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핵'안보"

[평양에서 왔습니다] <21>~<25>

서석천 2025. 3. 15. 05:25
[평양에서 왔습니다] <21>
죽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집으로 가는 아이들
 
신병 훈련
 
내가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 입학해 처음으로 받은 훈련은 갓 입대한 군인들이 받는 것과 같은 신병 훈련이었다. 나는 2개월가량 신병 훈련을 받았다. 대학에서 무슨 신병 훈련이냐고 할 수 있는데,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일반 대학과 달리 정치와 군사를 동시에 배우는 곳이므로 신입생들은 반드시 신병 훈련을 받아야 한다. 이것 역시 김정일정치군사대학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와 함께 승용차를 타고 대학에 갔던 중앙당 연락부 부과장은 대학 교무과 지도원에게 나와 명수를 인계하고 악수를 하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4년 후에 봅시다.”
 
연락부 부과장은 자신이 말한 대로 진짜 4년 후에 우리를 찾아왔다. 연락부 부과장이 차를 타고 출발하자 교무과 지도원은 우리를 데리고 창고로 향했다. 창고에 있던 직원은 우리에게 군복과 신발·내의와 양말·발싸개와 배낭·세면도구 등 개인물품을 지급했다. 그런 다음 교무과 지도원이 다른 건물로 데리고 갔는데 거기가 내무반 건물이었다.
 
내무반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한쪽에 교관 사무실이 있었는데, 교무과 지도원은 나와 명수를 교관들에게 인계해 주고 자리를 떴다. 우리는 교관 지시에 따라 입고 간 사복을 벗고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런데 한 교관이 물었다.
 
동무, 담배 피워?”
 
안 피웁니다.”
 
그랬더니 내 대답과 상관없이 담배 2갑을 건네주면서 또다시 이렇게 얘기했다.
 
뭘 안 피워? 다른 친구들도 모두 안 피운다고 하고는 피우던데. , 담배 가지고 가오. 피우든지 안 피우든지 그것은 알아서 하고.”
 
나와 명수는 담배 1갑씩을 나누어 주머니에 넣고 교관을 따라 병실(내무반)로 갔다. 그때가 밤 11시경이었는데, 병실에 들어서니 다른 친구들이 자고 있었다. 그런데 병실에서 잠을 자는 친구들의 덩치가 얼마나 큰지 그들과 어울려 그들이 해내는 만큼의 훈련을 할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섰다. 이런 걱정을 하며 병실에서의 첫날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새벽부터 본격적인 신병 훈련에 들어갔다.
 
신병 훈련에서는 아침 기상으로부터 시작해 대열 훈련과 총검술 등 군인으로서 초보적으로 알아야 할 내용들을 가르쳤으며 정치상학이라고 하여 사상 교육도 병행했다. 그런데 이보다 힘든 것은 동작이 늦을 경우 가해지는 벌칙이었다. 이를테면 높이는 별로 높지 않지만 경사가 급한 산꼭대기까지 10~20회씩 뛰어 올라갔다 내려오게 한다든가, 진흙 바닥에 포복 전진을 시킨다든가, 운동장을 몇 십 바퀴씩 뛰게 한다든가 심지어 완전군장을 한 상태에서 8 이상의 거리를 구보시키기도 했다.
 
죽음의 무게에 눌린 10대 청춘
 
그러나 신병 훈련 당시 나를 가장 무겁게 내리눌렀던 것은 죽기 위해 살아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심리적 고통, 압박감이었던 것 같다.
 
아직은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10대 어린 나이에 삶()과 죽음()에 관한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던 나와 친구들은 두려움으로 치를 떨어야 했고, 그로부터 오는 엄청난 심리적 고통과 압박감을 감내해야 했다.
 
이는 당시 교관들과 상급생(당시 대학에서는 선배를 상급생으로 지칭)들이 자폭이니 자결이니 하는 말을 입버릇처럼 외우고 다녔고, 대남 분야에서 일하면 무조건 자폭 또는 자결을 해야 한다고만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반면 적극적으로 노력해 실력을 쌓고, 또 잘하면 얼마든지 죽지 않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대남이라면 무조건 죽음을 떠올리던 나에게 대남 부문에서 일한다는 건 당연히 죽어야 하고 또 죽을 수밖에 없는 거라는 생각을 갖도록 만들었다. 나중에는 내가 과연 죽기 위해서 그토록 고생을 해 가며 여기까지 왔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공포를 넘어 허무한 감정에 빠지기도 했다.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죽기 위해 살아야 하는 숙명을 삶의 진정한 의미조차 모르는 10대 청춘이 준비 없이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벅찬 것이 현실이었다.
 
▲ 조선중앙통신이 2012년 3월10에 7일 북한 김일성대 정치학과 학생들이 사격훈련하는 모습을 공개했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 학생들은 북한의 중·하위급 간부나 평범한 노동자·농민의 자식들이 대부분이고, 따라서 그만큼 순수하다고 할 수 있다. 연합뉴스
 
 
신병 훈련 때 운동장을 수십 바퀴씩 뛰는 도중에 다리나 허리가 아프다고 대열에서 낙오해 병원에 다니다가 결국 신병 훈련이 끝날 때 고향으로 돌아간 친구들이 적지 않았는데, 나는 그들이 죽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일부러 아픈 것처럼 꾀병을 부려 제대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나마 당시 교관으로 근무하던 여러 명의 전직 대남침투 요원들을 직접 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마음의 안정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들을 통해 대남 부문에서 일한다고 모두 죽는 것도 아니고, 또한 당연히 죽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 죽고 사는 것은 결국 자신의 능력에 달렸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고 그때부터 비로소 심리적인 고통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모두를 깨우치는 데는 적어도 1년 이상의 긴 시간이 걸렸고, 그러는 동안 나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과 왜 내가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하는가라는 극단적인 생각까지도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존재 자체도 알려지지 않은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의 1년여 시간은 그렇게 나를 죽음이라는 심리적인 고통 속에 머물게 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초기에 힘겨운 신병 훈련을 시키는 것은 이 과정을 통해 신입생들을 단련시키자는 목적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의지가 약한 대상들을 골라내 조기 제대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나와 같이 신병 훈련을 받던 동기생 가운데 몸이 아프거나 의지가 약한 40명가량이 신병 훈련이 끝남과 동시에 고향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신병 훈련을 받을 당시 대학에서는 각 연락소 전투조장들이 참가한 가운데 모범전투조장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그들은 모두 장발을 하고 있었다. 그때 그들을 보며 신기해 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한국에서도 장발이 유행이었던 1980년대 초반이었기 때문에 아마 대남 침투 요원인 그들도 위장을 위해 머리를 장발로 길렀던 것 같다.
 
