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경재

[스파이 세계]<26>~<30>

서석천 2025. 3. 12. 04:27

천의 얼굴을 가진 독일 간첩 듀케인
▲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 원장 
1941년 6월28일 미 연방수사국(FBI)은 미국에서 암약해 오던 33명의 독일 스파이를 체포했다. 이들은 뉴욕 맨해튼 이스트 85번가에 위치한 ‘리틀 카지노’라는 레스토랑 한구석에 자주 모여 미국을 전복시키기 위한 자신들의 스파이 활동에 대해 의기투합하며 전열을 가다듬고 회포를 풀었다. 이 조직의 수장은 천의 얼굴을 가졌다고 평가되는 듀케인(Frederick ‘Fritz’ Joubert Duquesne)이었다. 
 
그가 이끄는 듀케인 스파이 링의 구성원들은 미국에 성공적으로 잠입한 히틀러 지지자 33명(여성 3명 포함)이었다. 1942년 1월2일 미국 법원은 이들 33명 전원에게 유죄를 선고했으며 이들이 받은 형량은 총 300년이 넘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스파이 사건이었다.
 
▲ 듀케인 스파이 링 멤버들이 출입했던 뉴욕 맨하튼 85번가의 리틀카지노 / 필자 제공
  
듀케인은 1877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동런던 케이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 위그노 교도로 남아프리카에 정착해서 농장 운영과 사냥을 하면서 살아갔다. 듀케인은 17살 때 학교을 다니기 위해 런던으로 갔다. 영국 옥스포드대학과 벨기에 브뤼셀의 왕립군사학교를 다녔다고 하나 학적은 확인되고 있지 않다.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영국군에 입대했다. 그러나 영국군의 남아공 초토화 정책으로 아버지의 농장이 파괴되고 그 과정에서 여동생이 죽고 어머니가 영국수용소에 끌려가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영국에 복수할 것을 결심한다.
 
1899년 이른바 제2차 보어전쟁(영국과 남아프리카 정착 보어족과의 전쟁)이 발발하자 듀케인은 고국으로 돌아와 보어족 특공대에 합류했다. 그는 영국군과의 전투 중 부상도 입었고 포로가 되었지만 탈출했다. 또한 모잠비크전투에서 포르투갈 군에게 포로가 되어 리스본 소재 수용소에 수감되었지만 탈출하여 프랑스 파리를 경유해 영국으로 갔다. 여기서 영국군에 입대해 1901년 영국군 장교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배치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영국군 전략시설을 파괴하고 영국군 사령관 키치너 경을 암살하려다 체포되었다. 듀케인은 당시 ‘블랙팬서(Black Panther)’라는 코드명을 사용했다. 그는 사형당할 처지가 되었으나 보어군의 암호집을 제공하여 종신형을 받고 케이프타운의 수용시설에 투옥되었다가 버뮤다로 이송되었다.
 
듀케인은 버뮤다에서 극적인 탈출에 성공한 뒤 뉴욕에 도착해 뉴욕 헤럴드의 기자로 일했다. 그는 뉴욕에 있는 동안 여행 전문 특파원·전문 수렵꾼·소설가 등으로도 활동했다.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여순항으로 파견되었고 리프 반란을 취재하기 위해 모로코에 파견되어 종군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듀케인은 1910년 시어도어 루스벨트(미국 제 26대 대통령·1901~1909)의 개인 수렵사격 강사가 되어 루스벨트의 아프리카 사냥 등을 수행했고 관련 기사를 써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1913년 12월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미국인들에게 애국심을 호소하는 강연자로도 활동했다.
 
▲ 체포 당시 듀케인의 모습
1914년경 듀케인은 독일계 미국인 사업가에게 포섭되어 독일 스파이가 되었다. 그는 남미에 있는 영국 상선 테니슨함과 순양함 햄프셔에 폭탄을 장착해 침몰시켰다. 그러나 엉뚱하게 1917년 뉴욕에서 보험 청구사기로 연방요원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영국은 공해에서의 살인(키치너 장군)·방화·해군성 문서 위조 및 왕실에 대한 음모 등의 혐의로 듀케인을 영국으로 이송할 것을 요구했고 이송이 결정된 상태였다. 그러나 듀케인이 오른쪽 다리가 마비된 것처럼 위장해 이송은 잠정 중단되었다. 2년간 다리 마비로 절름발이 행세를 하다가 1919년 여성으로 변장해 교도소 탈출에 성공한다.
 
