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경재
[스파이 세계]<31>~<35>
서석천
2025. 3. 12. 04:39
이스라엘 스파이 美해군 정보분석관 ‘조나단 폴라드’

1985년 11월21일 30대 초반의 남자가 아내와 함께 워싱턴 D.C. 소재 이스라엘 대사관 정문으로 가 망명을 하겠다고 거듭 요청했으나 경비병에게 쫓겨났다. 그리고 체념하고 돌아가는 순간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에게 체포되었다. 이 남자가 바로 해군의 민간 정보분석관 조나단 제이 폴라드(Jonathan Jay Pollard·당시 31세)다. 그는 1984년 6월부터 체포될 때까지 1년 5개월간 이스라엘을 위해 간첩 활동을 해 왔다.
폴라드가 이스라엘에 전달한 기밀 정보는 너무나 방대하고 내용 또한 파괴적이어서 전체 파일 목록 자체가 일급비밀로 분류되고 있다. 그가 제공한 정보 중 국가안보에 가장 큰 해악이 되는 정보 중 하나는 VQ-2 전자 감시 시스템과 10권으로 된 RASIN(Radio and Signal Intelligence) 매뉴얼이다. 이 매뉴얼에는 미국의 전 세계 감청 프로필을 상세히 설명하고 국가안보국(NSA)이 어떤 통신을 감시하고 있는지, 그리고 미국이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지가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폴라드는 1954년 텍사스주 갤버스턴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가족과 함께 인디애나 주 사우스벤드로 이사했다. 그의 아버지는 노트르담 대학교에 미생물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스탠포드 대학교에 입학해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했으며 1976년에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중앙정보부(CIA)에 지원했으나 폴리그래프 조사 등에서 거짓말한 것이 탄로나 탈락했다. 매사추세츠주 메드포드에 있는 터프츠 대학교 법학과 외교학 대학원 과정에 입학했으나 졸업은 하지 못했다. 1979년 9월 해군의 민간 정보분석가로 채용되었고 이후 해군 정보국(NIS)의 인간정보 작전부서인 ‘TF-168’에 재배치되어 근무했다.
1984년 폴라드는 해군 정보국(NIS)의 분석가로 승진하여 해군 테러방지경보센터에 배치되었고 그곳에서 위성사진과 CIA 보고서 등 광범위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다. 1984년 6월 그는 이스라엘 정보요원인 아비 셀라 대령(당시 뉴욕대 대학원 박사과정생으로 위장)에게 접근해 정보 제공을 제안했다. 며칠 후 폴라드는 셀라 대령을 워싱턴 D.C.에서 만났고 아랍 국가의 군사동향 등의 정보를 넘겨주었다. 그해 말 폴라드는 휴가 기간 중 파리로 가서 스파이로서의 기본 훈련을 받고 복귀했다. 본격적인 스파이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폴라드는 매달 1500달러(현재 가치로 490만 원 정도)를 받고 약혼녀를 위한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 반지 등을 받으면서 아랍 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정보와 그들이 소련으로부터 받은 지원에 대한 정보, 예를 들면 이라크의 화학무기 제조 공장에 대한 세부 정보 등을 제공했다. 또한 1985년 1월부터 11월까지 자신의 부서에서 빼낸 컴퓨터 출력물·위성사진·기밀문서를 모아서 2주에 한 번씩 특수 제작된 고속 복사기가 있는 워싱턴의 한 아파트로 가져갔다. 그곳에서 복사를 하고 다음 날 해군에 반환했다. 폴라드 자신의 추산에 따르면 그는 이스라엘 관리자에게 기밀 출판물 800건 이상과 전문 1000건 이상을 넘겼다. 그는 국무부·국방부·법무부·CIA·국가안보국 등에서 온 광범위한 정보가 담긴 상자와 가방을 이스라엘에 제공해 왔다.