자존심이 제일 강한 대학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다른 일반 대학과는 다른 특징적인 면들이 많다.
 
첫째,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누가 뭐라 해도 북한 최고의 대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물론 금성정치군사대학에서 김정일정치군사대학으로 개칭하면서 학제를 6년제로 확대 개편한 것도 있지만, 대학의 질을 결정하는 데 기본인 학생 선발 및 구성 상태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과거에는 물론 지금도 이 대학 신입생은 노동당간부 인사업무를 전담하는 각 시·(구역) 당위원회 조직부 간부과에서 직접 출신 성분·체력·용모·지적 수준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거의 완벽한 학생들을 1년여 동안 세세히 검증한 뒤 1개 시·군에서 1명 정도 되는 극히 적은 인원을 선발한다. 내가 입학할 당시에는 신입생이 200명 정도였는데 지금은 그때의 절반도 안 되는 50명 정도만 입학시키고 있다.
 
북한에서는 노동당이 우선적으로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인원 선발을 끝낸 다음 김일성종합대학 등 다른 대학에서 입학시험을 통해 신입생을 선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말하자면 노동당이 전국의 수재·인재들을 대상으로 완벽한 학생들을 1차로 걸러내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 먼저 입학시킨 후 6개월 뒤 김일성종합대학 등 일반 대학들이 시험과 면접을 통해 학생을 선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역에 따라서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입학생이 1명도 없는 곳도 있다.
 
따라서 사상·정신적인 측면이나 육체적인 측면, 지적인 능력 등 모든 면에서 학생들의 구성이 북한의 그 어느 대학보다 단연 우수하다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대상은 모두가 김일성종합대학에도 입학할 수 있는 능력과 수준·자격이 된다는 뜻이다. 반면에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하는 학생은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지적 수준은 되지만 출신 성분이나 체력·용모·충성심 등을 다시 심사해야 하며 그렇게 되면 일부밖에 올 수 없다. 그래서 북한에서도 제일 자존감 높고 자부심 강한 대학이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이다.
 
아마도 김일성종합대학이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비롯한 북한의 다른 모든 대학에 앞서는 것은 고위급 간부들의 자식이 많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는 고위급 간부들의 자식이 없거나 극히 적다. 그것은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이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하는 공작원이나 전투원들을 양성하는 대학이기 때문이다김정일정치군사대학 학생들은 북한의 중·하위급 간부나 평범한 노동자·농민의 자식들이 대부분이고, 따라서 그만큼 순수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출신 가운데는 노동당 대남공작부서의 하나인 문화교류국 국장(장관급)인 이광진을 비롯해 중앙과 지방의 당·행정기관 책임 간부로 일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남한에 1차로 침투했을 당시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느꼈던 가장 놀라운 점은 무엇이었나요? 오랜 시간 대남 공작원 교육을 받은 후 침투하셨을 텐데, 와서 실제 부딪혀 보니 말도 안 되게 달랐던 점들 말이에요.
 
아버지1차로 남한에 침투할 당시 처음으로 놀랐던 것은 내가 침투한 지역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던 서귀포항이 너무 밝았다는 거야. 주변을 환하게 비추는 불빛이 너무 밝아서 보름달이 뜬 것보다 밝았거든. 그래서 적외선 야시장비를 가지고 들어왔다가 사용할 필요가 없어서 배낭에 넣고 이동했어.
 
그다음 날 낮에 서귀포항에 가서 보고 여객선을 타려고 제주항에도 가 봤는데, 하나같이 그렇게 아름답고 항만 시설이 너무 잘되어 있어서 더 깜짝 놀랐어. 북한에는 사실 항만 시설을 비롯해 사회기반시설(SOC)에 대한 투자를 전혀 하지 않아 형편없거든. 그리고 또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서울에 있는 건축물들 하나하나가 너무 웅장하고 아름다웠다는 거야.
 
내가 평양에 있을 때 김일성·김정일 부자 시신이 보관되어 있는 금수산기념궁전과 인민대학습당(도서관)·만수대의사당(국회의사당)·만수대예술극장과 대극장·평양체육관·김일성경기장·주체사상탑·개선문 등 유명하다는 건축물은 다 가서 봤거든. 그리고 내가 1986년에 평양 광복거리 아파트 공사현장에 나가 건설 노동을 해 봐서 건축물에 대해 좀 볼 줄도 알거든.
 
그런 시각에서 볼 때 북한 평양에 있는 건축물들을 서울에 있는 건축물들과 비교해 보면 웅장함이나 화려함·섬세함·예술성 등에서 비교 상대 자체가 못 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또 하나는 북한에서 남한 TV나 신문 등 언론 매체를 보면서 알고 있던 것보다 승용차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어. 당시 현대자동차가 만든 스텔라 승용차가 엄청 많았는데 얼마나 차가 많은지 서울 시내에 매연이 심해 숨이 턱턱 막힐 정도였거든. 비록 공기는 나빴지만 승용차가 많다는 것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지.
 
김동식 2025-03-12 
*************************
[평양에서 왔습니다] <22>
두 달 신병 훈련 끝… 배속된 곳은 빡센 ‘특공대반’
 
 
  
먹는 것은 공산주의, 선배는 하늘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의 또 다른 특징은 먹는 것만큼은 완전히 자유롭다는 것이다. 북한식으로 표현하면 먹는 것에 있어서는 완전한 공산주의이다. 특이한 점은 북한의 대학들 가운데 유일하게 담배를 공급해 주는 대학이라는 것이다. 현재 북한의 일반 대학에서는 담배를 공급해 주기는커녕 대학생들이 스스로 구입한 담배마저도 못 피우게 통제하고 있다. 그런데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는 학생들에게 담배를 피우라고 하루 1갑씩 공급해 주고 있다.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배가 출출하고 성에 차지 않으면 얼마든지 마음껏 가져다 먹을 수 있는 등 먹고 입고 쓰는 문제에 있어서는 북한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북한식대로 표현한다면 공산주의적인 대학’, 즉 먹는 것만큼은 원하는대로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수준이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선후배 간의 관계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 대학이기도 하다. 이는 살인 기술 즉 격술을 가르쳐 주기 때문에 생긴 독특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대학은 교수님의 권위보다 1년 선배의 권위가 더 강하고 선배의 말 한마디가 교수님의 지시보다 더 잘 먹혀드는 곳이다.
 