1920년 듀케인은 돌연 보스턴에 나타나 은퇴한 영국 소령 프레드릭 크레이븐·베자 대령·피트 니아쿠드 등 위장 이름을 사용하며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와 영화 제작사 에이전트로 일했다. 또한 이 기간 동안 클레멩트 우드와 함께 ‘키치너를 죽인 사람(The Man who Killed Kitchener)’이란 소설을 썼고 영화 제작사에 판권을 매각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그는 ‘DUNN’ 이라는 코드명으로 작전을 수행했으며, FBI 파일에서는 ‘The Duke’로 호칭된다. 1932년에도 공해상 살인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공소시효 만료로 재판 중에 석방되기도 했다.
 
듀케인은 신출귀몰한 변장의 달인이었다. 러시아 백작·뉴욕 출판인·안경을 쓴 영국 신사·사자 가죽으로 만든 담배 주머니를 든 오스트리아 전쟁 영웅 등으로 위장했던 그가 체포된 것은 강압에 의해 독일 스파이로 포섭되었던 윌리엄 세볼드(William Sebold)의 제보 때문이었다. 히틀러 총통 집권 시 독일의 해외정보국 ‘압베르(Abwehr)’는 1939년 2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독일을 방문한 독일계 미국인 세볼드를 긴급 체포하여 조국 독일에 협력할 것을 협박했다. 결국 독일 스파이로 포섭되었는데 스파이 교육 중 여권 재발급을 빌미로 독일 쾰른에 있는 미국 영사관을 방문했을 때 자신이 스파이로 포섭된 사실을 자백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결국 FBI에 통보되었고 그는 독일 압베르와 FBI의 이중스파이가 되었다.
 
▲ 듀케인의 스파이 33명
 
1940년 2월 압베르는 세볼드를 해리 소이어라는 인물로 둔갑시켜 뉴욕으로 침투시켰다. 세볼드의 임무는 미국에서 암약 중인 스파이들이 압수한 정보를 독일로 송신하는 무선통신의 책임자 역할이었다. 수집된 정보를 암호화해 단파 라디오로 전파하는 방식이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독일 스파이 명단을 손에 쥔 FBI는 독일 스파이 아지트 주변에 안가를 구축하고 감청과 미행을 무려 2년간 지속해 결정적 증거들을 확보했다. 그렇게 해서 1941년 6월28일 이른바 ‘듀케인의 스파이 링’ 연루자 33명을 체포하는 개가를 올렸다. 1942년 1월2일 독일 스파이 33명은 전원 유죄판결을 받고 총 합계 300년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FBI의 후버 국장은 이 일을 가리켜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파이 검거라고 자평했다.
 
듀케인은 징역 18년을 선고받고 캔자스주 레븐워스 연방 교도소에서 복역했으며 13년 복역 후 건강 악화로 1954년 석방되었다. 그는 1956년 5월24일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역대 미국 당국이 검거한 스파이 중 최고 반열의 스파이가 사라진 것이다.
유동열  2024-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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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의 스파이 세계]<27>
KGB 67년치 비밀공작 폭로한 ‘미트로킨 아카이브’
 
 
1992년 3월24일 나이 지긋한 한 신사가 유럽 북동부 발트해에 위치한 라트비아공화국의 수도 리가(Ryga) 주재 영국 대사관에 들어가 ‘권위 있는 사람’과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대사관 직원의 안내를 받고 젊은 여성요원을 만난 그는 본인의 신분을 밝히고 핵심 기밀 일부를 제시하며 망명의 뜻을 밝혔다. 그의 주장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한 요원은 즉각 본국에 보고했다. 망명을 받아들이겠다고 하자 그는 4월9일 자료를 가지고 대사관을 다시 방문해 본국에서 급파된 영국 비밀정보부(SIS·일명 MI6) 조사팀과 만났다.
 
그는 KGB 파일에서 발췌한 것으로 보이는 2000쪽 분량의 정보가 들어 있는 봉투 10개를 건네주었다. 영국·미국 등 전 세계에서 암약하는 수백 명의 KGB 요원 명단(암호명)과 기밀 연락처가 나열되어 있었는데, 대부분의 경우 신원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상세했다. 세계 스파이사(史)를 뒤흔들 만큼 경천동지(驚天動地)할 기밀자료들이었다.
 
이 노신사가 바로 1917년부터 1984년까지 소련 정보기관 KGB(국가보안위원회)의 비밀공작을 낱낱이 정리·분석한 ‘미트로킨 아카이브’(The Mitrokhin Archive·2000)의 주인공이다. 그는 앞서 미국 대사관에도 망명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한 상태에서 크게 낙심하다 영국 대사관을 찾은 것이었다. 미국은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초대형 보물’을 내팽개쳤고, 영국은 그 보물의 진가를 신뢰하고 망명을 받아들여 엄청난 횡재를 한 격이었다. 후에 미국은 영국 정부에 사정사정하고 상당한 반대급부까지 제공한 끝에 겨우 이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다. 순간의 잘못된 판단이 스파이 역사의 흐름을 주도할 기회를 날려 버린 사례다.
 