폴라드는 미심쩍은 행동으로 여러 차례 해군 당국과 FBI 등에서 조사를 받았지만 결정적 증거가 부족해 그때마다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나 당국의 감시는 지속되었다. 그러던 중 1985년 10월 사무실에서 기밀 자료를 빼내는 장면과 기밀을 담은 가방을 아내의 차로 옮기는 장면이 FBI에 포착되었다. 결정적 증거를 확보한 FBI는 체포 작전에 돌입했다. 이를 눈치 챈 폴라드는 아내와 함께 11월21일 급히 워싱턴 D.C. 소재 이스라엘 대사관에 가서 도움을 요청하다가 거절당하고 돌아가는 도중 긴급 체포된 것이다.

폴라드는 처음에는 무죄를 주장했으나 극형을 피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기밀을 전달한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다. 그럼에도 1987년 3월 최고형인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그의 아내는 5년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장관은 선고공판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4쪽 분량의 진정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소위 ‘스파이의 해’라고 불리는 이 해에도 피고가 이스라엘에 팔아넘긴 정보의 범위와 미국에 대한 결정적 중요성, 그리고 정보의 높은 민감성을 고려할 때 피고가 국가안보에 끼친 해악보다 더 큰 해악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 정보는 미국이 자국을 위해 의도적으로 보관해 둔 것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어느 누구에게든 어떤 국가에든 공개된다면 우리 국가안보에 가장 큰 해악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폴라드는 연방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다양한 수신자에게 쓴 편지에서 기밀정보를 공개하려고 14번이나 시도하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그의 아내는 1989년 석방되었고 1990년 이혼했는데 결국 이스라엘로 이주해 살았다.
이스라엘은 사건이 터지자 처음에는 폴라드와의 관련성을 전면 부인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정부는 1990년부터 그의 석방을 위한 협상을 시도해 왔다. 이스라엘 정부와 미국 내 많은 친이스라엘 단체들은 그의 석방을 강도 높게 요구했다. 1996년에 이스라엘은 폴라드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1998년 5월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폴라드가 이스라엘 스파이임을 인정하고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사과하며 로비를 했다. 하지만 그의 조기 석방 가능성은 미국 정보기관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2006년까지만 해도 조지 테넷 중앙정보국장은 백악관이 폴라드를 석방하면 사임하겠다며 강하게 반대했다. 이후 2015년에 폴라드는 가석방되었다. 단 석방 후 5년 동안 미국을 떠나는 것이 금지되었다. 가석방 기간을 마친 폴라드는 2020년 12월30일 이스라엘로 떠났다. 그는 미국 내 친이스라엘 단체들의 협조로 뉴저지 뉴어크 국제공항에서 개인 제트기를 타고 이스라엘에 도착했다. 당시 벤구리온 공항까지 마중 나온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30년의 옥살이와 5년의 보호관찰을 마치고 귀국한 그를 영웅으로 환영했다.
폴라드는 미국 역사상 우방국에 기밀을 제공하다 검거되어 간첩죄로 종신형을 받은 최초의 미국인이다. 현재 한국의 간첩 법제는 적국과 적을 위해 간첩 활동을 해야만 처벌된다. 이제 우리도 국가안보와 국익 보호를 위해 적국이나 우방국을 가리지 않고 외국이나 외국인 단체 및 비국가행위자(Non-state actors)를 위해 간첩 활동을 했을 때에도 처벌할 수 있도록 간첩 법제를 시급히 개정해야 한다.
유동열 2024-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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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의 스파이 세계]<32>
소련 스파이였던 美 TIME 편집인 ‘휘태커 챔버스’
1948년 8월3일 미 하원의 반미활동위원회(HUAC)에서 앨저 히스(Alger Hiss·1904)가 공산주의 스파이 조직인 ‘웨어 그룹’의 조직원으로 소련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는 증언이 나오자 미국 사회가 충격에 빠졌다. 히스는 유엔 창립을 주도했고 초대 사무총장을 지낸 미 국무부 고위급 인사로 대외 정책 분야의 최고봉이었기 때문이다. 히스는 강력 부인했지만 결국 유죄가 인정되었다.
이러한 폭탄 증언을 한 인물이 당시 미 시사주간지 타임(TIME)의 편집인 휘태커 챔버스(Whittaker Chambers)였다.
챔버스는 1901년 필라델피아에서 출생했다. 1904년 가족이 뉴욕으로 이주하여 롱아일랜드에서 자랐다. 그는 본명이 제이 비비안 챔버스(Jay Vivian Chambers)였으나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1920년대에 어머니의 이름을 써서 개명했다.
