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전대협 정책위) 北 주장과 궤 같이 하는 이적단체" 안기부 “(정책위가) 전대협 배후 장악”
[이인영의 전대협 주장 검증] 대법원 판결과 공안당국 발표로 본 ‘전대협 정책위’의 실체
글 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1991년 8월 15일 전대협 소속 대학생 3000여명이 서울 퇴계로 2가에서 연좌농성하는 사이 쇠파이프로 무장한 대학생 200여명이 신세계백화점 앞에서 전경들과 대치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사
조태용 미래통합당 의원은 23일 열린 통일부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이인영 장관 후보자에게 과거 이 후보자가 몸담았던 전대협의 이적성에 대해 물었다. 이에 대해 이인영 후보자는 “전대협 전체가 이적단체 판정을 받은 것은 아니다”라며 “당시 공안당국이 특정부분만 이적단체라고 규정했다”고 반박했다.
이인영 후보자의 ‘전대협 특정부분 이적단체’ 주장은 사실 틀린 건 아니다. 1992년 대법원이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정책위원회에 대해서만 “북한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하는 이적단체”라고 판시했기 때문이다. 그해 8월 14일 대법원 3부(재판장 대법관 박우동·사건번호 92도1211)가 작성한 판결문 중 일부다.
대법원 "(전대협 정책위) 상당한 정도의 지휘체계 갖추고 있는 단체"
<전대협 정책위원회는 형식적으로는 전대협 총회 및 중앙위원회의 하부기구인 것처럼 보이나, 사실상으로 전대협의 노선과 투쟁전략 및 투쟁방향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집단으로서 형식상 전대협의 이름을 빌려 목적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상당한 정도의 지휘체계를 갖추고 있는 단체로서 그 활동노선이 북한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하는 이적단체라고 판단하여…(중략) 거기에 소론과 같이 사실오인의 위법이나 이적성 및 공동정범에 관한 법리오해 등의 위법이 없으며, 또한 이 부분 공소사실이 특정되지 않았다는 논지는 독자적인 견해에 불과하다.>
재판부는 또 전대협 정책위원회에 대해 “독자적인 조직과 지휘체계 및 임무를 갖추고 활동하는 실질적으로 독립된 단체”라고 봤다. 정책위원회가 설정했던 ‘투쟁전략’을 대법원 판결문에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전대협) 정책위원회는 그 판시와 같이 독자적인 조직과 지휘체계 및 임무를 갖추고 활동하는 실질적으로 독립된 단체이고…(중략) (정책위원회의) 투쟁전략은 남한을 미 제국주의에 예속된 신식민지로, 현 정권을 파쇼정권으로 인식하고 있는 전제하에 노동자, 농민 등 계층에 의한 민주대연합을 구축하여 반파쇼투쟁을 전개함으로써 1991.부터 1993.까지의 권력 재편기를 이용하여 현 정부를 타도하고 민중주도의 민중민주정권을 수립하여 궁극적으로는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의 변혁을 완성하고, 1995.에는 “1민족, 1국가, 2정부” 방식에 따른 연방제 통일을 완수할 것을 그 투쟁목표로 삼고, 91년도 주요 투쟁방향으로 반전, 반핵, 군축, 미군 철수, 미 대사관폐지 및 반미 자주화, 반파쇼 민주화 투쟁, 연방제 통일 방안 합의, 국가보안법 철폐 등 연방제 통일의 선결조건 성취투쟁을 들고 있는 사실…(하략).>
안기부 "(정책위가) 전대협을 배후에서 장악"
문제는 정책위원회가 전대협의 핵심이었다는 사실이다. 앞서 1991년 7월 27일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국정원의 전신)는 전대협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중 정책위원회에 관한 설명을 당시 한 언론 보도에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정책위원회는 서울 지역 주사파 비밀조직인 ‘자민통’ ‘조통그룹’ ‘관악자주파’ ‘반제청년동맹’(조직원 2000여명 규모)과 연계돼 독자적으로 위원을 선출해 총회 → 중앙위원회 → 중앙집행위원회 → 각 지역 지구대표자 협의회 → 각 대학 총학생회로 이어지는 전대협 조직 체계를 무시하고 전대협 의장 및 간부를 내정하는 등 전대협을 배후에서 장악해 왔다.>
매체는 이어 “전대협은 정책위원회가 내리는 지침에 따라 북한이 ‘구국의 소리’ 방송을 통해 발표한 ‘한민전 신년 메시지’를 모방, ‘전대협 신년 서한’을 배포했으며 ‘5·6월 사업계획’을 각 대학에 하달해 전국적인 소요를 일으키도록 했다”고 전했다.
2016년 9월 23일 자 《한겨레》 신문은 <박찬수의 NL 현대사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이란 제하의 기사에서 당시 안기부 발표에 대해 “이 발표는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틀렸다”며 “정책위가 전대협을 이끌어가는 핵심인 건 분명했다. 그러나 정책위가 모든 걸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며 다음과 같이 썼다.
<전대협에 비해 정책위는 이념 지향이 훨씬 강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학생운동권 주류인 엔엘(NL)계는 색깔이 조금씩 다른 여러 개의 활동가 조직으로 나뉘어 있었다. 안기부는 “조통그룹, 자민통, 반제청년동맹(반청), 관악자주파 등 4개 주사파 조직이 전대협을 움직였다”고 발표했다. 당시 자민통의 핵심으로 일했던 한 인사는 “89년엔 조통 그룹이 셌지만 91~92년엔 자민통이 가장 세력이 컸다. 자민통에 속한 학생 활동가들이 전국적으로 200여명에 달했다”고 말했다. 자민통은 ‘엔엘 주사파’로 분류됐다. 그러나 이 그룹에 속했던 인사는 “학교마다 북한 방송 청취팀이 자발적으로 있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북한 방송이 도움이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교조적으로 따르지 말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말하는 NL은 ‘민족해방(National Liberation)’ 주사파는 ‘김일성 주체사상파’를 뜻한다. 이상의 대법원 판결문과 안기부 수사 발표 등을 종합하면 전대협의 핵심은 정책위원회였음이 명확히 드러난다. 그런 정책위원회가 이적단체로 판시됐으므로, 전대협이 어떤 성향의 단체였는지 누구나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전대협, 임수경 방북에 관여... 임종석도 전대협 3기 의장 출신
전대협은 1987년 6월 항쟁을 전후해 결성된 최초의 전국 단위 학생운동 조직이다. 시위 참여 중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이한열의 장례 절차를 논의하기 위해 1987년 7월 5일 연세대학교에서 전국 대학의 총학생회장들이 회의를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전국적인 대학생 대중조직의 건설을 결의했다.
8월 19일 충남대학교에서 서대협(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이자 고려대 총학생회장이던 이인영 후보자를 의장으로 선출하는 1기 전대협 출범식을 가졌다. 전대협은 이전에 여러 개의 조직이었던 학생운동단체를 통합하여 통합 조직으로서 규모를 확대해 나갔다.
1989년 3기 전대협은 임수경(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인 민주통합당 전 의원)을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보내 주목을 받았다. 임수경은 제3국을 통해 방북해 북한 김일성의 환대를 받았다. 임수경은 문규현 신부와 함께 군사분계선으로 내려왔으나 곧 구속됐다. 임수경 방북을 기획·지원한 이는 문재인 정부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 임종석씨였다. 임종석 전 실장은 전대협 3기 의장으로 임수경과 함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글=조성호 월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