▲ 바실리 미트로킨은 KGB 기록보관소 자료 내용을 머리에 기억했다가 퇴근 후 자필로 기록해 보관했다. 필자 제공
  
바실리 미트로킨(Vasily Nikitich Mitrokhin)은 1922년 러시아 랴잔주의 유라소보에서 태어났다. 1941년 카자흐스탄 SSR지역 대학에 입학하여 역사와 법학을 전공했다. 모스크바의 고등외교아카데미에서 3년간 교육을 마치고 1948년 소련 정보기관인 MGB(KGB의 전신)의 해외정보 장교로 임명받았다. 1956년 해외 근무 중 작전 실패로 본부에 소환되어 KGB 제1국장실 소속 기록보관소 내근직으로 발령받았다. 기록보관소에는 KGB가 침투시킨 전 세계 소련 스파이 네트워크와 이들이 수집한 비밀정보 자료, 암살·테러·전복 등 비밀공작 자료, 평가 자료 등 수십만 개에 달하는 파일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는 이때부터 각종 기밀자료를 제한적으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1972년 6월 KGB가 새 청사로 이전하자 미트로킨은 기록보관소의 자료를 무려 12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새 청사로 옮기는 작업을 담당하게 된다. 기록보관소에 소장된 30만 개 이상의 파일을 확인하고 봉인하여 옮기는 작업이다. 미트로킨은 이 파일들을 검토한 후 재분류하고 배치해서 밀봉 컨테이너에 담아 이송했다.
 
소련 정권의 잔혹상과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환멸을 느낀 미트로킨은 언젠가 기밀자료를 활용할 때가 있을 것이라 믿고, 자신이 접한 자료를 머리에 담아 퇴근 후 자필로 기록해 보관했다. 주말이면 그는 다차(dacha·주말농장)로 가서 가능한 한 많은 양을 타이핑했다. 그리고 이 자료들을 알루미늄 케이스에 담아 다차 곳곳에 묻어 두었다. 이 분량만 해도 2만5000쪽에 이르렀다. 이 자료들은 후에 ‘미트로킨 보고서’의 토대가 되었다.
 
1984년 KGB 은퇴 후 미트로킨은 자신의 자료를 공개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고 믿었으나 영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1991년 소련이 붕괴되자 기회가 찾아왔다. 1992년 그는 라트비아에서 휴가를 보낼 수 있는 허가를 받았고 이때 기밀 샘플을 가지고 몰래 영국 대사관을 찾았던 것이다. 
 
이후 영국 MI6 특수요원 6명이 모스크바에 잠입해 미트로킨의 주말농장 땅속 등 여러 곳에 분산 보관해 둔 6개의 우유통 트렁크를 발굴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1992년 9월7일 마침내 미트로킨과 그의 가족 및 자료가 영국에 무사히 도착했다.
 
영국 정보당국은 2만5000쪽에 달하는 방대한 자료를 분석하면서 경악했다. 당시 멜리타 노우드라는 87세 영국 할머니가 20대에 KGB에 포섭돼 40여 년간 영국의 원자폭탄 관련 기밀을 소련에 넘겨 온 스파이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에서 활동한 KGB 요원과 협조망 1000여 명의 명단도 새로 공개되었다. 여기에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 부통령을 지낸 헨리 윌리스도 있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소련이 생산한 무기의 절반 이상이 미국에서 빼낸 설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의 전화가 실시간 도청됐으며 거의 모든 미국 방산 계약 시설에 스파이가 배치됐다. 또 냉전 기간 동안 프랑스의 고위 정치인  35명이 KGB에서 일했다고 적혀 있다. 서독에서는 KGB가 주요 정당·사법부·경찰에 침투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 각국에서는 이에 기반하여 스파이 소탕 작전이 전개되었다.
 
1995년 MI6은 소련의 반문명적 비밀공작을 알리기 위해 미트로킨의 기록 일부를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영국 보안부(MI5)의 공식 역사가이자 케임브리지대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앤드류(Christopher Andrew)가 미트로킨과 공동으로 책을 저술하기 시작해 1999년 ‘미트로킨 아카이브’를 발간했다. 미트로킨의 망명은 1999년까지 비밀로 유지되었다. 2000년 영국 의회의 정보·보안위원회(ISC)는 2000년 ‘미트로킨 조사보고서’를 공식 채택하고 공개했다.
 