그는 미국의 명문 대학인 컬럼비아 대학에 다녔고 대학의 문예기관지인 ‘The Morningside’를 편집하기도 했다. 1925년에 대학을 중퇴했는데 이 무렵 미국 노동자당(공산당의 위장 명칭)에 가입했고 공산주의 계열의 신문인 ‘The Daily Worker’에서 기사를 썼으며 이후 공산주의 계열의 잡지인 ‘The New Masses’의 편집자가 되었다.
챔버스는 1932년 소련의 지하 조직(웨어 그룹)에 가입하여 뉴욕에서 활동했다. 1933년 비밀리에 모스크바로 가서 스파이 훈련을 이수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이후 미 연방정부와 그 주변에서 암약하고 있는 소련 스파이들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은 후 볼티모어로 이사했다. 당시 챔버스는 ‘Karl(Carl)’이란 코드명으로 GRU(소련군 정보국) 소속 스파이 활동을 했다.
그는 미 연방정부에서 암약하고 있는 소련 스파이들이 보내 주는 기밀 정보를 받아 정리해 상부선인 GRU 요원에게 전달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당연히 미 연방정부에 침투한 스파이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 앨저 히스와 그의 동생 도널드 히스(국무부 근무)·빅터 폴로(전쟁생산위)·찰스 클레이머(노동부)·해럴드 글래서(재무부) 및 1946년 국제통화기금(IMF) 미국 국장으로 임명된 해리 덱스터 화이트와 같은 고위 재무부 관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챔버스는 1930년대 소련의 스탈린 대숙청을 목격하고 공산주의에 대한 회의를 느껴 1938년 4월 스파이 조직에서 탈퇴했다. 1939년 8월 독소(독일·소련)불가침조약이 발표되자 소련에서 망명해 온 KGB(소련 국가보안위원회) 요원 발터 크리비츠키(본명 슈메카 진스베르그) 등과 함께 미 연방정부 도처에서 소련 공산주의 신봉자들이 암약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챔버스는 당시 그들이 누군지에 대해서는 제보하지 않았다. FBI(연방수사국)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미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지만 무시당했다. 그러나 FBI에선 이들을 계속 추적했다. 1939년 4월 챔버스는 시사주간지 타임(TIME)에 입사하여 다양한 글쓰기 및 편집 직책을 맡았다. 그는 스탈린에 대한 표지 기사(1945년 2월)에서 루스벨트정부의 공산주의 정책을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48년 8월3일 챔버스는 미 하원의 반미활동위원회에 소환되어 간첩 혐의를 받고 있는 인사들에 대한 증인으로 출두했다. 이때 챔버스는 앨저 히스(당시 44세·카네기재단 이사장)를 미 연방정부 공무원 신분으로 소련 스파이 조직에 가담했던 7명 중 한 명으로 지목했다. 히스는 분노하며 이를 정면 부인했다. 미 언론들은 연일 대서특필하며 충격에 빠졌다. 누구의 말이 진실인가. 결국 챔버스는 타임에서 퇴사했다.
1948년 9월 히스는 챔버스가 자신을 함정에 빠뜨렸다고 주장하며 그를 상대로 7만5000달러의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 전 히스의 변호인들은 챔버스에게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요청했다. 그러자 챔버스는 이른바 히든카드였던 ‘볼티모어 문서’를 증거로 제출했다.
이 문서는 약 60쪽 분량(35mm 마이크로필름)인데, 타자로 친 문서와 미국 재무부 고위관리 해리 덱스터 화이트가 직접 쓴 여러 개의 필기 노트로 구성되어 있었다. 챔버스는 10년 전 소련 지하 조직에서 이탈할 당시 미리 준비한 ‘구명 조끼’ 안에 서류를 넣어 반출해서 속이 빈 호박 안에 넣어 메릴랜드 농장에 보관했다. 이런 연유로 ‘볼티모어 문서’는 일명 ‘호박 문서(Pumpkin Papers)’라고도 불린다. 이 문서는 미 법무부에도 제출됐다.

