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경재

[ 스파이 세계] <21>~<25>

서석천 2025. 3. 12. 04:13

 6일 전쟁 승리 안긴 ‘샴페인 스파이’ 볼프강 로츠
▲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 원장 
1967년 6월5일 오전 7시45분, 이스라엘 공군 전투기 184대가 레이더망을 피해 초저공 비행을 하며 이집트의 11개 공군기지로 날아가 활주로에 있던 이집트 전투기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날 하루 동안 파괴된 이집트 공군기는 무려 300대에 달했다. 또한 이스라엘은 시리아·요르단에 대해서도 기습 공격을 퍼부었다. 선제 기습 공격으로 제공권을 장악한 이스라엘군은 이들 3개국에 지상군을 투입시켜 파죽지세로 휩쓸어 가며 이집트 땅이던 시나이 반도와 가자지구·시리아의 골란고원·요르단 땅이던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서안 지역을 장악했다. 전쟁 개시 6일 만인 6월10일 전쟁이 종료되어 ‘6일 전쟁’ 또는 ‘제3차 중동전쟁’으로 불린다.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2만700㎢에 불과하던 영토를 6만8600㎢로 3배가량 늘렸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이면에는 이스라엘 정보요원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은 활약상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카이로의 텔아비브 눈(The Eye of Tel Aviv in Cairo)’으로 불리는 볼프강 로츠(Wolfgang Lotz)다.
 
볼프강 로츠는 1921년 독일 만하임에서 연극 감독인 독일인 아버지와 배우였던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유대교에 대한 신념이 약해 아들에게 할례(포경수술)도 시키지 않았다. 이는 후에 로츠가 이집트에 침투하여 스파이 활동을 할 때 그의 목숨을 지켜 주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1931년 부모의 이혼으로 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1933년 히틀러가 유대인을 박해할 기미를 보이자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이스라엘로 도피해 텔아비브에 정착했다. 그는 제에브 그르 아예(Ze'ev Gur Arie)라는 히브리어 이름으로 개명했다. 농업학교를 다니다 15세에 하가나(Haganah·유대인 비밀 군사조직)에 들어갔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군에 징집되어 이집트에 주둔했던 정보부대에 배치되었다. 그가 독일어·아랍어·히브리어 등에 능통했기 때문에 주로 롬멜 장군 휘하의 독일 포로들에 대한 심문 작업에 종사했다. 전쟁이 끝나자 이스라엘로 돌아와 리브카(Rivka)라는 여성과 결혼해 아들을 낳았다.
 
▲ 볼프강 로츠는 이집트에 침투하기 위해 강도 높은 스파이 훈련과 이집트 역사·정치·문화에 대한 학습을 마치고 철저한 신분 세탁을 거쳤다. 필자 제공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군에 입대하여 대위로 복무하며 아랍국과의 전투에 참여했다. 1956년 이집트와의 시나이 전쟁 때는 소령으로 진급해 보병여단을 지휘했다. 그리고 그해 이스라엘 군정보국 아만(Aman)에 차출되어 스파이 활동에 투입된다. 
 
로츠는 이집트에 침투하기 위해 강도 높은 스파이 훈련과 이집트 역사·정치·문화에 대한 학습을 마쳤다. 또한 신분 세탁을 위해 1959년 11월 독일로 갔다. 2차 대전 당시 독일 포로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접한 경험을 바탕으로 반유대주의자로 변신했다. 이스라엘 정보부는 로츠의 유대인 출생기록 등을 파기했고 2차 대전 당시 롬멜 장군의 아프리카군단에서 헌신적으로 복무한 모범적인 독일군으로 복무기록을 조작했다. 이어 전쟁 후에는 호주로 이주해 11년간 말 농장을 경영한 사업가로 경력을 세탁했다. 로츠라는 스파이를 양성하는 데는 무려 4년이 소요되었다.
 
1960년 12월 로츠는 마침내 이집트에 침투한다. 그러고는 수도 카이로에 승마 클럽을 설립하기 위해 온 부유한 독일인 사업가로 행세한다. 카이로의 승마 클럽 중 이집트 육군 장교들이 후원하는 클럽을 드나들며 장교들과 친분을 쌓았고, 카이로 외곽에 말 사육 농장과 승마 학교를 세웠다. 그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이집트 상류층에 진출해 명망가들이 모이는 모든 파티에 드나들었다. 이를 통해 이집트 정부 고위 관료와 군사 엘리트들과 접촉하면서 각종 군사정보를 입수했다.
 