 
물론 이와 같은 것은 따로 가르치거나 그 누구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고 과거부터 이어져 내려온 이 대학만의 전통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러한 전통에 대해 누구나가 부담스럽게 생각하거나 거부감을 가지기보다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치의 자유도 허용되지 않는 곳
 
 
김정일정치군사대학 학생들은 교육과 훈련을 받는 4년 동안 방학은 물론 휴가·면회·외출·외박 등 외부와의 접촉이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 평양 시내 관광이나 훈련 등을 위해 집단으로 움직일 때를 제외하고는 대학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
 
외부와 유일하게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수단은 편지인데, 1년에 단 한 차례 새해를 맞으며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께 연하장을 보내는 것만 가능하다. 연하장은 밀봉하지 않은 상태로 지휘부에 제출해 보안성 검토를 마친 다음 발송되며 답장은 절대로 받아볼 수 없다. 발신자 주소를 조선평양 제629로 기재해서 보내는데 그런 주소지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집에 다녀오는 것은 부모님 가운데 어느 한 분이 사망했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이 경우에도 노동당 조직을 통해 연락이 오면 대학에서 담당 지도원이 동행하는 조건으로 장례를 치르는 3일 동안만 집에 다녀올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업무상의 보안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철저하게 실행되고 있다.
 
이 외에 교수나 학생들 가운데 여자가 단 한 명도 없는 금녀(禁女)의 대학이라는 것도 이 대학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공작원 교육을 받는 대상들은 제외하고 말이다.
 
군인은 아닌데 군대보다 군기가 더 강한 대학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정치대학인 동시에 군사대학이어서 대학의 조직 체계가 군사지휘체계 형식으로 되어 있다. 대학에는 대대본부가 있고 그 밑에 일종의 학과와 같은 반별 중대가 있고 1개 중대는 4~6개의 소대로 편성되어 있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특공대반(학과) 2개 중대·항해반 1개 중대·기관반 1개 중대·통신반 1개 중대 등 5개 중대가 있었다. 나는 1중대(특공대반)에 소속되었는데 우리 중대에는 1학년 1개 소대·2학년 1개 소대·3학년 2개 소대 등 4개의 소대가 있었다. 나보다 1년 선배들부터 4년제로 바뀌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4학년이 없었다. 나는 1학년이었으므로 당연히 중대의 맨 마지막 소대인 4소대였다.
 
모든 중대는 가장 높은 학년의 학생을 중대장으로 임명하며, 소대의 지휘관은 같은 또래의 소대원들 가운데 대학에서 임명한다. 그리고 과거 대남침투 전문요원었던 전투원 출신을 중대지도원으로 임명해 중대 전체의 일상생활 지도를 담당하도록 하고 있다. 매 소대에는 담임교원(교수)을 두어 소대를 관리하도록 하고 있다.
 
내가 속했던 1중대 지도원은 당시 40대 중반의 남포연락소 전투원 출신으로 공화국영웅 칭호를 수여받은 이태규였다. 우리 소대 담임교원 역시 개성연락소 전투원 출신으로서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은 40대 중반의 지형학(독도법담당 교원 김치호였다. 김치호는 남한에 침투했다 한국군에 노출되어 교전이 벌어졌는데, 함께 침투했던 조장은 사망하고 혼자만 겨우 살아 돌아온 것이 오히려 죄가 되어 엄청난 검증 과정을 거쳐야 했다고 한다.
 
대학에서의 모든 일상생활은 중대 또는 소대 단위로 진행된다. 새벽에 기상해 진행하는 아침체조와 함께 식당에서의 하루 3끼 식사·저녁 행군·강연과 영화관람·취침전 점검(일석 점호) 등은 철저히 중대장의 지휘에 따라 이루어지고, 강의와 실습·훈련 등은 소대장의 지휘하에 소대 단위로 진행된다.
 
이렇게 중대 또는 소대 단위로 이루어지는 모든 일과가 대학을 둘러싼 철조망 울타리 안에서 중대장과 소대장의 지휘에 따라 철저히 통제된 가운데 진행되기 때문에 군대보다 더 군기가 셀 수밖에 없다.
 
훈련이 가장 많고 힘든 특공대반에 배속되다
 
2개월간의 신병 훈련이 끝난 후 본과에 배속되었다. 나는 특공대반’ 1중대에 배속되었다. 특공대반은 특공대학과라는 말과 같은 것으로 일종의 단과대학인 셈이다.
 
당시 전투원양성반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특공대반과 항해반·기관반(선박엔진통신반 등 4개의 반이 있었고, 매년 신입생을 선발해 4년제로 운영했다. 내가 입학할 당시 전투원양성반 전체는 600명 정도였고 그중 특공대반은 230명 정도였다. 모든 반에서는 전공에 관계없이 일반 사회대학과 마찬가지로 철학·경제학 등 사회 과목과 수학·물리·영어 등 기초 과목들을 가르쳤다.
 
한편, 반별 특성에 맞게 특공대반에서는 정규전과 비정규전 등에 필요한 전술을 위주로 가르치고, 항해반·기관반·통신반에서는 각 반의 특성에 맞게 항해와 선박엔진·통신 등에 필요한 이론과 실습·훈련 등을 실시했다.
 
나는 중앙당 연락부 소속 공작원으로 선발되었지만 특공대반에서 위탁교육을 받고 연락부 공작원으로 복귀해 남파 공작원으로 활동하게 된 특수한 케이스다. 신병 훈련이 끝난 후 전투원양성반 본 과정에 입소한 동기생이 170명 정도였는데, 그중 나를 포함해 5명만 최종 공작원으로 선발된 후 위탁교육을 받은 인원이었다.
 
철없는 1학년
 
1학년 교육은 국사와 지리, 김일성·김정일 혁명역사와 노작(勞作) 등 교양과목과 수학·물리·전기공학·화학 등 기초 과목에 대한 강의가 주를 차지했다.
 