후에 제37대 미 대통령이 되는 리처드 M. 닉슨은 당시 미 하원 반미활동위원회 위원으로 챔버스의 증거를 내세워 강력 대응했고 결국 히스는 기소되었다. 대법원은 히스 본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징역 5년형의 유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간첩죄는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적용하지 못했다. 이 사건 후 챔버스는 ‘National Review’의 편집자로 잠깐 일한 것을 제외하고는 대외 활동을 자제했다.
1952년 챔버스는 ‘증언(Witness)’이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발표했고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공산주의자는 결국 화합될 수 없는 반대 개념, 즉 신과 인간·영혼과 정신·자유와 공산주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무너진다”며 “(나는) 공산주의하에서 사는 것보다 필요하다면 죽어도 좋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회고했다. 그는 1961년 7월9일 메릴랜드주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농장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60세였다. 1984년 3월26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챔버스에게 자유의 수호자로 ‘대통령 자유 훈장’을 추서했다. 챔버스의 자서전은 오늘날까지도 미국 보수주의의 교과서라고 평가받고 있다.
유동열 2024-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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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의 스파이 세계]<33>
죽을 때까지 반역 활동 부정한 소련 간첩 ‘앨저 히스’
1945년 8월 미국 워싱턴 D.C.에서 ‘실버마스터(Silvermaster)’라고 불리는 KGB 스파이 조직을 관리하던 엘리자베스 벤틀리(Elizabeth Bentley·당시 37세)란 여성이 미 연방수사국(FBI)을 찾아왔다. 당시에는 상담에 그쳤다.
그해 11월7일 다시 FBI를 찾아온 벤틀리는 여러 차례 면담을 통해 미 연방정부 등에서 암약하고 있는 소련 스파이 100여 명의 명단을 제공했다. 여기에 루스벨트 행정부에서 유엔 창설회의를 준비하고 있던 앨저 히스(Alger Hiss·1904년생·초대 유엔 사무총장)가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1945년 9월 캐나다 주재 소련 대사관의 서기 직책으로 위장한 소련군 정보국(GRU) 요원 이고르 구젠코(Igor Guzenko·1919년생)가 캐나다 및 미국에서 암약하는 스파이 명단 등을 가지고 캐나다 당국에 망명 신청을 했다. 이 명단에도 앨저 히스가 들어 있었다. 앨저 히스는 당연히 FBI의 추적 대상이었는데,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히스는 국무부에서 퇴직해야 했다.
앨저 히스의 간첩 혐의가 공개적으로 제기된 것은 1948년 8월3일 미 하원의 반미활동위원회(HUAC)에서 미 시사주간지 타임의 편집인인 휘태커 챔버스(Whittaker Chambers·1901년생) 증언에서다. 본지 ‘스파이 세계’ 32회(2024.8.27.)에서 언급되었듯이 챔버스는 앨저 히스가 공산주의 스파이 조직인 ‘웨어그룹’의 조직원으로 소련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후 대법원에서 앨저 히스는 유죄를 선고받고 수감됐다.

엘저 히스는 1904년 미국 메릴랜드 주(州) 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 그는 존스홉킨스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했다. 재학 중 ‘하버드 로 리뷰(Harvard Law Review)’의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1929년 졸업을 앞두고 지도 교수의 추천으로 올리버 홈스(Oliver W. Holmes) 대법관의 법률 비서로 채용되는 영광을 누렸다. 이 무렵은 히스는 아이가 딸린 연상의 이혼녀 프레실리아 홉슨(Prescillia Hobson)과 사랑에 빠져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하게 된다.
히스가 공산주의 사상에 빠진 것은 미 공산당원이었던 아내 프레실리아의 영향이 컸다. 당시 대공항의 여파로 실업과 가난에 허덕이며 방황하는 노동자들을 목격하면서 아내는 그에게 실업과 빈부격차 같은 사회문제에 눈을 돌리도록 했다. 결국 히스는 노동자와 농민 문제를 다루는 변호사 단체인 국제법률가협회(IJA)에 가입했고, 여기서 미 공산당 당원이었던 하버드 동문 리 프레스먼(Lee Pressman)을 만나 어울리며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히스는 1933년 법무부에서 근무하다 상원의 나이(Nye) 위원회에서 조사관으로 활동했다. 당시 히스는 농무부 자문관인 해롤드 웨어(Harold Ware)가 이끄는 토론 그룹에 참여했다. 1934년경 웨어의 토론 그룹은 소련의 스파이망(일명 웨어그룹)으로 전환됐다. 이때부터 히스는 소련 간첩이 되었다. 하버드대 동문 리 프레스먼·해롤드 웨어·아내 프레실리아에 이끌려 소련의 간첩이 된 히스는 1934년에 간첩으로 활동하던 휘태커 챔버스를 만나게 된다.