▲ 미트로킨은 케임브리지 대학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앤드류(Christopher Andrew)와 공동으로 ‘미트로킨 아카이브(The Mitrokhin Archive)’를 저술했다. 필자 제공
  
2004년 1월23일 미트로킨은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가 사망한 직후인 2005년에 ‘미트로킨 아카이브’ 제2권이 발간되었다. 미트로킨 보고서의 원본을 보관하고 있던 영국의 처칠기록보관소는 2014년 미트로킨의 자필 노트 사본을 공개했다. 미트로킨은 1999년 BBC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나는 이 사악한 비밀공작의 엄청난 전개 과정을 보여 주고 싶었고, 양심의 기초가 짓밟히고 도덕적 원칙이 잊혀졌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밝히고 싶었다. 나는 이것을 러시아 애국자로서의 내 의무로 여겼다”고 말했다.
 
유동열 2024-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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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의 스파이 세계]<28>
미인계로 美정계 뒤흔든 中유학생 ‘크리스틴 팡’
 
지난해 5월22일 미 하원 윤리위원회는 중국 스파이로 의심되는 여성과의 불륜 의혹 사건 관련자인 민주당 소속 에릭 스월웰(Eric Swalwell) 하원의원에 대한 2년간의 조사를 종료한다고 밝혔다. 또한 스월웰 의원에 대해 추가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여기서 언급된 중국 스파이란 일명 ‘팡팡(Fang Fang)’으로 불렸던 크리스틴 팡(Christine Fang)이라는 여성 유학생이다. 팡은 1993년생이며 2011년 미국에 유학 와 샌프란시스코 외곽에 있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이스트베이에 다녔다. 그녀는 재학 중 중국인학생협회 회장과 아시아·태평양계 미국인 공공업무 조직(APAPA)의 캠퍼스 지부 회장을 역임했다. APAPA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시민 활동에 참여하도록 장려하는 전국적 조직이다. 그녀는 이들 조직을 미 정계에 접근하기 위한 초기 플랫폼으로 활용했다.
 
▲ 크리스틴 팡이 미 정계인사들에게 접근한 것은 중국 관련 문제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필자 제공
  
팡의 스파이 활동상은 2020년 12월8일 미국 인터넷 뉴스매체인 악시오스(Axios)의 단독 기획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악시오스는 중국 국가안전부(MSS) 요원으로 추정되는 팡이 2011년부터 2015년까지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을 중심으로 오클랜드‧산호세 등을 포함한 광역권의 정치인들을 포섭해 왔다고 폭로했다. 
 
그녀는 선거 자금 모금·광범위한 네트워킹·개인적 카리스마·낭만적 또는 성적 관계를 통해 주로 캘리포니아 기반의 고위 정치인 등 선출직 공무원들과 교류하며 정보를 수집했다. 팡의 목표는 중국 관련 문제에 대해 떠오르는 미국 정치인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고자 한 것으로 보도됐다. 그녀는 5년 동안 캘리포니아 유력 정치인 22명에게 접근하여 친교를 나누며 포섭을 시도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팡이 미국 정치인들에게 접근한 방법은 평범했다. 자신을 대학에 다니는 중국계 유학생이라고 설명한 뒤 선거캠프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겠다고 나서면 되는 것이다. 미국의 정치 풍토에서는 자원봉사를 한다고 하면 대부분의 정치인이 좋아한다. 미국의 대다수 정치인은 보좌관을 채용할 때도 과거 자신의 사무실에서 자원봉사했던 학생들을 키워서 인턴을 시키고 보좌관으로 임명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녀는 선거자금을 모아 주는 식으로 정치인들에게 도움을 줬다. 필요 시 성관계를 활용한 ‘미인계(honey trap)’ 공작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는 수년에 걸쳐 친교를 맺은 연방 하원의원·주의원·시장·기업 임원·중국 영사관 직원을 자신이 주관하는 행사에 자주 초대하고 교류하며 네트워크를 넓혀 갔다.
 
팡이 친교를 나눈 정치인과 유력인사는 스월웰 하원의원 외에 주디 추 의원과 로 카나 의원(캘리포니아)·털시 가바드 의원(하와이)·빌 해리슨 프레몬트 시장·마이크 혼다 캘리포니아 주 의원·애시 칼라 산호세 시의원 등이 있다. 그녀는 미국 중서부에 소재한 시의 시장 두 명과 성관계를 갖기도 했다. 
 
오하이오 소도시의 한 시장과는 차 안에서 성관계를 가졌는데 이는 FBI의 전자 감시에 고스란히 포착되었다. 그 시장이 팡에게 왜 자신을 좋아하냐고 물어보자 그녀는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2014년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 컨퍼런스에서 중서부의 작은 도시 출신으로 알려진 또 다른 시장은 무려 30세 연하의 그녀를 자신의 ‘진짜 여자친구’라며 자랑했다. 그러나 보도에 언급된 유력인사들은 하나같이 자신과의 무관성을 주장했다.
 