여기에 격술(무술사격·수영 훈련도 진행했다. 아울러 지형학(독도법)과 정규군 보병 전술훈련 등 군사 기술적인 내용에 대해 이론강의를 한 다음 그것을 실습과 훈련을 통해 숙달하는 방법으로 가르쳤다.
대표적으로 몇 가지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김일성·김정일 노작은 김일성·김정일이 역사적으로 발표한 노작 가운데 이론적인 가치가 있는 대표적인 노작들만 몇 가지 골라 가르치는데, 대표적인 사상교육 과목이라고 할 수 있다. 김일성·김정일 혁명역사와 함께 주체철학· 김일성군사사상이론 등도 사상교육 차원에서 가르쳤다. 특히 주체철학 과목에서는 남조선혁명을 위한 성스러운 임무를 수행하다 적들에게 체포되는 최악의 상황에 처하면 혁명적 자폭으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충성해야 한다며 자폭 정신 교육을 강화하였다.
 
사격은 소련제 TT권총과 자동보총(AK소총기관총 등 여러 종류의 무기 구조와 성능을 익히고 1개월에 2·3차례씩 실탄 사격을 하는 방법으로 이론교육과 훈련을 병행하였다.
 
수영은 여름 한 달 동안 평안남도 대동군에 있는 독좌저수지에 나가 텐트를 치고 야숙(野宿)하면서 평영 기초동작부터 배우고 마지막에 8의 거리를 2시간30분 이내에 주파하는 것으로 판정하였다. 당시 나는 2시간 20분 만에 주파함으로써 합격할 수 있었다.
 
내 기억에는 1학년 때 실시한 수영 훈련이 대학에 입학해서 받은 첫 훈련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대학 4년을 통틀어 받았던 여러 종류의 훈련 가운데 가장 힘든 훈련이었던 것 같다. 수영 훈련을 할 때는 난생 처음으로 한 번에 30여 명 분량의 식사 준비도 해 보았다. 며칠에 한 번씩 식사 당번을 하면서 밥물의 양과 화력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 밥을 태우거나 설익게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지형학(독도법)은 강의시간에 지도를 보고 자기 위치를 판정한 후 목적지를 찾아가는 방법 등을 가르친 다음 야외에 나가 실습과 훈련을 통해 자기 것으로 만드는 식으로 훈련했다.
 
정규군 보병전술 역시 이론강의를 받은 후 약 한 달 동안 야외 훈련을 하는 방식으로 가르쳤다. 수학·물리·전기공학·화학 과목 등은 기초적인 수준에서 가르쳤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첫 남한 침투 후 임무를 마치고 북한으로 돌아가 생활하며 혹시라도 남한 생각이 난 적은 없었나요? 예를 들면 남한의 음식이라든지 그런 거요,
 
아버지왜 없었겠어? 있었지. 남한에 침투해 임무를 마치고 북한으로 돌아가 생활하며 첫 번째로 강하게 생각난 것은 자유라는 것이었어. 남한에서 생활할 때는 북한에서 하듯이 김씨 일가 역사 학습이나 생활총화 등을 안 해도 되었거든. 그런데 북한에 들어가자마자 이런 걸 다시 시작하는 거야. 물론 예전에도 다 했던 것들이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다 알고 있는 내용인데 또 공부하라고 하고 시도 때도 없이 회의를 하자고 하고, 이것저것 과제를 주고 결과를 보고하라고 하는 등 한시도 가만 놔두질 않았어.
 
그렇게 사람을 달달 볶으니까 사람이 참 간사한 게 바로 , 답답해서 어디 살겠나? 남한에 다시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바로 들더라고. 남한에 침투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그럼에도 남한에 다시 침투하겠다고 생각했다는 건 어쩌면 자유가 목숨보다도 소중하다는 것이 아니겠어?
 
난 그때 자유라는 것은 어렵고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이 남에게 구속되거나 통제받지 않고 살려는 인간 본연의 속성이라고 생각했고, 자유가 그렇게 소중하다는 걸 다시 한번 절감했어.
 
그리고 남한에서 먹어 본 음식 중에서 제일 생각났던 것은 이선실 할머니 집에 세 들어 살던 아주머니가 노량진시장에서 싱싱한 오징어를 사다 만들어 주셨던 오징어무침이었어. 당시 평양에는 오징어무침이라는 음식이 없었는데, 서울에 와서 처음 먹어 봤거든.
 
싱싱한 오징어를 사다 무침을 하니까 매콤달콤하면서도 시원하고, 참기름을 듬뿍 넣어 고소하고 맛있었는데, 평양에 가서는 물론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 없어.
 
김동식 2025-03-13 
*************************
[평양에서 왔습니다] <23>
김정일정치군사대학 격술사범 된 명동 깡패
 
 
행군은 도보가 아니라 구보로 통하는 대학
 
김정일정치군사대학만의 또 다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1학년에 편입되면서 곧바로 시작되는 육체 단련을 위한 행군 훈련이다. 일반적으로 행군은 무기와 탄약·식량·밥통(반합)·물통 등 각종 개인 장비가 들어간 배낭을 휴대하고 목적지까지 부지런히 걸어서 도착하는 것이지만,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의 행군은 그게 아니다. 일반 장비가 들어간 배낭이 아니라 15~20 무게의 모래 배낭을 지고 출발해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뛰는 것이다. 한마디로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의 행군은 도보가 아니라 구보라는 것이다. 구보 형식의 행군을 매일, 그것도 밤에만 실시하고 있다.
 
보통 매일 저녁식사가 끝난 후 8시쯤 출발하는데 평일에는 8, 매주 토요일에는 20,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는 40,  100리 거리를 출발할 때부터 마지막까지 뛰어서 들어오는 것이다. 40 4시간 반 이내에 주파해야 하기 때문이다.
 
해마다 새해를 맞으며 처음으로 실시하는 행사가 있다. 북한에서는 첫 전투라고 하는 이 행사는 설 연휴 마지막 날 밤에 실시하는 100리 행군이다. 그래서 새해를 맞는 학생들의 기분이 썩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한번은 설 연휴 마지막 날 100리 행군을 할 때 중대별 경기를 한 적 있는데, 내가 지휘하던 1중대가 1등을 하겠다며 100리를 3시간 반 만에 뛰어서 들어온 적도 있다.
 
