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평화 센터 홈페이지엔 르몽드(프랑스 신문)와 가진 김대중의 퇴임후 인터뷰 기사가 올라 있다. 2007년 4월에 한 인터뷰인데, 다시 읽어보니 그가 북한의 核에 대하여 엄청난 誤判(오판)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北核 위기를 다루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誤判이다. 그는 김정일과 만나기 위하여 현대그룹을 앞세워 核을 개발중이던 김정일에게 5억 달러의 금품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노벨 평화상 위원회는, 北의 핵개발을 사실상 도운 사람, 그리하여 한반도의 평화를 위태롭게 한 사람에게 상을 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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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6월 13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전 대통령 김정일과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 /조선DB |
북한체제, 좋든 싫든 중국의 자취 따라 변화 중
2007년 4월 15~16일자 국제면, Philippe Pons
르몽드 : 북경 6자회담의 2.13 합의를 기해, 북핵 프로그램 해체의 험난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이 결실을 맺게 되리라고 생각하는가?
김대중 전 대통령(이하 김대중) : 이번에는 성과가 있으리라고 본다. 북한과 미국은, 각국 나름대로의 이유로, 전략적 선택을 했다. 북한의 핵야욕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선택 가능성이 있다. 첫째, 군사력을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중국, 한국, 러시아뿐 아니라 일본조차도 이에 대해 반대하고 있고, 북한이 군사적 공격에 대해 저항할 경우, 한반도에서는 1950-1953 한국전쟁 이후 또다시 참혹한 재앙을 겪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한국 국민들은, 이 같은 재앙을 겪을 가능성에 대해, 확고히 반대하는 입장이다. 두 번째로는, 경제적 징계조치로 평양정권의 숨통을 죄어서 넘어뜨리는 방법이다. 그러나, 북한은 궁핍함도 견딜 수 있음을 입증해 보였다. 그리고 그 경우, 중국이 원조를 거부한 채 북한을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궁지에 몰린 평양이 군사 기술을 팔아 넘기려는 유혹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징계의 효율성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대화만이 (유효한) 선택 가능성으로 남는다.
르몽드 : 이번에는, 합의 이후 시작된 이행 과정의 결실이 맺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근거는 무엇인가?
김대중 : 부시 행정부는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과 같은 처지이다. 군사적으로 근동과 아프가니스탄에서 진창에 빠져 있는 상황이고, 평양에 대한 경제적 징계 조치들은 효과를 보지 못했으며, 이라크 전쟁은 실패했다. 부시의 정책이 평양의 핵 개발을 막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가정하면, 북한과도 실패한 것이 된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부시에게는 북핵위기 타결이 임기 기간 동안 본인의 외교적인 성공의 자취를 남길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된다. 평양 정권은, 진퇴유곡의 상황에 처한 자신들의 처지를 인식하고 있다. 북한은 에너지와 경제적 지원을 필요로 한다. 중국의 인내심도 일종의 한계에 이르렀다. 미국이 양보를 하는데도 평양이 계속 뻣뻣하게 나온다면, 북경 측은 더욱 화를 낼 것이다. 일본이나 타이완이 북한의 사례에 고무되어 핵무기를 갖추려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보면서...
르몽드 : 평양이 플루토늄 생산을 멈추고 핵무기도 포기할 태세가 되었다고 보는가?
김대중 : 미국과 국제사회가 평양정권에게 (체제) 안전보장을 충분히 해 준다면 가능하다고 본다. 평양은 정권 안전보장의 대가로 무기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입장을 늘 표방했다. 한반도 비핵화는 김일성이 바라던 바이기도 하다. 북한 사람들은 신뢰할 수가 없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그들이 성의가 있는지 테스트는 해 보아야 할 것이다.
르몽드 : 2003년 미 국무 차관보 제임스 켈리가 북한이 우라늄 농축 비밀 프로그램의 존재를 시인했다고 밝힘으로써 유발된 (2차) 북핵 위기로부터 어떠한 교훈을 얻었는가?