▲ 로츠가 스파이 활동을 하던 중 만난 두 번째 아내 발트라우트는 뛰어난 사교술로 로츠의 스파이 활동에 도움을 줬다. 필자 제공
1961년 파리 여행 중 동독 난민으로 미국에 거주하던 풍만한 체격의 금발 미녀 발트라우트(Waltraud)를 만나 2주 만에 결혼했다. 고향에 첫 번째 아내가 있었으니 이중 결혼을 한 것이다. 이 사실을 뒤늦게 파악한 군정보국 ‘아만’은 우려했으나 그녀의 현란한 사교술은 도리어 로츠의 스파이 활동에 한몫을 했다.
 
로츠는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의 고문 엘 샤페이·이집트 로켓 기지와 군사 공장의 보안 책임자인 오스만 장군·카이로 경찰서장 등과 교류하며 수에즈 운하 근처의 비밀 기지·미그(MIG) 전투기 기지·소련이 제공한 무기체계·이집트군의 전력·작전계획·병력 배치 현황·방어 역량·이집트를 위해 일하는 독일 로켓 과학자들의 목록 등을 입수했다. 그는 각종 호화 파티를 주최했고 이집트 친구들에게 사치스러운 선물 공세를 펼쳤다. 여기에는 엄청난 비용 지출이 뒤따랐다, 그러나 ‘고비용 지출’에 ‘초고효율의 정보’를 산출했고 아만은 환호했다. 그의 별명이 ‘샴페인 스파이’가 된 이유다. 1963년 로츠의 소속은 ‘모사드(Mossad·이스라엘 대외정보국)’로 바뀌었다.
 
로츠의 스파이 행각이 탄로 난 것은 무선 교신 때문이었다. 이집트 방첩 당국은 라디오 청취 시 엄청난 잡음과 방해 전파가 발생한다는 신고가 잇따르자 전파탐지 역량을 보유한 소련에 도움을 요청했다. 결국 소련 군정보국(GRU) 소속 전파탐지팀의 추적으로 전파의 발신지가 로츠가 운영하는 말 사육 농장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1965년 2월 로츠 부부가 체포됐고 5년간의 스파이 활동은 막을 내렸다. 이 소식을 접한 이집트 관계자와 군부는 발칵 뒤집혔다. 내 친구가 스파이였다니! 전 세계 언론도 경악했다.
 
▲ 1965년 2월 로츠 부부는 이집트 방첩당국에 스파이 혐의로 체포됐다. 필자 제공
 
이집트 방첩 당국은 로츠가 이스라엘 스파이일 가능성이 크다고 의심했지만 그는 심한 고문에도 끝까지 자신은 독일인이라고 버텼다. 게다가 유대인으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할례를 하지 않았고 독일 내의 기록도 완벽하기 때문에 방첩 당국은 그를 독일정보부(BND) 소속의 스파이라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을 위한 간첩 혐의로 기소했다. 1965년 8월 로츠는 무기징역형과 중노동형을. 부인 발트라우트는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로츠가 이스라엘 스파이였다는 사실은 1967년 6일 전쟁 직후 드러났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와 포로(500명) 협상 시 포로교환 명단에 로츠와 그의 아내를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1968년 로츠는 이스라엘로 돌아와 평온한 삶을 살다가 1993년 심장병으로 72세의 나이로 숨졌다. 그는 생전에 ‘샴페인 스파이(The Champagne Spy)’(1972)란 자서전을 집필하여 자신의 활동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유동열 2024-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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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파이 세계] <22>
고르디옙스키 KGB 英지부장은 ‘MI6 스파이’
 
 
1983년 9월1일 오전 3시25분(한국시간) 미국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을 출발해 김포국제공항으로 오던 대한항공 007기가 사할린 모네론섬 근처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을 받아 격추되었다. 여기에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미국·일본 등 16개국 국민 269명이 탑승하고 있었는데 전원 사망했다. 바로 KAL 007기 격추 사건이다. 
 
당시 영국과 미국의 정보당국은 감청 등 과학정보를 통해 사건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었다. 소련 당국이 격추 지시를 내린 정치·군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영국 비밀정보부 MI6의 스파이였던 KGB 고위 간부가 영국에 관련 정보를 제공하여 그 의문이 해소되었다.
 
제보자는 바로 소련 KGB 영국 지부장이었던 올레크 고르디옙스키다. 고르디옙스키는 1938년 소련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형 모두 KGB에서 근무했다. 그는 17세에 모스크바 명문대학인 국제관계대학에 입학했는데 그 대학은 우수 학생들에겐 KGB로 가는 등용문이었다. 
 
그는 대학 졸업 전 KGB 예비요원으로 선발되어 6개월 동안 현장 경험을 위해 동베를린으로 파견됐다. 소련 대사관의 통역관 직책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동독 주민들의 서독 탈출 현장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소련 체제에 대해 회의감을 갖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귀국 후 1962년 KGB 정규요원으로 선발되어 교육훈련을 마치고 1963년 해외담당 부서에 배치되었다.
 
