한 것을 610억달러로 달성할 수 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심지어 그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잃은 영토를 포기해야 한다고 단호히 선을 그으면서, 1991년 우크라이나 국경의 회복(즉 2022년 전쟁 이전 상태로의 복귀)이라는 아이디어는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2월 사우디 리야드에서 열린 미국·러시아 고위급 회담. photo 뉴시스

“중ㆍ러 간 쐐기 박으려는 노림수” 

이런 외교전략을 반영하듯 지난 2월 9일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대놓고 윽박질렀다. 이는 젤렌스키가 그에 앞서 ‘트럼프가 러시아가 퍼뜨린 허위정보 공간(disinformation space)에 살고 있다’고 지적한 데 대한 보복으로 풀이됐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엉뚱하게도 2022년 러시아가 아니라 우크라이나가 먼저 전쟁을 시작했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돌발 상황과 관련하여 지난 2월 21일 월스트리트저널은 “트럼프가 푸틴을 포용하는 까닭은 중국·러시아 간에 쐐기를 박으려는(drive wedge) 전략적 노림수”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워싱턴의 싱크탱크인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의 전 국무부 고위 관리인 에반 페이겐바움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역(reverse) 닉슨·키신저’ 상황”이라며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미국은 이념적 친화력과 전략적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두 강대국 관계의 분열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그와 정반대로 러시아는 미국·중국과 동시에 협력함으로써 서방 세계를 분열시키려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도발한 러시아는 서방의 제재로 경제적 고통을 겪으면서 중국과 더욱 밀착했고 탄약·드론·미사일, 심지어 전투병까지 지원해 주는 이란 및 북한과의 결속 역시 공고히 해 왔다. 미국이 보기에 이러한 ‘새로운 독재국가 축’의 등장은 미군이 동시에 감당하기 어려운 전략적 위협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서둘러 끝내려는 트럼프의 절박감은 적대국들의 공동 전선을 ‘해체’하지는 못하더라도 ‘약화’시켜야 할 필요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트럼프의 우크라이나 특사인 키스 켈로그(예비역 중장)는 “우리는 4년 전에는 경험하지 않았던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이제 4개국(중국·러시아·북한·이란)이 모두 경제적·군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푸틴이 던진 세 가지 미끼 

이런 배경에서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지난 2월 사우디에서 러시아 고위 관리들과 회담을 가진 다음, “지정학적으로 러시아와 공동 관심사에 대해 협력할 수 있는 엄청난 기회가 존재한다”고 강조하여 눈길을 끌었다. 2022년 이후 양국 최고위급이 처음으로 회동한 이번 회담에서 미국·러시아 협상가들은 관계 개선과 제재 해제의 결과로 러시아가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과 러시아가 중국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될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회담에 앞서 러시아가 미국을 상대로 3개의 ‘미끼’를 이미 투척했다는 점이다. 서방 정부가 입수한 러시아 정부 산하 싱크탱크의 문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는 것이다. 