명동 깡패 출신 격술사범, 태권도 접목시켜 탄생한 북한 최강의 격술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가르치는 격술은 태권도와 유도·호신술·기합술·합기도·잡기 등을 혼합한 종합무술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유행하는 UFC 등 이종격투기와 유사하다고 보면 틀림없는데, 정확히 말하면 남자끼리니까 음부 타격만 못하게 되어 있을 뿐 그 나머지는 어디든 타격할 수 있는, 정해진 룰이 전혀 없는 이종격투기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렇게 보면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는 이미 이종격투기를 가르친 셈이다.
 
1학년 때는 스트레칭과 준비운동으로부터 시작해 발차기와 팔 뽑기(태권도의 주먹 지르기) 동작 등 기초동작부터 가르쳐 주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격술교원(사범) 가운데 유흥준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은 원래 서울 명동 깡패 출신이었다고 한다. 6·25 전쟁 때 월북한 후 남파 공작원들을 가르치는 격술사범을 했는데 내가 대학에서 교육받을 당시 60대 중반의 나이였음에도 손동작이 매우 빨라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도복 소매의 바람 소리가 정말 날카로웠다.
 
유흥준의 수제자로 김정일정치군사대학 격술 강좌장(학과장)을 역임한 문응준이 그의 뒤를 이었고, 이들의 뒤를 이어 대학 12기 졸업생 김성복이 학생들에게 격술을 가르쳤다. 참고로 김성복은 다대포 사건의 전충남과 동기생이며, 문응준은 1980년대 중반 격술 관련 논문을 써서  석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한편 1980년대 초 국제태권도연맹 총재였던 최홍희가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에 포섭된 후 박종태·이기하 등 태권도 사범들을 들여보내 처음으로 북한에 태권도를 보급한 바 있는데, 당시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는 16기 졸업생으로 격술사범에 임용된 김명철과 김천일을 수련생으로 위장시켜 태권도를 배워 오도록 한 다음 태권도의 발차기 기술을 비롯한 좋은 기술들을 격술에 접목해 업그레이드하기도 했다.
 
그래서 북한에서도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가르치는 연락소 격술’의 수준이 북한군 정찰총국 산하 15호 격술연구소 등 다른 기관의 격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격술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인정하고 있다.
▲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200군부대를 시찰하고 군인들의 훈련을 지켜봤다고 조선중앙TV가 2008년11월5일 보도했으나 시찰 날짜와 장소는 밝히지 않았다. 북한 군인들이 김 위원장 앞에서 격투 훈련을 하고 있다. 조선중앙TV=연합뉴스
 
 
 
도로포장 안 했다고 대학에 오지 않은 김정일
 
1학년 후반기인 1982 1월에는 대학 창립 25주년을 맞으면서 김정일이 대학을 방문한다고 하여 졸업반 선배들 위주로 격술 시범과 예술 공연을 준비했다.
 
나는 그때 개량 단소를 조금 불 줄 안다고 해서 예술공연팀에 배속되어 선배들과 함께 약 2개월간 연습을 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끝내 김정일은 나타나지 않고 대신 당시 노동당 정치국위원으로서 대남담당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이었던 김중린이 대학을 방문해 김정일 명의로 된 축하문을 전달하고 우리가 준비했던 격술 시범과 예술 공연을 보고 돌아갔다.
 
당시 김중린은 대학에 있던 악기들이 낡고 부족한 것을 보고 미화 2만 달러를 보내줄 테니 필요한 악기들을 사 오라고 하면서 큰소리 치고 돌아갔는데, 그 후에 돈을 한 푼도 보내 주지 않아 학생들이 당 정치국위원도 거짓말을 한다고 비난했던 적이 있다.
 
나중에 알게 된 바에 의하면, 1982년 당시 김정일이 창립 25주년을 맞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방문하지 않은 것은 경호 문제 때문이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평양·순안 국제공항 간 고속도로에서 대학으로 진입하는 도로가 포장된 지 오래돼 노면 상태가 형편없어 그것을 이유로 방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일성이나 김정일, 현재의 김정은을 포함해 이들 김씨 일가가 어떤 기관이든 방문하려면 먼저 진입로 포장부터 새로 해야 하며, 이러한 사실은 웬만큼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비밀 아닌 비밀이다.
 
하여튼 1학년 시절은 평범한 일반인이 대남요원으로 처음 발을 들여놓고 이것저것 배우느라 물인지 불인지도 분간 못 하며 철없이 보냈던 것 같다.
 
심화되는 이론교육과 본격적인 실전 훈련의 시작
 
2학년에 올라가면 기초·교양 과목들에 대한 강의는 기본적으로 끝내고 사상이론 과목과 함께 대남 침투에 필요한 교육과 훈련을 본격적으로 실시한다.
 
사상이론 과목으로는 우선 1학년부터 시작된 김일성 혁명 역사와 김일성·김정일 노작 과목 강의가 계속되었다. 여기에 김일성주의 기본과 주체 철학·정치경제학 및 김일성 군사사상이론과 미·일 침략사, 남조선 정세 등의 과목들이 추가되었다.
 
김일성주의의 기본은 말 그대로 김일성주의의 기본 원리, 즉 주체의 사상·이론·방법 등에 대해 종합적으로 이론화해 가르치는 과목이다. 정치경제학은 마르크스·엥겔스의 자본론에 기초해서 이론화한 자본주의 경제이론과 사회주의 경제이론에 대해 배우는 과목이다.
 
주체 철학은 철학의 일반적인 범주와 원리·유물 변증법적인 관점에서 전개한 철학적 문제들과 함께 주체사상의 관점에서 고찰한 철학적 원리와 사회·역사적 원리, 지도적 원칙 그리고 이로부터 전개되는 철학적 세계관과 사회 역사관·혁명관과 인생관·수령관에 관한 이론 등을 종합적으로 가르치는 과목이다.
 
김일성군사사상이론은 김일성의 군사 사상과 군사 전술에 관한 이론을 집대성해서 가르친다. ·일 침략사는 북한에 대한 미국과 일본의 침략 역사를 체계화해서 가르치는 학문이다. 남조선 정세는 남한의 정치·경제·사회·군사·문화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일반적인 이해를 하기 위해 마련된 과목이다.
 
또한 2학년부터 대남 침투와 관련된 전문교육을 실시하면서 여러 가지 훈련도 본격적으로 진행하는데 지형학 훈련·비합법 전술훈련·잠수 훈련 등이 그것이다. 격술 훈련은 태권도에 유도 기술을 배합해서 배우는 등 점차 높은 수준에서 실시한다.
 