1965년 그는 역시 KGB 요원인 엘레나 아코피안을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6년 1월 덴마크 코펜하겐에 외교관 신분으로 위장하여 파견 나갔다. 간첩들의 네트워크를 관리하는 역할이었다. 그러나 1968년 8월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의 자유개혁 운동을 소련이 잔인하게 진압한 것을 보고 그는 크게 분노했다.
 
▲ 올레크 고르디옙스키. 필자 제공
고르디옙스키는 1970년 1월 소련으로 소환되었다가 1972년 10월 다시 코펜하겐으로 나갔다. 그를 추적하던 덴마크 정보국(PET)과 영국 비밀정보부(MI6) 요원은 그의 신념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포섭 작전에 돌입했다. 
 
1974년 10월1일 MI6 요원이 만날 것을 제안하자 그는 영국 요원들의 동향을 파악하겠다고 보고하여 접촉 승인을 받았다. 이 사실은 그에게는 향후 스파이 활동의 안전판 역할을 했다. 그는 수시로 덴마크 정보국(PET)과 영국 비밀정보부 MI6 요원들이 흘려 주는 ‘새끼 정보’를 상부에 보고해 신임을 얻었다. 그리고 이 무렵 MI6 제의에 동의해 이중간첩 활동을 하게 된다. MI6은 그에게 ‘Sunbeam’(햇살)이란 암호명을 부여했다.
 
이 무렵 그는 코펜하겐의 세계보건기구(WHO)에 근무하는 11살 연하의 여성 레일라 알리예바에게 빠져 있었는데 결국 밀회가 탄로나 아내 엘레나와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그는 모스크바에서 외교 행낭을 통해 반입된 KGB 비밀자료를 복사해 수백  건의 비밀문서를 영국에 전달했다.
 
1978년 6월 그는 다시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 그의 아내는 모스크바로 돌아간 뒤 이혼에 동의했다. 고르디옙스키는 덴마크에서 망명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으나 귀국하기로 결심했다. MI6에는 “소련 지도자들에 관해 가장 비밀스러운 정보와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요소를 알아내고 싶다”고 말한 뒤 귀국했다. KGB는 그의 이혼 사실을 보고받고 그를 한직으로 발령냈다. 1979년 1월 그는 레일라와 재혼했다.
 
KGB는 1982년 6월 고르디옙스키를 런던에 배치했다. 그는 수많은 기밀정보를 MI6에 제공했고 KGB에는 ‘새끼 정보’를 제공해 계속 신임을 얻었다. 런던에 있는 동안 그의 MI6 코드명은 ‘NOCTON’이었다. 그가 서방세계에 결정적으로 공헌한 정보는 소련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훈련인 ‘에이블 아처 83’(Able Archer 83)을 잠재적인 핵 선제공격으로 잘못 해석하고 있음을 알려 소련과의 핵 대결을 피하게  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당시 소련의 최대 정보작전인 라이언(RYAN·핵미사일 공격 합성어) 작전의 실체를 알게 했다. MI6은 미국 CIA와 정보를 공유했으나 ‘제보자’의 신원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그의 제보로 MI6은 영국과 유럽에서 암약하는 수많은 소련 스파이와 포섭망을 검거할 수 있었다.
 
1985년 4월25일 고르디옙스키는 KGB 런던 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985년 5월16일 급히 모스크바로 소환됐다. MI6은 망명을 권했지만 그는 그것을 거부하고 소환에 응했다. 그는 모스크바 도착 후 KGB 안전가옥에 이송되어 약물을 투여받고 간첩 혐의에 대해 5시간 넘게 심문을 받았다. 거듭된 심문에서도 간첩 활동의 결정적 증거가 나오지 않자 그를 일시적으로 석방하고 해외정보 업무에서 배제했다. 고르디옙스키의 스파이 행위가 발각된 것은 KGB에 간첩 활동을 자청한 미국 CIA 간부 ‘올드리치 에임스’(본지 스파이세계 1월23일자 게재)의 제보 때문이었다.
 