히스는 1936년에는 그의 남동생 도널드 히스(Donald Hiss)와 함께 국무부에서 일했다. 여기서 히스는 그가 접한 미국의 외교안보 기밀문서를 통째로 소련으로 유출했다. 히스는 국무부 차관보 보좌관과 극동아시아 국장 특별 보좌관 등을 역임했다. 그는 1944년 전후 국제기구인 유엔의 창설을 추진하고 실무 책임을 맡았다.
1945년 2월에는 미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얄타 회담에 참석했다. 히스는 실제로 얄타 회담을 준비한 핵심 인물이었다. 당시 워싱턴 주재 영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도널드 매클린(Donald Maclean)도 소련의 간첩이었다. 당연히 소련의 스탈린은 미국과 영국의 회담 전략을 파악하고 회의에 임했던 것이다. 히스는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유엔 창설의 모태가 되는 국제기구의 임시 사무총장직을 맡기도 했다. 1946년 후반 FBI의 조사가 본격화되자 히스는 국무부를 떠나 카네기재단의 이사장이 되었다. 히스는 무려 10년간 국무부에 근무하면서 각종 기밀을 빼돌렸던 것이다.

1948년 8월3일 미 하원의 반미활동위원회(HUAC)에서 챔버스가 히스를 소련 간첩으로 지목하자 히스는 챔버스를 전혀 알지 못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챔버스를 상대로 7만5000달러의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이는 히스 인생에서 최대의 실수였다. 소송을 제기하지 않았으면 히스의 소련 간첩 혐의를 입증할 결정적 증거가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챔버스는 히스의 간첩행위를 입증할 결정적 자료, 이른바 ‘볼티모어 문서’를 제출했다. 여기에는 히스의 자필 메모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히스가 강력히 부인했음에도 미 대법원은 히스에게 위증 혐의로 징역 5년형의 유죄를 선고했다. 간첩죄는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적용하지 못했다.
히스는 1951년 3월 펜실베이니아 주 소재 연방교도소에서 수형 생활을 하다 1954년 11월 모범수로 석방되었다. 출옥 후에도 히스는 자신의 명예를 되찾겠다며 강연과 저작 활동을 통해 각종 쇼를 연출하여 상당한 지지 세력을 확보했다. 히스는 스스로를 변호하는 ‘여론의 법정에서’(In the Court of Public Opinion, 1957)란 책을 발간하고, 지지 그룹들에선 ‘앨저 히스의 이상한 사건’ ‘끝나지 않은 앨저 히스의 스토리’ 등의 책을 발간하며 히스를 냉전의 희생양으로 옹호하기도 했다. 히스는 자신에 대한 위증죄 판결을 뒤집기 위해 재심을 신청했으나 1982년 연방대법원은 히스의 상고를 기각했다.
1991년 12월 소련이 붕괴됐고 소련 공산당은 해체되었다. 1995년 미국 정부가 이른바 소련의 암호통신을 해독했던 베노나 프로젝트(Venona Project) 문서를 공개하면서 암호명 알레스(Ales)의 실체가 여기저기서 밝혀졌다. 1985년 영국으로 망명한 KGB 요원 올레그 고르디에프스키(Oleg Gordievsky)는 히스의 암호명이 알레스였다고 진술한 바 있었다.
히스는 1996년 11월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소련 간첩이 아니었다고 주장한 그의 위선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악랄함과 반문명성을 재확인할 수 있다.