지형학 훈련은 자기 위치 판정과 함께 목표 지점까지의 정확한 접근이 기본인데, 훈련을 낮에 하지 않고 캄캄한 밤에만 실시하기 때문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 즉 캄캄한 밤에 지도와 지남침(나침의)만 들고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노정을 따라, 그것도 거의 산속으로만 하룻밤 사이에 평균 20~30km씩 이동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목적지까지의 거리가 40km 될 때도 있었는데 처음에는 고생을 무척 많이 했다.
 
특히 짙은 안개가 낀 밤에는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아 가까운 곳의 야산도 먼 곳에 있는 높은 산처럼 보인다. 처음으로 지형학 훈련을 나갔을 때 안개가 너무 많이 끼고 경험마저 없어 행군 노정을 오인한 줄 알고 당황해서 밤새도록 한 자리만 뱅글뱅글 돌다가 날이 밝아서야 비로소 정해진 노정을 따라 돌아온 적도 있다.
 
반면, 지형학 훈련을 할 때에는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여름이나 가을에 훈련할 때면 교관이 정해준 행군 노정도 아닌데 일부러 과수원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갔다. 그러다 관리원에게 발각되면 훈련 노정이 이곳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과일을 실컷 따 먹고 배낭에도 가득 채워 숙영지에서 친구들과 나눠 먹기도 했다.
 
비합법 훈련은 말 그대로 상대에게 발견되지 않고 목적지까지 접근해 임무를 수행하는 훈련인데, 이 훈련은 비합법 행군과 숙영·접선·무인 포스트 발굴과 매몰 방법 등을 강의를 통해 이론적으로 배운 다음 그것을 직접 실습하고 훈련하는 방법으로 한다. 일단 이동 과정에 민간인에게 발견되면 안 되기 때문에 밤에만 이동하되 일반인들이 다니지 않는 산속으로 은밀하게 이동한다.
 
숙영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해야 하므로 지형지물을 잘 이용해 보이지 않게 한다든가, 땅속에 비트를 파고 들어가 자는 방법으로 한다. 사실 사람이 들어가 지낼 수 있는 비트를 파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보통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로 땅을 파면 1.5t 트럭 1대 분량의 흙이 나왔던 것 같다. 그런데 큰 삽도 아닌 손바닥 크기의 야전삽으로 짧은 시간 내에 흙을 파내고, 다른 사람이 지나가면서 봐도 모를 정도로 출입구를 위장한 다음 그 안에 들어가 새벽에 날이 밝기 전부터 저녁 어두워질 때까지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야 하니 고역도 그런 고역은 없다. 대학 기간과 그 후 공작원 생활을 하면서 판 비트가 아마도 100개가 족히 넘을 것이다.
 
무인 포스트의 매몰과 발굴은 지도상에 정해 주는 지점을 정확히 찾아가 남에게 노출되지 않게 연락물을 매몰하거나 이미 매몰되어 있는 연락물을 발굴해 오는 것이다. 접선 역시 지도상에 지정해 준 장소까지 지도를 이용해 찾아가서 약속된 시간에 약속된 신호와 암호를 교환하는 방법으로 만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비합법 훈련은 2학년부터 4학년까지 했는데 그 기간을 다 합치면 7~8개월은 족히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어릴 때 가족여행을 떠나면 군 관련 시설 혹은 안보 관련 전시관을 종종 들렀던 것 같습니다. GOP(general outpost·남방한계선을 지키는 소대 단위 초소) 복무 때 생활하면서 이런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구요. 여수에 여행 갔을 때 해상 침투 시 사용된 반잠수정이 전시된 곳에 가서 아버지로부터 상세한 설명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생각보다 좁고 낙후되어 보이는 외관과 규모에 놀랐고, 무엇보다 그 안에서 긴 시간 항해해 왔을 아버지 생각에 그때는 사실 궁금한 것들을 질문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북한을 떠나 바다 한가운데를 항해하며 어떤 생각들로 그 시간을 버티셨나요?
 
아버지: 사실 내 입장에서는 공작선에 승선해 북한을 떠나던 그 순간이 심리적으로 가장 힘든 시간이었어. 우리가 남한에 침투하기 위해 공작선에 승선하면 그때 엔진 시동을 거는데, 공작선에 장착된 1500마력짜리 엔진 4대의 시동을 동시에 거는 거니까 부르릉 하고 들리는 엔진소리가 어마어마하게 크게 들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머릿속이 하얗게 되면서 ‘아이제는 드디어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를 남한으로 가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 그러면서 내가 만약 죽을 상황에 놓이면 천하의 누구도 나를 구해 줄 수 없지그러니 내가 죽지 않으려면 정말 죽을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도 동시에 떠오르더라고. 정말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 외에 아무 생각 없었어.
 
그런데 공작선을 타고 육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 공해상에 나가면 그때부터는 그냥 공작선에 운명을 맡기는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왜냐하면 공해상에서 배가 뒤집히거나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아무리 수영을 잘해도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공작선이 공해상에 나갈 때쯤 되면 약간 체념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때부터 날치 떼도 구경하고 먼 곳에서 지나가는 상선 구경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거지.
 
그러면서도 공작선을 타고 이동하는 기간이 3일이나 되니까 그 기나긴 시간 동안 나를 안내해 주는 사람들과 얘기도 하고, 또 남한에 침투한 다음에는 무엇부터 어떻게 할 건지 북한에서 구상했던 액션플랜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면서 이동했어.
 
반잠수정을 타고 해안으로 향할 때는 목숨을 버린다는 각오로 제발 경비병에게 발견되지만 않게 해 달라고 마음속으로 빌면서 들어왔지.


김동식  2025-03-17
**********************

[평양에서 왔습니다] <24>
아버지 고향 보려 GOP 자원한 아들 자랑스러워
 
 
돌고래처럼 물속에서 목표물까지 정확히 도달하도록
 
여름에는 1학년 때 수영 훈련을 했던 평남 대동군 독좌저수지에 나가 잠수 훈련을 실시했다. 잠수 훈련은 3주에 걸쳐 진행됐다. 이때엔 잠수복을 착용하고 오리발을 신은 다음 면경(수경)을 쓰고 빨대(스노클)를 입에 물고 숨을 쉬는 방법으로 했다. 북한에서는 이러한 잠수 방식을 반잠수라고 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북한 경제 사정이 좋아서 우리가 잠수 훈련할 때 포도주(와인)를 공급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보통 잠수는 기압이 낮은 물속에서 하기 때문에 혈관이 수축된다고 하면서 수축된 혈관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와인을 공급해 준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무튼 우리는 오전 훈련이 끝나면 점심 식사할 때 와인을 밥공기에 가득 따라 마신 다음 반쯤 취한 상태에서 낮잠을 자고 오후 훈련에 임했던 생각이 아직도 난다.
 