▲ 고르디옙스키는 2007년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필자 제공
 
고르디옙스키는 자신의 스파이 행각이 탄로 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판단하고 영국에 탈출 요청을 했다. MI6은 1978년 마련했던 고르디옙스키 탈출 계획인 핌리코 작전(Operation Pimlico)을 가동했고, 그는 1985년 7월19일 KGB의 추적을 피해 핀란드와 노르웨이를 경유해 영국으로 탈출했다. 이 작전은 그의 아내 레일라도 남편의 탈출을 알지 못할 정도로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1985년 9월 영국 외무부는 고르디옙스키의 망명을 발표했다. 영국 정부는 고르디옙스키가 지목한 인사 25명을 간첩 활동 혐의로 추방했다. 소련도 이에 상응하여 영국 정보요원 25명을 추방시켰다. 이 사건으로 KGB에 대한 대대적인 검열이 시작되었고 수많은 요원들이 처형·수감·축출되었다. 1985년 11월14일 소련은 궐석재판에서 그에게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했다.
 
1986년 5월 마거릿 대처 영국 수상은 고르디옙스키를 만나 격려했고 1987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그를 백악관에 초대해 면담했다. 2007년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영국 안보에 대한 공로로 ‘세인트 마이클 앤드 세인트 조지’(CMG) 훈장 3등급을 수여했다. 고르디옙스키는 영국 한 도시의 안가에서 가명으로 은둔 생활을 이어 가고 있다. 그는 1995년에 회고록 ‘Next Stop Execution’을 발간했다. 영국 신문 더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벤 매킨타이어가 그의 일대기를 재조명한 ‘스파이와 배신자’(2018)가 2023년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바 있다.
 
유동열  202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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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의 스파이 세계]<23>
40년간 쿠바 스파이 駐볼리비아 美대사 ‘마누엘 로차’
 
 
지난해 12월4일(미국시간) 미국 법무부는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중남미 국장과 볼리비아 대사 등을 역임한 중남미 전문 외교관 출신의 빅토르 마누엘 로차(Victor Manuel Rocha·74세)를 40년간 쿠바 스파이로 활동한 혐의로 기소했다. 이후 재판 과정에서 로차는 자신의 무죄를 계속 주장했지만 올해 2월 말 결국 유죄를 인정했고, 4월12일 미국 마이애미 연방법원은 징역 15년과 벌금 50만 달러를 선고했다. 
 
메릭 갈랜드 미국 법무장관은 이 사건은 외국 정보요원이 미국 정부에 침투해 가장 광범위하게 오랫동안 스파이 활동을 한 사건 중의 하나라고 평가했다.
 
로차는 1950년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태어났다. 10살 때 아버지가 사망한 후 어머니와 함께 뉴욕으로 이주해 할렘가에서 어렵게 자랐다. 1965년 빈민청소년 지원프로그램에 선발되어 코네티컷의 명문 학교인 태프트스쿨에 입학했으며 1973년 예일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1978년 조지타운대학에서 외교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해 로차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 쿠바 정보국((DGI·Dirección de Inteligencia)의 지시에 따라 미국 국무부에 침투하는 데 성공한 로차는 이후 외교관으로 승승장구해 클린턴 행정부에서 볼리비아 주재 미국 대사(2000~2002)를 지냈다. 필자 제공
 
1981년 11월 로차는 쿠바 정보국(DGI·Dirección de Inteligencia)의 지시에 따라 미국 국무부에 침투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1982년 도미니카공화국 주재 미(美)대사관 정무담당관으로 해외공관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온두라스 주재 미 대사관의 정치군사담당관(1987~1989)·멕시코 주재 미 대사관 서기관(1989~1991)·도미니카공화국 주재 미 대사관 부대사(1991~1994)·쿠바 주재 미국이익대표부 부대표(1995~1997)·아르헨티나 주재 미 대사관 부대사(1997~1999) 등으로 근무한 경력에서 보듯이 미국 최고 중남미 전문 외교관이었다. 
 
1994년에는 NSC(National Security Council·국가안전보장회의) 파견되어 1년간 중남미국장을 역임하며 미국의 대(對)쿠바 정책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클린턴 행정부에서는 볼리비아 주재 미국 대사(2000~2002)까지 올랐다. 그의 승승장구에 쿠바 정보국은 환호했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의 쿠바 정책 등 중남미 국가에 대한 핵심 기밀정보가 줄줄이 쿠바 정보국으로 넘어갔다. 유출된 비밀 내역을 공개 기소장에서는 적시하지 않았지만 쿠바 정권에 대한 미국의 평가·인물 정보·미국의 대 쿠바 비밀작전 정보·쿠바 관련 전 세계의 외교 보고서 등일 것으로 추정된다.
 