첫째,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결 방안이다. 문서는 종전 협상의 일환으로 러시아가 민감한 기술·군사 분야에서 중국과의 협력을 중단할 것을 제안했다. 둘째, 대중국 에너지 수출 중단이다. 이를 위해 문서는 러시아가 중국의 전략적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인프라 프로젝트에 중국의 참여를 제한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셋째,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에서 미국 기업에 광물 탐사에 대한 권리를 부여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상기 제안들은 러시아가 주도면밀하게 파놓은 함정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무엇보다 트럼프 외교정책에 내재된 취약점, 특히 단기적 거래주의, 중국에 대한 편협한 집착, 전통적 동맹에 대한 무시 등을 최대한 역이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구상된 것으로 보인다. 만약 미국이 이런 제안을 수락하면 우크라이나 점령지에 러시아 주권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게 되어 서방진영의 단결 와해, 침략 억제를 위한 제재의 신뢰성 약화 등이 초래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러시아가 점령 중인 우크라이나 영토에서의 광물권 미끼에는 트럼프의 조급성·과시욕과 근시안적 태도를 최대한 역이용하여 지정학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러시아의 전략적 노림수가 숨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의 대러시아 외교에 회의적인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실제로 미국의 대중국 봉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워싱턴의 싱크탱크인 유럽정책분석센터의 알리나 폴랴코바는 이렇게 말한다. “중국은 이미 러시아가 개발한 핵심 군사기술 대부분을 보유하고 있다. 그 배(첨단 군사기술)는 이미 출항했다. 모든 분야에서 중국은 러시아보다 기술적으로 훨씬 더 앞서 있다.” 그에 따르면,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포기한다면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나아가 “대만을 겨냥한 군사적 침략에 대하여 중국이 더욱 ‘열린 손(open hand·별다른 저항이나 반대 없이 멋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을 갖고 있다는 신호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작년 11월 열린 ‘핼리팩스 안보 포럼(Halifax Security Forum)’에서 미국의 인도·태평양 사령관 사무엘 파파로 제독 역시 “이미 중국·러시아가 거래적 공생 관계를 맺고 있다”며 “우리가 그들 관계에 쐐기를 박을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이라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설령 미국의 바람대로 푸틴이 시진핑과의 관계를 멀리 하려는 생각을 갖더라도, 푸틴의 ‘운신의 폭’을 제한하는 또 다른 근본적 역학관계가 작용하고 있다. 즉 중국·러시아 관계는 전략적·영구적인 반면, 미국과의 화해는 적어도 미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남아 있는 한 전술적·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4년 후에 트럼프는 더 이상 백악관에 있지 않을 것이며, 푸틴은 차기 미국 행정부가 반대 방향으로 급변할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심지어 내년 중간선거에서도 미국의 정책이 뒤바뀔 수 있다. 이와 관련 베를린 소재 ‘카네기 러시아 유라시아 센터(CRUC)’ 책임자이자 중·러 관계 전문가인 알렉산더 가부에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러시아는 중국이 거대한 이웃이고, 러시아가 예측할 수 있는 한 중국공산당이 계속 지배할 것이며, 중국을 소외시키는 것은 러시아에 치명적 위험을 초래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헨리 키신저 전 국가안보보좌관. photo 뉴시스

‘몽상가’ 푸틴에게 칼을 넘겨주고 있다 

오히려 ‘역키신저 전략’의 최대 수혜자는 푸틴일 수 있다. 미국이 ‘빛의 속도’로 관계 개선을 서두르고 있다는 점을 간파한 푸틴은 1945년 얄타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이 루스벨트·처칠과 맺은 조약으로 되돌아가 세계 지도를 다시 그리려 할지 모른다. 그게 ‘푸틴몽(夢)’ 또는 ‘러시아몽’의 요체일 수 있다. 

이와 관련 뉴욕타임스는 최근 ‘세계를 다시 칼질하려는 푸틴에게 트럼프가 칼(나이프)을 건네주다’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칼럼을 올렸다. 이에 따르면 스탈린은 얄타협정을 계기로 발트해 연안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합병, 폴란드·루마니아 일부 점령, 그 이후 중·동부 유럽 전역에 걸친 영향력 행사 등 사실상 동유럽 전체를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런데 푸틴은 진심으로 얄타협정 시대로 되돌아가기를 열망한다는 것이다.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에 침략전쟁을 개시한 푸틴의 도발은 이러한 ‘러시아몽’ 실현을 위한 첫걸음에 불과한 셈이다. 그런데 트럼프는 시대착오적 망상에 젖어 도발의 구실을 찾는 푸틴에게 오히려 칼을 넘겨주는 모습을 연출하며, 그것이 ‘역키신저 전략’에 부합하는 행동으로 믿는다는 것이다.