당시 우리가 했던 잠수 훈련의 목표는 잠수복을 착용하고 스노클을 입에 물고, 손목에 찬 나침반으로 방향을 잡은 다음 물속에 들어가 한 번도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지 않고 나침반만 보면서 목표물까지 정확히 도달하는 것이었다. 돌고래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데 어떻게 한 번도 수면 위로 나와 전방 확인을 하지 않고 물속에서 목표를 정확하게 찾아갈 수 있냐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반복 훈련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래서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위해 매일 오전과 오후에 각각 3·4시간씩 물속에 들어가 폭 1.5 정도인 저수지를 여러 번 왕복하면서 목표에 정확히 도달하는 방식으로 잠수 훈련을 실시했다. 처음엔 결코 쉽지 않았다. 실제로 손목에 나침반을 차고 바늘이 흔들리지 않도록 방향을 유지한 채 오리발을 열심히 저었는데 수면 위로 나와 보니 그 자리에서 뱅글뱅글 돌다가 나온 것을 알고 황당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잠수 훈련이 끝난 다음 마지막 테스트는 1.5 전방 중심에 빨간 깃발대를 꽂아 놓고 양쪽에 15m 간격으로 2개의 깃발대를 꽂아 놓은 다음 총 30m 구간인 그 사이로 들어와야 합격으로 간주하는데, 30명 소대원 모두 합격 판정을 받았다.
 
설치는 2학년, 훈련 중 발생한 군인들과의 격투
 
야외 훈련을 할 때엔 현역 군인들과 자주 싸움도 했다. 나는 지형학 훈련 나갔을 때 처음으로 강건군관학교 1개 소대와 싸움을 한 적이 있다. 초급군관(장교) 양성기관인 강건군관학교(현재는 강건종합군관학교’)는 빨치산 출신으로 북한군 초대 총참모장을 지낸 강건의 이름을 붙인 곳으로, 한국의 육군사관학교와 유사한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북한군에 입대해 3~5년 정도 복무한 군인들 가운데 우수한 인원을 선발해 입학시키기 때문에 학생들의 수준도 괜찮다.
 
당시 나는 강원도 평강 출신의 고종철과 21조가 되어 지형학 훈련을 하던 중 교관이 지정해 준 산악 코스를 돌고 산 밑으로 내려와 도로를 따라 숙영지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20여 명의 군인이 군복 상의를 벗은 채 열도 짓지 않고 무리 지어 우리 옆을 지나쳤다. 당시에는 격술 훈련 시간에 유도 기술까지 배우고 있을 때여서 몸이 근질근질했다. 그래서인지 같이 가던 친구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
 
! 무슨 군인들이 무질서하게 옷을 벗고 다녀?”
 
그때는 밤 12시경이어서 가까이에서 보면 어렴풋이 얼굴이 보일 정도였다. 우리는 계급장이 달린 군복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복도 아닌 어정쩡한 옷을 입고 있는 상태였다. 원래 연락소 군복은 북한 민간 무력인 적위대 복장과 유사하다. 그래서 당시 군인들 눈에 우리는 틀림없이 사복 차림의 민간인으로 보였을 것이다.
 
민간인 XX가 가던 길이나 갈 것이지, 별참견을 다 하네.”
 
친구가 싸움을 걸기 위해 다시 받아쳤다.
 
!  XX. 민간인이면 군인들에게 말도 못 하나?  XX들이 바른말을 하면 잘 듣고 고칠 노릇이지. 누구에게 반말을 하고 참견한다고 해?”
 
이렇게 우리가 건 시비에 결국 군인들이 말려들어 친구와 나는 현역 군인 1개 소대 인원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만 해도 북한군 일반 부대에서는 격술을 가르치지 않을 때여서 우리는 그들을 쉽게 상대할 수 있었다. 당시 배우고 있던 유도까지 배합해 한참 동안 발로 차고 업어치기를 하면서 싸우는 도중 그들 중 일부가 가까운 마을에 뛰어가 몽둥이를 찾아 들고 와서 달려들었다.
▲ 김정은(오른쪽) 북한 국무위원장이 2025년 2월25일 강건종합군관학교를 현지지도 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이튿날인 26일 보도했다. 김일성정치대학이 군대 내 사상과 당 통제를 담당하는 정치 장교 양성기관이라면 강건종합군관학교는 육군 지휘관 양성기관이다.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당시 우리는 북한군 군관(장교)들이 허리에 매는 벨트(‘군관 혁대 또는 각개 반도라고 함)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풀어서 몽둥이 공격에 대응하려고 했다. 그렇게 싸움이 험악한 상태까지 이른 순간 군인들 뒤쪽에서 싸움을 그만하라는 명령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군인들은 우리를 공격하려다 중단했고, 이어서 나이가 좀 많고 계급이 높아 보이는 군인 2명이 다가오며 말했다.
 
저희가 잘못했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싸움은 그만둡시다. 저희들은 동지들이 어떤 곳에 계시는지 다 압니다. 저희들은 개성과 해주에서 군복무를 하다가 강건군관학교에 왔는데, 그곳에 있는 연락소 사람들을 만나 봐서 연락소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 있는 친구들은 몰라서 그랬으니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그래서 우리도 더 이상 싸우지 않기로 하고, 그들에게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한 다음 혹시 우리와 싸우다가 다친 사람이 없는지 물어보았다. 2명이 이가 부러지고 다른 몇 명은 얼굴에 상처가 나 피를 흘렸지만 치명적인 부상은 없어 다행이었다. 우리는 그들 모두에게 담배를 권하며 화해를 한 다음 숙영지로 향했다.
 