로차는 퇴직 후에도 외교관계협의회 정회원·마이애미대학의 쿠바지원 프로젝트 자문위원·미중부군 사령관의 특별고문 등으로 활동하며 수집한 각종 기밀정보를 쿠바에 제공했다. 기소장에 따르면 로차는 자신의 비밀 임무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미국에 허위 정보를 제공했다. 또한 2017년 쿠바 요원들과 접선하기 위해 도미니카공화국과 파나마를 거쳐 쿠바에 들어갔는데 미국 당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도미니카 공화국 국적과 여권까지 발급받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 미국 최고 중남미 전문 외교관으로 활약하던 로차는 2000~2002년 주(駐)볼리비아 미국 대사를 지내기도 했다. 필자 제공
  
로차가 쿠바에 포섭된 시점은 예일대를 졸업하고 1975년 칠레 여행을 갔을 때로 파악되었다. 현지에서 쿠바 정보국의 ‘좋은 친구’가 되었다고 기소장엔 적혀 있다. 이때부터 2023년 12월1일 마이애미 자택에서 체포될 때까지 그중 40년간 쿠바정보국의 비밀요원으로 암약한 것이다. 로차에 대한 수사는 FBI에 그의 스파이 활동에 대한 제보가 들어왔을 때 시작되었으니 2022년 11월 이전으로 보인다.
 
제보 평가 후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한 FBI는 로차의 비밀활동을 역추적하는 한편 비밀 잠복요원을 쿠바 정보국 요원으로 위장시켜 그에게 접근시켰다. 이때가 2022년 11월15일이다. FBI 잠복요원은 세계 최대 규모의 비밀 모바일 메신저인 ‘왓츠앱(WhatsApp)’을 통해 로차에게 접선 메시지를 보냈다. 직후 전화 통화에서 “나는 당신이 칠레에 있을 때부터 우리의 좋은 친구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고 말하자 로차는 이를 신뢰하고 바로 다음 날 만나자고 했다. FBI 잠복요원은 자신을 쿠바 정보국에서 파견한 새로운 마이애미의 비밀 대표자이며 연락책이라고 밝히고 대화를 이어 갔다. 47년 전 칠레 이야기를 꺼낸 FBI의 미끼에 74세 관록의 스파이가 걸려든 것이다.
 
▲ 2023년 기소장에 공개된 동영상에서 로차가 자신의 첩보 활동이 그랜드슬램 그 이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필자 제공
  
체포 직전까지 로차는 모든 대화가 비밀리에 녹음되고 촬영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미국을 ‘적’이라고 지칭하며 “우리가 한 일은 엄청났고 그랜드슬램
(grand slam·골프나 테니스에서 한 해에 4개 메이저 대회를 모두 석권하는 것)
그 이상이었다”고 강조했다. 또한 40년 동안 쿠바를 위해 정보활동을 한 행위를 자랑스러워하며 “나의 최우선 관심사는 워싱턴 측에서 지도부의 생명이나 혁명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쿠바 정보국의 지시에 따라 은퇴 후 평범한 삶을 살았고 자신의 활동을 은폐하기 위해 ‘우익’을 위한 활동을 했다고 했다. 이는 그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중남미 문제 최측근으로 활동하며 강경책을 자문한 사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로차가 재판 과정에서 내내 무죄를 주장하다 유죄를 인정한 것은 연방검찰 측이 제안한 유죄협상(Plea Bargaining)을 받아들여 형량을 줄이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연방검찰로서도 수년이 소요될지도 모르는 재판 과정에서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국가안보와 외교와 관련된 비밀정보 내역을 법정에서 낱낱이 공개해야 하는 부담을 감안한 것이었다. 이른바 ‘기밀손상 평가’ 차원에서 유죄협상을 제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40년 암약한 스파이에게 너무 관대한 처벌이 내려졌다는 비판도 있었다.
 
이 사건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는 미국의 방첩 활동이 사실상 실패한 사례로 평가된다. 제임스 올슨 전 CIA 방첩국장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이 사건은 “쿠바 정보국이 수십 년 동안 어떻게 미국을 이겼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고 말했다. 이러한 내부자에 의한 스파이 사건에도 스파이 세계는 영역이나 시간·장소에 제한 없이 정교하게 가동되고 있다.
 
유동열 2024-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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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의 스파이 세계]<24>
17년간 쿠바 스파이 美국방정보국 간부 ‘애나 몬테스’
 
2001년 9월21일 오전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들은 워싱턴D.C. 볼링 공군기지에 소재한 국방정보국(DIA) 본부 청사에서 영장을 제시하고 44세의 여성 간부를 긴급 체포했다. 10일 전 발생한 9.11 테러에 대한 대응으로 정신이 없었던 DIA 청사는 술렁였고 대략적 사실을 접한 직원들은 경악했다. 
 
이 여성은 DIA 내 쿠바 문제 최고 선임분석가인 애나 몬테스(Ana Bellen Montes)였다. 특히 1997년에는 조지 테넷 CIA 국장으로부터 DIA 우수직원상을 받았고, 크고 작은 10개의 특별표창을 받았으며 부서 내에서 ‘쿠바의 여왕’으로 불릴 정도로 자타가 공인하는 베테랑 쿠바 전문가였다.
 