유동열 2024-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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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의 스파이 세계]<34>
‘세계를 구한 스파이’ 소련 대령 올레그 펜코프스키
1962년 10월22일 저녁 7시 미국 전역에 생방송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특별 연설에 미국 국민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쿠바에서 발사된 핵미사일이 미국을 향한다면 우리는 이를 미국에 대한 소련의 공격으로 간주하고 소련에 완전한 보복 대응을 가할 것입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을 향해 제3차 세계대전 특히 핵전쟁 가능성을 직접 경고한 것이다.
1962년 10월14일 미국 U2 정찰기가 쿠바에 소련의 SS-4 중거리 탄도미사일(MRBM) 기지가 건설되는 것을 포착하면서 미국과 소련 양국이 1962년 10월28일까지 군사적으로 대치한 사건이 있는데, 역사는 이를 ‘쿠바 미사일 위기’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기지를 건설한다는 사실을 미국이 안 것은 소련군 정보국(GRU)의 한 고위 간부의 제보에 따른 것이었다.
그가 바로 ‘세계를 구한 스파이’라고 평가받는 올레그 블라디미로비치 펜코프스키(Oleg Vladimirovich Penkovsky) 대령이다. 펜코프스키는 1919년 4월23일 오르조니키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러시아 내전 당시 볼셰비키(적군)에 맞서 싸운 차르 군대의 장교였다.
그는 1937년 소련 적군(赤軍)에 입대하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포병 장교로 복무했다. 전쟁에서 큰 부상을 입기도 했다. 1945년에 당시 실력자였던 소련 장군의 딸과 결혼했다. 1945~48년에 프룬제 군사아카데미를 졸업하고 1949년 GRU 장교로 선발되었다.

1955년 터키 앙카라로 파견되어 소련 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며 터키 내 미군 기지를 감시하는 등 탁월한 정보 역량을 발휘했다. 1958년 제르진스키 군사아카데미에 소환되어 로켓과 미사일 무기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1960년에는 GRU 대령으로 승진했다.
그 후 인도에 파견될 예정이었으나 정밀 신원조회 과정에서 러시아혁명 당시 백군(白軍)에서 활동했던 아버지의 과거 경력이 드러나 취소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조국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이 의심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좌절했다. 그리고 방황하다가 결국 서방세계 스파이로 자원하게 된다.
1960년 8월12일 저녁 모스크바 소재 볼쇼이 모스크보 레츠키 다리에서 관광 중이던 두 명의 젊은 미국인들에게 한 소련인이 다가가 갑자기 편지 봉투를 찔러 주며 미 중앙정보국(CIA)에 전해 달라고 말한 후 급히 사라졌다. 고심 끝에 이들은 소련 주재 미국 대사관에 편지 봉투를 전달했다. 이를 계기로 CIA는 펜코프스키에게 접근하게 되었고 그는 스파이 활동을 하게 된다. CIA는 그가 제공하는 정보의 수준과 질이 엄청난 고급 정보임을 파악하고 소련 내에서 자신들보다 우월한 첩보망을 구축하고 있던 영국 비밀정보부(MI6)와 정보를 공유하며 합동작전을 전개했다.
그는 CIA에서는 ‘Hero’(영웅), MI6에서는 ‘Yoga’(요가)라는 코드명으로 활동했다. CIA와 MI6는 펜코프스키가 현지 요원들과 직접 접촉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소련 등 공산권을 상대로 무역사업을 하는 영국인 그레빌 N. 와인에게 협조를 요청해 소련 체류 때 접촉하게 했다. 또한 소련 주재 영국대사관에 외교관 신분으로 위장 근무하는 MI6 요원의 아내(재닛 치좀)에게 간곡히 접선을 부탁했다. 이 여성은 매주 한 차례씩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공원에 산책 나갔고, 그때마다 펜코프스키가 애들에게 귀엽다며 사탕봉지를 건넸다. 그 안에는 사탕뿐만 아니라 소련 군사기밀이 담긴 마이크로필름이 들어 있었다. 이런 식으로 안정적으로 정보가 넘어갔다.