김대중 : 미국의 공화당은, 1994년의 북미 조약을 받아 들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공화당 측은 1994 북미조약을 무산시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고, 조지 부시가 집권하면서 이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화당 측의 태도는,) 2006년 10월, 북한이 핵실험을 하는 사태로 귀결됨으로써, 6년이라는 세월이 허비된 셈이 됐고, 평양 핵 야욕에 대한 잠금 장치(1994 북미조약)가 존재했던 그 전보다 더욱 위험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 같은 위기로부터 얻은 교훈이라면, 부시 행정부의 정책은, 핵 위기 타결의 의지보다는 북한정권 타도를 유발시키려는 의지가 더 크게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르몽드 :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에 관련해서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
김대중 : 난 제임스 캘리의 발언 내용에 매우 놀랐다. 그의 대화 상대였던 북한 대표들은, 실제로 가동되고 있는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이 존재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들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시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북한에 실제로 가동되고 있는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르몽드 : 앞으로 5년 동안 북한체제가 어떻게 변화할 것으로 보는가? 평양 측에서는 중국 모델과는 다른 자신들 고유의 모델을 따른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김대중 : 좋든 싫든, 북한체제는 중국 또는 베트남의 자취를 따라 변화해 가고 있다. 지금까지 속도는 느리지만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움직임이다.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적대감이 누그러진다면, 북한의 변화가 빨라질 것으로 확신한다. 그렇지 않으면, 변화는 좁은 보폭의 움직임으로 진행될 것이다. 대화를 하며 접촉 및 교류 기회를 확대하는 것만이 신뢰의 분위기를 만듦으로써 개방을 촉진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외부로부터 강요될 수 없다. 북한에서든 다른 어느 곳에서든.
* 김대중: 노벨 평화상 수상, 前 한국 대통령(1998-2003), 북한과의 화해 주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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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라늄 농축의 實在 부정: <김대중 : 난 제임스 캘리의 발언 내용에 매우 놀랐다. 그의 대화 상대였던 북한 대표들은, 실제로 가동되고 있는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이 존재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들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시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북한에 실제로 가동되고 있는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 발언을 당시 김정일이 읽었더라면 冷笑하였을 것이다. 북한 정권보다 더 北을 변호하고 있다. 그것도 억지로써. 아래 글에서 보듯이 북한 측은 켈리에게 분명히 우라늄 농축 사실을 인정하였다. 김대중이 존재한 적이 없다고 믿었던 그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은 2010년 북한이 미국의 헤커 박사에게 공개, 實物로도 확인되었다. 1997년 한국에 온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 비서는 안기부 조사를 받을 때 결정적 증언을 하였다. 즉 핵개발 책임자 전병호가 1996년 무렵 황장엽에게 파키스탄으로부터 우라늄 농축 기술을 도입하기로 하였다는 말을 하였다는 것이었다.
김대중은 국내외 고급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이런 어처구니 없는 誤判을 하였다. 이제 북한은 농축우라늄으로 핵폭탄을 多量 제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사태를 부른 책임의 일부는 정보판단을 잘못한 김대중 정부가 져야 한다. 국군통수권자가 敵의 전략무기 개발에 대하여 이렇게 결정적 오판을 하였는데도 안보가 이 정도나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결정적 도움 덕분이다. 그런데 그 미국에 대한 김대중의 반감은 너무나 적나라하다.
2. 反美: <김대중 : 미국의 공화당은, 1994년의 북미 조약을 받아 들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공화당 측은 1994 북미조약을 무산시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고, 조지 부시가 집권하면서 이에 성공했다.>
여기서도 김대중은 결정적 誤認을 하고 있다. 1994년의 제네바 합의를 깬 것은 북한이지 부시의 공화당 정권이 아니다. 북한이 제네바 합의를 어기고 우라늄 농축을 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미국에 의하여 발각되었고, 증거를 들이대자 북한정권이 違約(위약)을 시인함으로써 깨진 것이다. 김대중은 도둑을 편들고 형사를 욕하고 있는 셈이다.