같은 시각 FBI 마이애미 지부장은 9.11 관련 통신 해독으로 정신이 없는 루시 몬테스(Lucy Montes)를 호출했다. 루시는 애나의 여동생으로 FBI 28년 차의 베테랑 통신 분석가였다. 지부장은 루시에게 “당신의 언니가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 당신의 언니 애나는 쿠바 스파이다”고 말했다.
 
애나의 남동생인 FBI 특수요원 티토 몬테스(Tito Montes·부인도 FBI 요원)도 비슷한 시각 상사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애나의 전 남자친구인 로저 코너레토는 국방부의 쿠바 전문 정보장교였다. 애나는 미국을 위해 정보 전선에서 헌신하는 동료뿐만 아니라 가족을 배신하고도 당당했다. 
 
그녀는 최후 진술에서 “쿠바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잔혹하고 불평등하다… 작은 섬나라 쿠바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도덕적인 책임감으로 활동하게 됐다”며 자신의 스파이 활동을 정당화했다. 연방법원은 그녀가 국가 전체를 위험에 빠뜨렸다며 징역 25년과 보호관찰 5년 형을 선고했다.
 
▲ 1997년 미 CIA는 애나 몬테스에게 국방정보국(DIA) 우수요원상을 수여했다. 필자 제공
 
애나 몬테스는 1957년 서독 뉘른베르크에 주둔하고 있는 미 육군 기지에서 4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알베르토 몬테스)는 푸에르토리코계로 존경받는 육군 군의관이었다. 그녀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아버지는 군의관 생활을 접고 가족과 함께 미국 메릴랜드로 와서 정착했다. 애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성적이 4점 만점에 3.9였을 정도로 우수한 학생이었다. 1979년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외교학 학위를 받았다. 대학 재학 때 스페인 유학프로그램에 선발되었는데 거기서 아르헨티나 출신의 좌파 학생을 만났고 그로부터 반미 의식을 갖게 되었다.
 
애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1979년 미 법무부에 들어가 업무에서 두각을 나타내 일급 기밀에 접근할 수 있는 보안 인가까지 받았다. 재직 중 그녀는 존스홉킨스대학 국제학대학원에 입학했다. 여기서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중남미 정책에 적대감을 보이면서 니카라과 공산주의 산디니스타 정부에 맞서 싸우는 반군인 콘트라스에 대한 미국의 지원에 대해 증오심을 가졌고 이를 동료 학생들에게 설파했다. 
 
애나의 반미 및 친 중남미 성향을 파악한 쿠바 정보국은 애나에게 접근했고 금전이 아닌 신념을 자극해 그녀를 포섭했다. 이때가 1984년이었다. 그녀는 1985년 여행을 가장해 유럽으로 출국해 쿠바 여권을 가지고 비밀리에 쿠바를 방문해 지령을 하달받았다. 1988년 애나는 재학 중이던 존스홉킨스대학 국제학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 애나는 암호화된 메시지를 통해 쿠바 정보국과 소통했고 쿠바가 보낸 단파 암호화 방송을 통해 지령을 받았다. 필자 제공
 
애나는 “좀 더 유용한 정보가 있는 조직으로 옮기라”는 쿠바 정보국의 지시에 따라  1985년 9월 국방정보국(DIA)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쿠바 담당 전문부서에서 분석 업무를 맡았고, 엘살바도르와 니카라과의 수석 분석가를 거쳐 DIA의 쿠바담당 최고 정치·군사 분석가로 임명되었다. 그녀는 합참·국가안전보장회의(NSC) 등에서도 쿠바에 대해 브리핑할 정도였다. 곧 CIA 자문관으로 승진이 예정되어 있는 상태였다.
 
애나는 DIA에서 접한 기밀 정보를 달달 외워 퇴근 후 도시바 노트북에 꼼꼼하게 기록했다. 또한 플로피 디스크에 수년간의 기밀 정보를 저장해 두었다. 그녀는 암호화된 메시지를 통해 쿠바 정보국과 소통했고, 쿠바가 보낸 단파 암호화 방송을 통해 지령을 받았다. 워싱턴 D.C. 시내에 있는 공중전화를 통해 쿠바 정보국과 암호화된 숫자 호출기 메시지로 통신했다. 그녀는 쿠바 주재 미국 요원 4명의 신원을 포함해 상당한 양의 기밀 정보를 쿠바 정보국에 넘겼다. 그중에는 엘살바도르에서 비밀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미 특전단 요원들의 행선지 정보를 넘겨 목숨을 잃게 한 일도 있었다.
 