중국이 캘리포니아 지역에 대한 정보 활동과 유력 정치인들의 포섭에 주력하는 배경은 캘리포니아의 실리콘밸리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 산업의 중심지로 산업스파이의 온상이며, 캘리포니아가 미국 주 가운데 가장 크고 미국 사회에 미치는 정치·경제적 영향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의 가장 강력한 정치인 중 일부가 이들 지역에서 정치적 기반을 닦았던 점도 고려되었다. 이와 같은 중요성을 인식한 중국 국가안전부는 캘리포니아 지역을 전담하는 부서까지 운용하고 있다.
 
▲ 에릭 스월웰 미 하원의원과 크리스틴 팡. 필자 제공
  
팡의 가장 중요한 공작 대상 중 하나가 차세대 정치인인 젊은 스월웰 의원(캘리포니아 제15지역구)이었다. 그녀는 스월웰이 캘리포니아 더블린 시의원으로 일할 때 처음 접촉했고 2014년 하원의원 선거에서 그를 위한 모금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녀가 추천하여 워싱턴 D.C. 의원 사무실에 인턴을 배치하기도 했다. 
 
FBI가 스월웰 의원에게 팡의 실체를 알려 주며 경고하자 그는 그녀와의 관계를 끊었고 수사에 협조했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하원 정보위원인 스월웰에 대한 공세를 펼쳐 결국 정보위원에서 사퇴하고 2년 동안 하원 윤리위원회의 조사까지 받았다.
 
팡의 스파이 활동이 드러난 것은 FBI가 샌프란시스코 주재 중국 총영사관에서 외교관 신분으로 위장하여 활동하는 중국 국가안전부(MSS) 요원을 감시하던 중 그와 자주 접촉하는 팡을 포착하면서부터였다. 팡은 수사망이 좁혀 오자 지인들에게 워싱턴에 간다고 둘러대고 2015년 중국으로 도주했다. 
 
미국 당국은 중국 스파이 활동이 정치 정보수집 작전을 포함하여 미국 사회 전반에 대한 이른바 영향 공작으로 확대되고 공격적이고 대담해졌다고 평가한다. 팡의 사례는 한 명의 스파이가 어떻게 정치권에 접근하여 정보를 빼낼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마이크 폼페이오 당시 국무장관은 미국이 중국의 스파이 활동 주(主)무대로 전락했고 IP(지식 재산) 절도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경고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미국은 휴스턴에 있는 중국 영사관을 폐쇄했다.
 
2020년 7월 크리스토퍼 레이 당시 FBI 국장은 연설을 통해 미국 내에서 중국의 스파이 활동에 대한 2000건 이상의 수사가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또한 “베이징이 매우 정교한 악성 외국 영향력 캠페인에 가담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여기에는 “우리 정부 정책을 흔들고, 우리나라의 공적 여론을 왜곡하고 민주주의의 과정과 가치에 대한 신뢰를 훼손하려는 파괴적이고 은밀한 범죄적 또는 강압적인 시도”가 포함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이제 FBI가 약 10시간마다 중국 관련 새로운 방첩 사건의 수사를 시작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강조했다. 
 
이는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니다. 이미 대한민국을 대상으로 한 중국의 스파이 공작이 공자학원에서 대중음식점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 속에 침투해 있는 실정이다.   
유동열 2024-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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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의 스파이 세계]<29>
22년간 소련 간첩이었던 FBI 특수요원 ‘로버트 핸슨’
 
2001년 2월20일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루이스 프리(Louis J. Freeh) 국장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충격적인 내용을 발표했다.
 
“저는 오늘 유감스럽게도 이 자리에 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안고 서 있습니다. 25년 전에 모든 국내외 적들로부터 미국 헌법을 수호하고 헌법에 대해 진정한 믿음과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했던 한 FBI 요원이 오늘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극악하고 비난받을 방법으로 그 선서를 위반한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FBI는 그에게 미국 정부의 가장 민감한 기밀 사항 중 일부를 맡겼으나 그는 이 영예를 겸허히 받아들이기는커녕 신뢰를 남용하고 배신했습니다. 이는 동료 FBI 직원뿐만 아니라 미국 국민에 대한 모욕입니다.”
 
프리 국장이 언급한 그 FBI 요원은 22년 넘게 러시아와 옛 소련에 방대한 분량의 고도로 기밀화된 국가안보 정보를 제공한 혐의로 기소된 로버트 필립 핸슨(Robert Philip Hanssen·당시 56세)이다. 
 