어쨌든 지난 2월 28일 전 세계 수억 명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벌어진 두 정상 간의 공개적 충돌은 미국·우크라이나 관계에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주었다. 유럽의 정치인들도 이제 세계가 얼마나 극심한 변화를 겪고 있는지를 실감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어느 유럽 외교관은 이렇게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우리는 이제 유럽을 파괴하려는 러시아 대통령과 유럽을 파괴하려는 미국 대통령 사이에 동맹이 형성되었음을 보고 있다.… 대서양 횡단(미국·유럽 간) 동맹은 끝났다.” ‘영토 확장에 대한 비전(그린란드 점령, 파나마운하 탈환, 캐나다를 51번째 주로 편입 등)’을 가진 트럼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내에서도 갈등을 초래할 수 있다.

이제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자신들이 만들고 지금까지 지켜낸 유럽 대륙을 겨냥한 러시아의 침략을 용인하는 모습이다. 유럽의 친러·극우 정당들도 EU에 적대적이고, 국방비 지출 증가에 반대하며, NATO 확장의 무모함과 기독교적 가치(특히 성소수자 반대 등)를 주장하는 러시아의 견해를 지지한다. 현재 이들 친러·극우 세력은 크로아티아, 체코, 핀란드, 헝가리, 이탈리아, 네덜란드, 슬로바키아에서 정권을 잡았고, 프랑스와 독일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만일 이들 정당과 포퓰리스트들이 유럽의 중원을 장악하게 되면, 비록 물리적으로 유럽 자체를 ‘정복’하지는 못하더라도, NATO를 해체하고 지정학적 ‘중립’을 강요할 수 있다. 이는 분명 러시아가 바라는 최상의 시나리오일 것이다.

지난 2월 초 J D 밴스 미 부통령은 뮌헨 안보회의 연설에서 유럽 지도자들에게 극단주의 단체·정당의 배척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그는 독일 정치인들이 극우·반이민 정당인 독일대안당(AfD)과의 협력을 막는 ‘방화벽(firewall)’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다음 AfD 지도자를 만나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일론 머스크는 독일 선거에서 2위를 차지한 AfD 지도자에게 축하 인사를 보내기도 했다.

여러 전문가들은 이제 트럼프의 미국이 러시아와 화해를 추구하면서 대러시아 제재를 해제하고 러시아 점령 영토를 포기하도록 우크라이나를 압박할 수 있다고 본다. 심지어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에 대한 영구적 배제 등이 이뤄질 수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영토 포기를 거부하여 전쟁이 시작되었다”며 “당신들은 전쟁을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거래를 할 수도 있었다(You could have made a deal)”고 강조한 바 있다. 푸틴이 ‘특별군사작전’이란 명칭으로 침략전쟁을 도발하면서 내세웠던 명분은 ‘탈나치’ ‘비무장화’ ‘대량학살 방지’ 등이다. ‘탈나치’는 젤렌스키 제거, ‘비무장화’는 우크라이나 군대의 해산을 뜻한다. 푸틴과 중국의 시진핑은 이번 사건을 ‘서방의 쇠퇴’의 추가적인 ‘증거’로 간주할지 모른다. 이제 세계는 푸틴·시진핑이 악용할 것이 분명한 본격적인 지정학적 폭풍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환호하는 모스크바 “미국의 매복작전 성공” 

트럼프·젤렌스키 회담의 파국이 알려지자 모스크바의 친크렘린 선전가들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이것이 “우크라이나와 결별하기 위해 치밀하게 고안된 미국의 매복작전”이며 매복이 대성공을 두었다고 입을 모았다. 러시아 정치학자 알렉산더 보스코보이니코프는 “트럼프가 이번 회담을 위해 (젤렌스키를) 백악관으로 유인한 것일 뿐”이라며 “다른 방법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미국인들이 이 상황(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빠져나가고 있음을 전 세계에 보여주기 위해 사전에 계획된 치밀한 작전이었다”고 주장했다.