3. 악마의 대변인: <평양은 정권 안전보장의 대가로 무기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입장을 늘 표방했다. 한반도 비핵화는 김일성이 바라던 바이기도 하다.>
북한정권의 안전을 누가 위협했나? 미국과 한국이 가만히 있는 북한을 봉쇄하고 공격한 적이 있나? 핵무기를 개발하고 비핵화 약속도 어기니까 경제제재를 한 정도이다. 북한정권은 한미동맹 해체 및 주한미군 철수와 핵무기를 바꿀지 모르지만(바꾼 뒤엔 또 만들 것이다), 그것은 남한 공산화를 위한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런 안전보장은 북한을 위한 것이고, 대한민국의 안전을 파괴하는 利敵행위이다. 김대중과 김정일은 평양에서 만나 주한미군 중립화(무력화)에 합의한 적이 있는데, 이를 '안전보장'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이 인터뷰는 김대중 정부가 핵개발에 관하여 미국의 정확한 정보를 不信하고, 북한정권의 거짓말을 믿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자료이다. 고의로 그렇게 하였다면 명백한 利敵행위로서 생존하고 있는 관련자들은 수사 대상이고, 속아서 그렇게 하였다면 지금이라도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국정원장 시절 대북(對北) 불법송금 사건에 가담, 김정일의 해외비자금 계좌로 현대그룹이 조성한 수억 달러를 보내도록 시켰던 임동원씨는 수년 전 자신의 회고록에서, “미국이 핵 의혹을 조작, 제네바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였다”는 주장을 한 적이 있다. 김대중이 르몽드와 인터뷰할 때 한 말과 같다.
존 볼튼은 미국 부시 정부 시절 국무부의 군축 담당 차관보 및 유엔대사를 지냈다. 2006년 10월9일 북한이 제1차 핵실험을 하자 유엔 안보리의 對北제재를 이끌어 낸 사람이다. 사치품의 對北수출을 금지시키면서 그가 한 말은 “김정일도 다이어트가 필요하다”였다.
그는 2007년11월 《항복은 선택이 아니다》란 제목의 회고록을 썼다. 2002년 가을, 北의 불법적 우라늄 농축에 대한 미국 정부의 정책수립 과정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미국 정보기관은 이해 여름 북한이 파키스탄의 핵개발 책임자 A. Q 칸 박사의 도움을 받아 우라늄 농축을 추진하고 있다는 확증(確證)을 잡았다. 2002년 10월 3일, 이 증거를 가지고 방북(訪北)한 켈리 국무부 차관보의 추궁에 북한의 외교부 부상(副相) 김계관은 “반북(反北)세력의 조작”이라고 반박하였다. 다음 날 강석주 제1부상은 켈리 특사에게 폭탄선언을 하였다. 그 요지는 북한이 우라늄 농축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이는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惡)의 축(軸)’이라 부른 데 대한 직접적인 조치라는 것이었다.
강석주는 미리 정리한 내용을 읽어 가면서 “이는 당(黨)과 정부의 입장에 의거한 것이다”고 몇 차례 강조하였다. 그 자리에 참석한 미국 관리 8명은 대화록의 정확성을 확인한 뒤 워싱턴으로 보고하였다. 나중에 한국과 미국에선 북한정권이 자신들의 불법활동을 인정할 리가 없다면서 이는 통역의 잘못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쓸모 있는 바보들’이 등장한다.
2010년에 작고한 황장엽(黃長燁) 선생의 생전(生前) 증언이 있다. 1994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미국과 한국과 북한 등이 영변 핵시설의 가동 중단과 그 대가(代價)로 경수로 건설 제공에 합의한 직후 평양 심장부에서는 이런 대화가 오고갔다고 한다.