로버트 핸슨은 1944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크녹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고 1971년 노스웨스턴대학에서 회계학 MBA를 취득했다. 그후 시카고 경찰국 외사요원으로 일하다가 1976년 1월 FBI에 들어가 2001년 2월 체포될 때까지 25년간 근무했다.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스파이박물관 내의 로버트 핸슨 부스. 그는 FBI에 근무하며 22년 동안 소련과 러시아를 위해 일했다.필자 제공
  
1979년 3월 핸슨은 FBI 뉴욕지부 대(對)소련 방첩부의 특수 요원으로 배치된 후 금전적 목적으로 먼저 소련 군사정보부(GRU) 요원과 간접 접촉하며 기밀을 팔기 시작했다. FBI의 소련 주거 단지 침투에 대한 정보 등을 2회에 걸쳐 제공하고 약 2만 달러를 받았다. 이후 핸슨은 소련과의 편지 접촉을 통해 자신이 FBI 요원이라고 밝히며 만족할 만한 대가를 지불할 것을 요구했고, 소련 측이 이에 응하자 미국에 협조하는 소련 정보요원 목록을 넘겨줬다. 
 
이 중 코드명 ‘탑 햇’의 신원이 포함됐는데 소련에서 미국을 위해 간첩 활동을 한 역대 최고 계급의 군 정보장교였다. 그는 소련으로 소환된 후 처형당했다. 그가 바로 본지에 연재 중인 ‘유동열의 스파이 세계’ 15편(2024.4.16.)에 소개한 폴랴코프 장군이다. 먼저 체포된 미 중앙정보국(CIA)의 이중 스파이 올드리치 에임스도 폴랴코프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는데 핸슨이 체포된 후 수사를 통해 핸슨이 에임스보다 한 발 앞서 정보를 제공했음이 확인되었다. 폴랴코프는 돈이 아닌 정치적 신념에 의해 미국을 도왔으나 FBI의 핸슨과 CIA의 에임스는 엄청난 돈을 챙기며 소련을 위해 간첩 활동을 했다.
 
▲ 로버트 필립 핸슨. 필자 제공
1981년 핸슨은 FBI 본부로 전근되었을 때 양심의 가책을 느껴 소련과의 접촉을 잠시 끊었다. 그 사이 핸슨은 1983년 소련 분석부 상급 특수요원, 1985년에는 뉴욕지부 대소련 방첩부의 현장 지휘자로 활동했다. 
 
그의 두 번째 간첩활동은 1985년 10월에 시작되었다. 그는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고위 정보요원에게 ‘가장 민감하고 고도로 비밀스러운 프로젝트 중 일부를 담은 문서 상자’를 제공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KGB가 여기에 응하자 미국에 협조하는 소련 첩보요원 3명의 명단을 제공했고 10만 달러를 받아 챙겼다. 첩보요원들은 소련으로 소환된 후 2명은 처형되었고 1명은 15년의 중노동형을 선고받았다.
 
1987년 핸슨은 여러 개의 사전 합의된 은닉장소를 물색하여 선정하고 비밀 은닉장소(dead drop)에 이른바 ‘던지기’나 암호화된 통신 등을 통해 정보를 전달하고 거액의 돈을 챙겼다. 1989년 KGB는 핸슨 작전에 참여한 소련 첩보요원들에게 붉은 깃발 훈장·붉은 별 훈장 등을 수여했다. 이는 핸슨이 제공한 정보가 소련에 얼마나 유용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해 주는 사례다. 그는 1990년 5월 감사관으로 승진했고, 미국 내 소련의 간첩 활동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된 부서인 국가방첩부의 소련 작전부서 관리자가 되었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자 핸슨은 소련과의 접촉을 단절했다. 1992년 1월 핸슨은 국가안보 위협 목록을 관리하는 부서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핸슨은 1999년 10월 KGB의 컴퓨터 디스크에 암호화된 메시지를 보내 세 번째 간첩 활동을 시작했다. 이 때 핸슨은 FBI 연락 담당자로 국무부에 파견 근무하며 국무부와 FBI 본부 간에 기밀 정보와 문서를 전달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자신이 만든 사실상 해독 불가능한 암호인 ‘원타임 패드’를 사용하여 암호화된 무선 전송을 통해 소련과 통신했다.
 
그동안 핸슨이 소련에 제공한 대표적인 정보 자료를 보면 미 정보기관의 예산·소련 정보기관에 대한 FBI의 기술적 침투·소련 위성 전송에 대한 미국의 침투·소련 정보요원을 포섭하려는 미국의 시도·소련 통신을 읽는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능력 한계·이중 스파이 작전에 대한 평·워싱턴 D.C. 주재 소련 대사관 하부의 도청감시 비밀 터널 정보 등이 있다. 심지어 FBI에 의해 간첩혐의로 수사받고 있는 국무부 외교관인 펠릭스 블록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그가 기소를 피하도록 했다.
 