DIA의 방첩 담당관 카마이클은 1996년부터 애나를 주시했다. 그는 2000년 FBI로부터 쿠바 스파이가 DIA에 잠입해 활동하고 있다는 통보를 받고 그녀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FBI와 DIA는 합동수사팀을 편성해 애나를 추적했다. 합동수사팀은 미 해외정보감시법원으로부터 애나의 아파트·자동차·사무실을 은밀히 수색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전화 도청과 미행을 통해 애나가 1996년에 한 가게에서 도시바 노트북을 샀고 여러 공중전화 부스를 옮겨 다니며 쿠바와 통신한다는 걸 알아냈다. 그녀의 자택 비밀 압수 수색을 통해 쿠바와의 교신에 사용한 단파라디오·난수표·호출기 등을 찾아냈다. 또한 몇 주에 한 번씩 그녀가 워싱턴 D.C. 시내 중국 식당에서 쿠바 요원과 정기적으로 접선하며 암호화된 디스켓을 전달하는 것도 포착했다. 그녀는 쿠바 정보국에 대면보고 하기 위해 쿠바를 네 번이나 방문했다. 이 중 두 번은 승인된 출장이었고 두 번은 휴가 중 유럽을 경유해 가발로 변장한 채 쿠바 여권으로 비밀리에 쿠바를 방문했던 사실도 포착됐다.
 
애나가 17년간 암약하다 체포된 후 미 당국은 “미국에 가장 큰 피해를 준 스파이 중 하나”라고 밝혔다. 그녀는 수감된 지 20년 만인 2023년 1월6일에 석방되었다. 현재 67세인 그녀는 푸에르토리코에 거주하며 쿠바에 대한 미국의 제재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9.11 테러와 시기적으로 겹쳤던 탓에 그녀의 체포 사실과 스파이 행각이 미국 시민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애나는 미국 역대 최고의 반역자 중 한 명이다.
유동열  2024-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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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의 스파이 세계]<25>
이스라엘 우라늄 확보 작전 ‘암호명 플럼뱃’
 
 
1968년 11월17일 새벽 서독 함부르크 항구를 출발해 이탈리아 제노바로 향하던 라이베리아 국적의 화물선 쉬어스베르크(Scheersberg) A호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유럽 항만 당국과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 및 국제원자력기구(IAEA)에는 비상이 걸렸다. 이 배에는 원자폭탄 40여 기를 제조할 수 있는 우라늄 광석 200t이 560개의 드럼에 탑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5일 후 12월2일 쉬어스베르크 A호는 터키(튀르키예)의 이스켄데룬 항구에 나타났다. 그러나 이 배에 있던 우라늄 200t은 보이지 않았다.
 
전대미문의 핵물질 실종 사건은 9년 동안 국제 핵 관련기관과 일부 정보기관에만 국한된 세계 최고의 비밀 중 하나였다. 그러다가 1977년 4월 독일 잘츠부르크에서 열린 군축회의에서 미국 상원의 고문이었던 폴 레벤탈에 의해 이 사건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누가 이런 짓을 자행했는지는 특정되지 않았다. 결국 언론의 추적과 핵심 관계자의 증언으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Mossad)가 핵물질인 우라늄을 확보하기 위해 비밀리에 전개한 암호명 ‘플럼뱃’ 작전(The Plumbat Affair)의 일환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모사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 1978년 영국 런던에서 Elaine Davenport·Paul Eddy & Peter Gillman이 공동저술한 플럼뱃 작전에 관한 책자가 발간됐다. 필자 제공
  
1967년 제3차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 프랑스는 이스라엘에 공급해 오던 원자로용 우라늄 연료의 수출을 중단했다. 이스라엘은 1950년대부터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프랑스의 기술지원으로 네게브 사막에 1958년 디모나 원자력연구소(시몬 페레스 네게브 원자력 연구센터) 건설에 돌입하여 1963년 중수로 원자로를 완성했다. 중수로 원자로는 우라늄을 재처리를 하여 핵물질인 플루토늄을 추출하기에 용이했는데 우라늄의 공급 중단으로 이스라엘에는 비상이 걸렸다. 아랍국가에 포위당해 있던 이스라엘로서는 국가 생존의 마지막 카드로 미국 등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해 왔는데 우라늄의 공급 중단으로 핵개발 계획이 차질을 빚었기 때문이다.
 