숙영지로 오는 도중에 다른 팀을 만났는데, 같이 있던 친구가 그들에게 군인들과 싸운 사실을 자랑삼아 이야기했다. 그때만 해도 외부에 나가 싸움을 많이 해 보지 않은 때여서 우쭐해서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내용을 전해 들은 다른 친구가 숙영지에 돌아와 마치 자기가 군인들을 때리고 온 것처럼 큰 소리로 이야기하다 결국은 옆 텐트에서 쉬고 있던 교관들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교관들은 우리가 싸운 사실이 상부에 보고되어 추궁당한 것처럼 꾸미기 위해 일부러 일정한 시간이 경과한 뒤 비상집합을 시켜 놓고 조금 전에 중앙당에 우리가 군인들과 싸웠다는 신소(민원)가 제기되었는데다시 한번 훈련 도중에 싸움을 하면 더 이상 용서할 수 없으니 특별히 조심하라며 우리를 단단히 추궁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풋내기였던 우리는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하고 꼼짝없이 교관들에게 당했다.
 
식중독 걸려 창자가 끊어져 나갈 정도의 아픔을 겪다
 
2학년 때는 왕재산 답사라고 하여 김일성이 빨치산 활동을 하던 1930년대 초반에 다녀갔다는 함경북도 온성군의 왕재산과 새별(경흥·아오지청진·경성(주을회령 등 함경북도 지역 답사를 10일 정도 다녀왔다. 답사란 일종의 관광을 겸한 현장 사상학습이다.
 
답사를 할 때는 유스호스텔과 유사한 답사숙영소에서 숙식을 하게 된다. 지금도 그 당시 함경북도 청진시에 있는 답사숙영소에서 나를 포함한 40여 명의 인원이 집단으로 식중독에 걸려 고생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날은 경성(주을) 온천을 참관하러 가는 날이었다. 나와 2명의 친구가 맨 처음 식중독에 걸려 쓰러지자 식중독에 걸린 3명은 그대로 청진의학대학병원으로 실려가 진료과(특별과)에 입원해서 비교적 편하게 치료를 받았다. 당시 나는 여러 차례의 구토와 설사를 했는데 창자가 끊어져 나갈 정도로 아파 배를 움켜쥐고 방안을 데굴데굴 굴렀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식중독 증상이 나타나지 않은 나머지 친구들은 참관지인 경성을 향해 출발했다가 이동 중인 버스 안에서 여러 명이 구토하며 쓰러져 참관도 제대로 못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후 식중독에 걸린 인원이 너무 많아져 병원에도 입원하지 못한 채 청진시내 의사들을 총동원해 숙소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런 이유로 청진 답사숙영소는 보위부 조사를 받아야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보위부 조사 결과 무더운 여름철에 전날 먹다 남은 밥을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주어 그것이 변질되어 식중독에 걸리게 됐다는 결론이 내려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후에 종합 판정 훈련을 위해 청진에 갔을 때 음식 먹을 생각이 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청진이라면 김책제철소에서 나오는 매연과 나쁜 공기, 도시 전체가 온통 매연에 그을린 것처럼 까만 풍경으로만 기억되고 식중독에 걸려 고생했던 생각만 난다.
 
계속되는 싸움, 싸움판이 된 함경북도 온성
 
한편, 왕재산 답사 기간에 함경북도 온성에서는 현역 군인들과 싸움을 하기도 했다. 당시 우리는 단체로 저녁에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다. 극장 안에 들어가서는 한 블록을 다 차지하고 모여서 앉았다. 그런데 우리가 모여 앉으려고 하는 블록 안에 중사 계급장을 단 군인과 애인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래서 우리 소대 친구가 그에게 양해를 구했다.
 
동무, 우리가 지금 단체로 왔는데 동무도 집단생활을 하는 사람이니까 자리를 좀 양보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그 군인이 버럭 화를 내면서 자리를 결코 양보할 수도 없고, 또 양보해 줄 생각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언쟁이 시작되었다. 양측 간에 조용히 이야기하자고 나간 복도에서 결국 싸움으로까지 번졌다. 서로 치고받는 본래 의미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우리 동료들이 일방적으로 군인을 때렸다. 그러자 인민군 중사는 칼까지 뽑아 들고 달려들었고, 결국 만신창이가 되도록 우리에게 맞았다.
 
다음 날 알고 보니 그는 온성 시내의 아가씨들을 못살게 구는 등 불량기가 심해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잘되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런 가운데 지도원들이 군당(郡黨)에 찾아가 상부에 보고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다행히 싸움 후에도 상급자들로부터 추궁을 받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다음 해에 후배들이 하필 그곳 온성에 가서 또 싸움을 했다. 뒤처리를 잘못해 그 사실이 중앙당에 보고(신고)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래서 결국 그 사건을 조사하던 중앙당 간부들에 의해 1년 전에 우리가 싸움질한 것까지 밝혀지게 되었다. 당시 우리를 인솔하고 갔던 지도원들까지 문책을 당했다. 그리고 그때 물의를 일으켰던 후배들 가운데 주동자는 시범 케이스로 강제 퇴학당했다.
 
하여튼 대학 전 기간을 보면 한창 격술을 배우고 익힐 시기가 2학년 때라 그랬는지 다들 한 번씩 실전에서 직접 경험해 보고 싶은 심리가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2학년 시절에 군인들과 가장 많이 싸움을 벌였다. 반면 3학년이 되면 싸움도 먼저 걸지 않고 가급적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 등 2학년에 비해 상당히 점잖은 신사가 된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제가 태어난 후 저를 키워 오시면서 제가 아빠를 정말 많이 닮았다고 느끼게 되는 건 언제인가요? 또 제가 자랑스럽다고 느끼신 건 언제였나요?
 
아버지네가 나를 닮았다고 느낄 때는, 물론 겉모습도 나를 좀 닮았지만 그보다는 네가 갖고 있는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마인드야. 어떤 일이든 긍정적이고 낙천적으로 생각하는 태도와 습관이라고 할까.
 
나는 이때까지 그런 마인드로 살아왔어. 아마도 그런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이 없었다면 공작원을 했더라도 남한에 침투하지 못하고 도중에 제대했거나 이미 죽었을지도 몰라. 아무튼 그런 모습이 나를 닮은 것 같아서 좋아.
 
그리고 너를 자랑스럽다고 느꼈을 때는, 네가 신병훈련소 조교로 좀 더 편한 군 생활을 할 수 있었는데도 아버지 고향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보고 느끼고 싶다며 최전방 GOP에 올라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야.
 
아버지의 고향을 더 가까이에서 보고 느끼고 싶었다는 너의 말을 듣고 느꼈던 그때의 뿌듯함은 아마 평생 못 잊을 거야.
 
김동식  2025-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