기소장에 의하면 핸슨이 20회 이상 KGB와 그 후신 기관인 해외정보국(SVR)에 워싱턴 지역의 비밀 은닉장소를 통해 정보를 넘겼고 20개가 넘는 컴퓨터 디스켓을 제공하는 등 총 6000페이지가 넘는 기밀자료를 제공했다. 그 대가로 핸슨은 엄청난 금품을 챙겼는데 현금과 다이아몬드 등 140만 달러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체포될 당시 비밀구좌에 60만 달러가 넘는 돈이 남아 있었다. 핸슨은 직접 만나자는 KGB의 제의도 거부하고 비밀 은닉장소· 통신 정보를 돈과 교환했다.
 
국가기밀정보가 줄줄이 새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FBI는 CIA와 합동으로 이른바 두더지(정보기관에 침투한 간첩)’ 추적 작전에 돌입했다. 2000년 FBI는 무려 700만 달러의 거액을 전 러시아 정보요원에게 제공하고 ‘B’로 명명된 인물의 통신 녹취록을 확보했다. 그리고 음성 대조와 지문 감식 등을 거쳐 핸슨을 특정했다. 그 후 밀착 감시를 통해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여 러시아에 기밀을 전달하려는 현장에서 2001년 2월18일 핸슨을 체포했다. 
 
핸슨은 간첩·간첩 공모·간첩 미수 등 21건의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사형을 면하기 위해 15건의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다. 그는 2001년 7월 종신형을 선고받고 콜로라도주 소재 연방교도소에 수감 중 2023년 6월5일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미국 정부는 핸슨 사건을 ‘미국 역사상 최악의 간첩 사례’로 평가했다. 핸슨의 간첩 행위는 최근 정보사 군무원의 블랙망 누설 사건 등에서 보듯이 한국 정보기관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시사해 준다.
 
유동열  2024-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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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의 스파이 세계]<30>
가족·친구 동원해 간첩 활동한 美해군 준위 ‘워커’
 
1968년 1월23일 오전 11시30분경 미 해군 정찰함 푸에블로(Pueblo)호가 동해 공해상에서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나포되었다. 함장 등 83명의 승무원들이 11개월이나 억류되었다가 풀려난 사건인데 일명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이라 불린다. 
 
당시 이 배는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소련 해군기지의 활동과 동해상의 북한 신호정보 관련 첩보 등을 수집하고 있던 중이었다. 북한이 해양 관측용 선박으로 위장한 푸에블로호의 정체를 안 것은 소련이 제공해 준 정보 때문이었다.
 
이 정보는 1985년 5월20일 미 연방수사국(FBI)에 의해 1967년부터 1985년까지 소련을 위해 간첩 활동을 한 혐의로 체포된 전 해군 준위 존 안소니 워커(John Anthony Walker Jr.)가 소련 측에 제공한 첫 번째 군사기밀 중 하나였다. 워커가 18년간 소련에 넘긴 군사기밀은 미 해군의 암호체계를 비롯해 무기와 센서 데이터해군 전술, 수상·잠수함·공수 훈련 준비 및 전술에 대한 접근, 작전 명령, 기술 매뉴얼 등 엄청난 것이었다. 소련은 미 해군의 움직임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대미 작전을 전개할 수 있었다.
 
워커는 1937년 워싱턴 D.C.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철없이 절도 행위를 한 것이 적발되었는데 당시 징역형을 피하기 위해 18세의 나이로 1955년 해군에 입대했다. 이후 그는 구축함·호위함·항공모함의 승무원 겸 통신병으로 복무했다.
 
 
1957년 겨울, 그는 보스턴에서 상륙 휴가를 보내는 동안 바바라 크롤리를 만나 결혼해 세 명의 딸과 아들을 두었다. 이후 잠수함학교에서 암호화 장비기사 자격을 취득한 후 레이저백(SS-394)호에 배치되었는데, 당시 최고 등급의 암호 취급 허가를 받았다. 그는 해군에서 성실하게 근무한 덕에 8년 만에 전자통신 분야에서 상사로 진급했다. 또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인원만이 핵미사일 잠수함에서 근무할 수 있었는데 이와 관련한 심사 프로그램도 통과했다. 1967년에는 준위로 진급했다. 
 
이후 그는 샌디에이고 해군훈련센터 통신학교의 부교장을 역임하고 버지니아주 노퍽에 있는 COMSUBLANT 본부와 USS 나이아가라 폭포호의 통신책임자로 근무하며 잠수함 부대의 전체 통신센터를 관할했다.
 