지난 2월 18일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서 우크라이나를 빼놓고 미국과 러시아 대표들만 참석한 ‘평화 계획’ 회담은 여러 측면에서 수상하게 보였다. 4시간30분 동안 진행된 당시 회담 주요 의제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우크라이나 선거의 필요성’이었다. 당시 회의가 끝나자마자 이 주제에 대한 뒷담화가 나돌기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젤렌스키 대통령의 인기가 4%대로 추락했다고 우기면서 우크라이나가 평화협정의 일환으로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젤렌스키의 대통령 임기는 공식적으로 2024년 5월에 종료되었다. 하지만 전쟁으로 계엄령이 발효된 상태여서 우크라이나 헌법에 따라 전쟁 중 선거가 연기되고 있다. 

만일 어렵사리 전쟁 와중에도 선거가 열린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미국·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평화협정에 서명하려면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러시아는 평화가 아니라 ‘선거 정당화를 위해 휴전’에 동의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러시아는 원팀이 되어 젤렌스키에 비판적이고 평화협상에 전향적 태도를 가진 인물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다. 전쟁 도중 대통령 선거가 열리는 것 자체로 러시아는 엄청난 이득을 취할 수 있다. 러시아의 목표는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를 인정하고, 우크라이나를 NATO 가입의 열망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는 새로운 ‘꼭두각시’ 대통령을 세우는 것이다.

만일 젤렌스키가 미국·러시아가 부추기는 평화협상을 거부한다면 내부적 압력도 예상된다. 서방의 지원을 받는 인사들이 그의 사임을 요구할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의 진짜 전쟁은 최전선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최후의 전투는 수도 키이우 한복판에서 벌어질 수도 있다. 대통령 선거가 강행된다면 우크라이나가 주권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처럼 젤렌스키도 대통령직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미국 핵우산 기대치도 낮춰야 

적어도 현 시점에서는 트럼프의 ‘역키신저’ 전략은 미국의 평판을 크게 약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의 거래 외교는 푸틴 같은 잠재적 위험 인물을 갑자기 포용하는 한편, 우크라이나 같은 동맹국을 공개적으로 질타하는 특징을 보인다. 트럼프의 예측불가한 외교 정책은 북한 도발이나 제한적 핵사용과 같은 결정적 순간에 미국이 동맹국 방어보다 적대국과의 단기적·거래적·호혜적 협상을 우선시할 수 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이는 또한 한국 역시 미국이 약속한 핵우산·확장억제에 대한 기대치를 대폭 낮춰야 할 긴박한 필요성을 시사한다.

본질적으로 ‘역키신저’ 전략 같은 지정학적 실험은 우리의 안보 딜레마를 더욱 악화시키고, 한·미동맹의 신뢰성·견고성을 재평가하도록 강요한다. 우리로서는 한·미동맹 전반을 포함하여 과도한 대미 의존도를 ‘자산인 동시에 부채’의 관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트럼프가 젤렌스키에게 “3차 세계대전을 놓고 도박한다”고 질타한 대목을 음미할 필요도 있다. 트럼프는 위험회피적 성향 또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부전승(不戰勝)’을 추구하는 성향이 강한 인물이다. 한마디로 ‘잃을 것이 많은 부자 몸조심’ 성향이 매우 강하다. 세계 일류 초강대국의 군통수권자인 트럼프는 유달리 역대 대통령 중에서 새로운 전쟁을 한 번도 시작하지 않은 것을 자랑한다. 하지만 국가통수권자는 어떤 위기 상황이 닥치더라도, 필요하다면 국가와 국민의 생명·재산을 지키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 준비를 갖추는 것이 당연하다. 

어쨌거나 지금 미국·러시아가 원팀을 이루는 추세로 보면 미국·러시아·중국으로 이뤄진 3각 축에 이어 북한까지 합쳐진 새로운 ‘모종의 4각 축’이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피해국을 가해국으로 몰아세우고, 독재자를 상대로 목숨 걸고 싸우는 지도자를 독재자로 낙인찍는 지금의 초현실적 드라마는 이러한 끔찍한 시나리오의 예고편에 불과할지 모른다. 우리는 여기에 어떤 준비가 되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