1961년 4월부터 1962년 8월까지 불과 2년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펜코프스키가 미국과 영국 정보부에 넘긴 군사기밀의 양은 5000여 건에 달한다. 여기에는 소련의 장거리 미사일 능력이 과도하게 부풀려져 있다는 정보에서부터 소련군의 미사일 포대 현황·최신 미사일 제원(諸元·성능과 특성을 나타낸 수적 지표)·핵연료 생산 및 보관소 위치·전 세계에서 활동 중인 GRU와 KGB 요원 300여 명의 신원 사항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과 영국 입장에서는 금송아지가 통째로 굴러온 격이었다.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이전에 펜코프스키는 SS-4 중거리 탄도미사일 특유의 발사대 모양과 배치 형태 등이 담긴 자료를 GRU 도서관에서 마이크로필름으로 전달하여 소련이 쿠바에 미국을 겨냥한 미사일 기지를 건설한다는 사실을 제보했다.

KGB는 미 국가안보국(NSA)에서 암약 중인 던럽이라는 스파이로부터 기밀정보를 넘겨받고 있었는데 거기에 소련의 군사기밀이 들어 있음을 알고 경악했다. KGB는 자국의 군사기밀이 내부자에 의해 미국 등 서방에 유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추적에 나섰다. 군사기밀 접근자 1000여 명을 대상으로 은밀히 조사하며 소련에서 활동하는 CIA와 MI6의 백색요원과 흑색요원을 감시하던 중 펜코프스키가 영국 대사관에 근무하는 외교관의 부인과 접선하는 장면을 포착하고 집중 추적했다.
1962년 10월22일 펜코프스키는 귀가 직후 KGB 요원들에게 자택에서 체포됐다. 그는 신문 과정에서 자신의 혐의를 모두 인정했다. 결국 대법원에서 국가반역죄·간첩죄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1963년 5월16일 44세의 나이로 악명 높은 KGB 본부의 루비양카 감옥에서 처형됐다. GRU의 수장인 이반 세로프는 이 사건으로 해고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펜코프스키는 1976년 “CIA 역사상 가장 귀중한 요원”이라고 CIA 기관문서에 등재되었다. 그는 냉전 시기 서방세계에서는 ‘세계를 구한 스파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소련에서는 ‘조국에 비수를 꽂은 최악의 배신자’로 기록되고 있다. 2020년에 그를 소재로 한 ‘더 스파이’란 영화가 제작되어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유동열 2024-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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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의 스파이 세계]<35>
중국 간첩 활동한 CIA 요원 ‘알렉산더 마’형제
2024년 9월11일 미 호놀룰루 연방지방법원은 전직 중앙정보국(CIA) 요원이자 연방수사국(FBI) 계약직 번역 요원으로 근무했던 ‘알렉산더 육칭 마’(Alexander Yuk Ching Ma·馬玉清·71세)를 중국 정부를 위해 간첩 활동을 한 혐의로 징역 10년 형을 선고했다. 알렉산더 마는 누구인가.
마는 1952년 홍콩에서 출생해 상하이에서 살았다. 1968년 미국 하와이로 이주하여 하와이대학교를 졸업했다. CIA는 극동지역 여러 곳에 중국을 겨냥하여 암호 통신을 해독하는 기지(COVCOM)를 운영해 왔는데, 중국어 등 극동지역 현지어에 능통한 요원을 선발해 작전에 배치했다.
마는 1982년 30세 나이에 CIA 프로그램에 지원하여 ‘The Farm’이라 불리는 버지니아주 윌리엄스버그 소재 CIA 비밀 교육훈련시설에서 훈련을 받은 후 극동으로 파견되었다. 이때 그는 광범위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으며 1989년까지 CIA에서 근무했다.
마는 최고 비밀인가를 유지했으며 CIA에서 재직하는 동안 미국 정부 비밀을 보호할 책임과 지속적인 의무를 인정하는 수많은 비공개 계약에 서명한 바 있다. 그는 1989년에 CIA를 떠나 1995년경부터 상하이에서 살았다. 마의 형인 데이비드 마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 극동에 배치된 CIA 비밀요원이었다. 1983년 데이비드는 자신의 직위를 부적절하게 이용해 중국 국민이 미국에 입국하도록 도운 사실이 밝혀진 후 CIA에서 사임했다.