모사드는 비밀리에 우라늄을 확보하는 작전에 돌입했다. 모사드는 서독의 중소 화학업체인 아시마라 케미라에 접근했다. 이 회사의 파트너인 술첸을 오랜 기간의 공작을 통해 포섭하여 우라늄 200t을 구입해 줄 것을 부탁했다. 술첸은 1968년 3월 벨기에 광산업체에 우라늄 광석을 주문했다. 용도는 석유화학 공정을 통해 비누를 생산하겠다는 것이었고 까다로운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의 허가를 받아내는 데도 성공했다. 문제는 선적된 우라늄을 원자력당국의 엄격한 통제를 피해 어떻게 이스라엘까지 운반하느냐 였다.
 
모사드는 공작용 화물선을 구매하기 위해 1968년 8월 라이베리아에 비스케인이라는 유령 선박회사를 설립하고 그해 9월 서독 화물선 쉬어스베르크 A호(1790t)를 구입했다. 이 배는 그해 11월15일 스페인 선원들을 새로 고용하고 화물을 탑재하기 위해 벨기에 안트베르펜으로 갔다. 여기서 플럼뱃(안전한 납)이라고 찍힌 560개 드럼을 적재했다. 드럼 속에는 옐로우케이크(yellowcake·U3O8)라고 불리는 우라늄 산화물 200t이 적재되어 있었으나 선원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다음 날 출항한 배는 제노바로 바로 가지 않고 돌연 서독 함부르크에 정박했다. 여기서 선주가 바뀌었다며 스페인 승무원을 전원 해고하고 모두 이스라엘 선원들로 대체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신고된 이스라엘 선원들의 여권은 하나같이 위조된 것이었다. 1968년 11월17일 함부르크를 출발하며 항만 당국에는 이탈리아 제노바로 간다고 신고했으나 도착일이 훨씬 지났는데도 배는 어디로 갔는지 오리무중이었다.
 
실제 쉬어스베르크 A호는 항해 7일 후 키프로스 근처 공해상에 도착해 소형 선박으로 구성된 괴(怪)선단(이스라엘 선단)과 접선한다. 짙은 어둠 속에서 소형 선박에 화물을 옮겨 실은 다음 쉬어스베르크 A호는 터키 이스켄데룬 항구에 도착했다. 당연히 200t의 우라늄은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우라늄 화물을 탑재한 소형 선박들은 약 110해리 떨어진 이스라엘의 하이파 항구에 도착했다. 이 화물은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에 위치한 드모나 원자력연구소로 옮겨졌다. 그리고 이 연구소 지하에 있는 비밀 핵연구소에서 플루토늄으로 가공되어 5년 뒤 핵폭탄으로 제조되었다.
 
유럽 당국과 핵물질의 국제운송을 통제·감시해야 할 국제원자력기구와 유럽원자력공동체는 즉각 조사에 착수했으나 사건은 점점 미궁에 빠졌다. 후에 핵물질 실종 사건에 대해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는 비공개 조사보고서를 발간했다. 
 
이를 입수한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1977년 5월 미국의 한 핵 전문가의 말을 인용하여 “옐로우케이크는 폭탄 물질이 아니라 매우 낮은 수준의 광물이다. 복잡한 재처리 과정을 거쳐야 핵무기 제조에 사용될 수 있는데, 이스라엘이 재처리에 성공하여 제한된 수의 원자폭탄을 생산하는 데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평가했다. 이후 카터 행정부는 옐로우케이크를 포함한 모든 우라늄의 수출을 중단했다.
 
▲ 영원한 비밀로 남을 뻔했던 ‘플럼뱃 작전’의 전모는 모사드 요원 댄 에어벨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필자 제공
 
이스라엘의 핵물질 확보 작전인 ‘플럼뱃’의 전모가 드러난 것은 당시 작전을 주도했던 모사드 요원 댄 에어벨(Dan Arbel·위조여권 이름)의 증언에서 비롯됐다. 그는 1973년 7월 노르웨이 릴레함메르에서 모로코 국적의 식당 종업원을 암살한 모사드 공작조(6명)의 일원이었다. 이들은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 11명을 살해한 ‘검은 9월단’을 추적하던 중 그를 검은 9월단의 한 명으로 오인하고 암살한 것이다. 노르웨이 경찰에 체포된 에어벨은 고민 끝에 노르웨이 당국에 ‘플럼뱃’ 비밀 작전 정보를 제공하고 형량 조정을 시도했다. 제공된 정보를 추적한 노르웨이 당국은 신뢰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에어벨이 쉬어스베르크 A호를 구입한 비스케인이라는 위장 회사의 대표였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그 결과 살인사건 가담자인데도 7개월 동안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 이 작전은 1978년 발간된 ‘플럼뱃 작전(The Plumbat Affair)’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스파이 세계에서 ‘영원한 비밀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격언을 다시 확인시켜 준 사례이다. 
 
유동열  2024-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