▲ FBI가 압수한 워커의 여권·해군 신분증·운전면허증. 필자 제공
  
워커는 군복무 중 술집을 열었지만 실패했다. 상당한 빚을 지게 되자 워커는 생각 끝에 1967년 미 해군의 암호화 해독 카드를 들고 워싱턴 D.C.에 있는 소련 대사관에 들어가 경제적 보상을 요구하며 스파이 활동을 자청했다. 이후 그는 지속적으로 소련에 해군 암호 기술 관련 정보를 제공했다. 
 
워커는 1976년에 이혼하고 전역했다. 그는 사설 탐정사무소를 열고 계속 소련에 제공할 정보를 수집할 대상을 모색했다. 먼저 자신의 형인 해군 중령 출신 잠수함 장교였던 아서 제임스 워커를 포섭했다. 이어 노퍽 기지 근무 때 친교를 맺은 제리 휘트워스도 포섭했다. 휘트워스는 1983년에 전역할 때까지 해군 암호화 시스템과 미국 보안전화 시스템의 키를 제공했다. 
 
워커는 심지어 자신의 아들인 마이클 랜스 워커를 해군에 입대시켜 정보 분야에서 경력을 쌓도록 준비시키기도 했다.
 
▲ 간첩 행위로 냉전 동안 美해군 작전에 막대한 피해를 입혀 종신형을 선고 받았던 워커는 2014년 8월28일 77세의 나이로 교도소에서 병사했다. 필자 제공
 
워커의 간첩 활동이 발각된 것은 전 부인인 바바라가 1984년 11월 남편의 간첩 활동에 대해 FBI에 제보했기 때문이다. 워커가 육군 통신부에 근무하던 막내 딸 로라를 포섭하려고 집요하게 접근한 사실을 알고 분노하여 신고한 것이다. FBI 보스턴 지부는 바바라의 제보를 가정불화 문제로 간주하여 대응하지 않았는데, 몇 달 후 비활성 파일을 점검하던 FBI 감독관이 이를 발견하고 FBI 버지니아 지부로 이관시켜 수사를 시작했다.
 
FBI 본부는 코드명 ‘윈드플라이어’라는 수사를 승인했다. FBI는 1년 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받은 편지에서 간첩 행위를 자백한 ‘RUS’가 휘트워스임을 확인했다. 이 수사에는 당시 용의자였던 워커가 현역 군인이었기 때문에 해군 수사국도 참여했다. 
 
법원에서 허가한 감시기술을 사용하여 FBI는 워커가 데드 드롭(dead drop)을 수행할 계획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데드 드롭이란 스파이가 훔친 비밀 패키지를 특정 장소에 숨겨 상대방이 가져갈 수 있도록 하는 전달 방법으로 비대면 접촉으로 비밀리에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FBI는 워커에 대한 24시간 감시를 시작했고, 1985년 5월19일 그가 버지니아에서 소련이 알려 준 메릴랜드주 몽고메리 카운티에 있는 데드 드롭 장소에 보관한 문서를 압수했다. 여기에는 항공모함 USS 니미츠에서 훔친 기밀문서 127쪽이 있었다. 다음 날인 5월20일 워커는 호텔에서 체포됐다. 
 
그의 집을 수색한 결과 6월3일에 당국에 자수한 휘트워스에게 지불한 금전 기록을 포함하여 가족 간첩망에 대한 증거들이 대거 발견됐다. 이후 그의 아들 마이클 랜스 워커·그의 형 아서 워커, 그리고 제리 휘트워스가 체포되었다. 워커는 휘트워스에게 스파이 활동에 대한 대가로 6년간 32만8000달러를 지불했고, 워커는 소련으로부터 100만 달러 이상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 1985년 체포당시 워커 사진. 필자 제공
재판 결과 존 안소니 워커는 종신형, 형인 아서 워커는 종신형과 25만 달러의 벌금, 아들 마이클 랜스 워커는 25년형(2000년 가석방), 제리 휘트워스는 징역 365년형과 41만 달러의 벌금을 선고받았다. 워커는 2014년 8월28일 77세의 나이로 교도소에서 병사했다.
 
워커의 간첩 행위는 냉전 기간 동안 미국 해군의 작전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당시 국방장관 카스파 와인버거는 소련이 워커의 스파이 활동으로 해군 전쟁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했다. 워커를 처음 관리했던 소련 KGB(국가보안위원회) 요원 올렉 칼루긴(Oleg Kalugin)은 “워커 사건은 내가 미국에서 처리한 스파이 사건 중 가장 눈부신 사건”이라고 증언했다.
 
유동열 2024-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