연방검찰의 공소장에 의하면 마의 간첩 행위는 2001년 3월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의 형 데이비드와 함께 상하이 소재 호텔에서 중국 국가안전부 상하이지부(SSSB) 요원을 만나 비밀 군사정보를 전달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현금 5만 달러를 받았다.
이들 형제가 전달한 정보에는 현지 CIA 요원들의 위장 명칭·중국에서의 활동상·CIA 통신 및 보고서에 사용된 암호화 정보·CIA 요원의 현지 협조망·CIA의 보안 통신 관행 등 극비 정보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마와 그의 형 데이비드는 중국 국가안전부(MSS)에 계속해서 정보를 제공했다.
중국 국가안전부가 마에게 FBI에 침투하라는 지령을 내리자 그는 2002년 12월 FBI 특수요원 정규직에 지원했다. 그러나 나이 제한(49세)을 넘었다는 통보를 받아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자 마는 2003년 FBI 호놀룰루 지부에 계약직 번역 요원으로 지원했다. 중국어 방언이 다양했기 때문에 중국어 번역이 필요한 것을 감지하고 지원한 것이다. 정보기관의 번역 요원직은 광범위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스파이에게는 일종의 황금어장인 셈이었다.
당시 FBI는 마의 간첩 행위를 추적 중이었는데 그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를 고용했다. 마는 2004년 8월부터 2012년 10월까지 6년간 FBI 호놀룰루 지부의 외부 사무실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했다. 이 기간 동안 접한 핵심기밀들을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거나 플래시 드라이브로 다운로드하거나, CD에 복사해 중국 요원에 직접 전달했다. 마가 상부선에게 연락을 하면 중국 요원들은 상하이 소재 고급 호텔을 예약하고 공항에서 그를 픽업했다. 중국 국가안전부가 마에게 지불하는 돈은 홍콩의 은행 계좌에 정기적으로 입금되었다.
하와이 세관 신고서에 따르면 마는 중국에서 수천 달러 상당의 현금과 새로운 골프채 세트 등 값비싼 선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조국을 배신한 대가로 받은 돈으로 하와이 카이드라이브에 있는 60만 달러짜리 콘도미니엄으로 이사하는 등 호화 생활을 즐겼다. 때로는 기밀정보 전달을 위해 자신의 아내(에이미 마)를 상하이로 보내 암호화된 노트북 컴퓨터를 전달하기도 했다. 수년에 걸쳐 몇 달에 한 번씩 그와 그의 아내는 상하이를 오가며 기밀을 전달했다.

2019년 마는 중국 국가안전부 요원으로 FBI에 침투한 중국 요원이라며 자신에게 접근해 온 FBI 잠복 요원에게 자신의 이전 간첩 활동을 자랑스럽게 말하며 계속 중국 국가안전부를 위해 일하겠다면서 “조국(중국)이 성공하기를 바란다”고 말하기도 했다. 함정수사에 걸려든 것이다. 마가 FBI 잠복 요원을 믿은 것은 2001년 상하이에서 중국 스파이를 자원했을 때 접촉한 영상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었다. FBI 잠복 요원은 마에게 “작은 감사의 표시”로 현금 2000달러를 제공했다. 결국 마는 2020년 8월14일 FBI에 체포됐다.
마는 4년간의 재판 끝에 종신형을 피하고자 자신의 간첩 활동을 인정했고, 2024년 9월11일 미 연방 호놀룰루 지방법원은 그에게 징역 10년형을 선고했다. 마는 연방교도소에서 10년을 복역한 후 5년 동안 보호관찰을 받아야 한다. 전직 CIA 요원으로 같이 간첩 활동을 했던 그의 형 데이비드 마는 고령(85세)에다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어서 사법 처리되지 않았다.
2020년 8월17일 FBI는 웹사이트에 마의 체포와 연관된 중요한 메시지를 게재했다. “중국 정부의 방첩 및 경제적 스파이 활동은 미국의 경제적 안녕과 민주주의적 가치에 중대한 위협이다. 이 위협에 맞서는 것이 FBI의 최우선 순위다.중국에서 미국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수행하는 용감한 중국 현지 요원들의 생명에 대한 위협이 제일 걱정된다.” 미국 내 중국의 스파이 활동에 대한 우려이자 경고였다.
유동열 2024-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