<강석주(북한측 대표): 과거의 핵개발이 걱정이었는데 그건 미국의 갈루치가 덮어 주기로 하여 해결이 되었습니다.
황장엽: 5년쯤 지나면 과거 핵개발을 미국이 사찰하겠다고 할 터인데 어떡하지요.
강석주: 그건 지도자 동지와 토론했습니다. 그때 가서는 우리가 다른 걸 가지고 나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
전병호(무기개발 담당 책임 비서가 황장엽 비서에게): 핵 폐기물을 땅에 파묻어 놓았는데 그 위에 아무리 나무를 심어도 말라 죽어 버립니다. 그 근처에만 가도 계기판이 작동해서 숨기기가 참 어렵습니다. 러시아에서 플루토늄을 더 들여와야 하는데 아쉽습니다. 좀 도와주실 수 없습니까?>
1996년에 전병호는 황장엽 선생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해결이 되었습니다. 파키스탄에서 우라늄 농축 기자재를 수입할 수 있게 합의되었습니다.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북한정권은 1994년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기로 한 제네바 협정을 맺을 때부터 다른 카드를 준비 중이었다. 北은 우라늄 농축 방식의 핵개발을 추진하면서 파키스탄의 핵개발 아버지로 불리는 칸 박사로부터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미국의 압력을 받은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정권은 국민적 영웅인 칸 박사를 가택 연금시켰다. 그에게 북한, 리비아 등에 파키스탄의 핵개발 기술을 팔아넘긴 책임을 씌웠는데, 그런 거래는 파키스탄 군부(軍部)의 양해나 지시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칸 박사의 진술과 관련된 정보가 많이 새 나갔다. 칸은 파키스탄 조사관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진술을 했고 이 정보는 미국으로 넘어가 관련국 사이에서 공유되었다.
“북한과 우라늄 농축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말이지만 실제로 거래가 진행된 것은 1990년대 후반이다. 나는 북에 우라늄 원심분리기 설계도와 몇 개의 분리기를 제공하였다. 농축 시설을 만드는 데 필요한 부품의 쇼핑 리스트도 주었다. 1999년에 북한을 방문하였을 때는 나에게 핵폭탄 세 개를 보여주었다. 평양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산속이었다. 완성된 플루토늄 폭탄이었다.”
칸의 이야기는, 황장엽 선생이 한국에 온 뒤 털어놓은 정보의 정확성을 입증한 셈이다. 황 선생을 관리하고 있던 국정원도 이 정보를 확보하였을 것이다. 국정원장을 지낸 임동원은 그럼에도 미국이 北의 核 의혹을 조작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소위 햇볕정책의 실무책임자였던 임동원은 회고록에서 “미국이 핵 의혹을 조작, 제네바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하였다”고 주장하였고 김대중도 르몽드 인터뷰에서 같은 맥락의 말을 하였다.
켈리 팀은 평양에서 서울로 와서 한국 측에 방북 결과를 설명하였다. 임동원은 설명을 들은 뒤 이렇게 말하였다는 것이다.
“북한사람들의 과장되고 격앙된 발언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 우린들 핵무기를 가질 수 없느냐’는 식의 표현이 고농축 우라늄 계획을 시인하는 것인지, 핵무기를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것인지 모호하다. 북한은 최고 당국자와의 회담을 통하여 일괄타결을 바라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미국의 네오콘 강경파들이 불순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이 첩보를 과장 왜곡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북한 측이 명백하게 우라늄 농축 추진 사실을 인정하였는데도 임동원은 미국을 의심하고 김정일 정권을 감쌌다.
이런 임동원에 대하여 존 볼튼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진짜 북한정권 변명가’(real DPRK apologist)라는 경멸적 표현을 했다. ‘apologist’는 변명(辨明)을 대신 해 주는 이를 가리킨다. ‘변호’와 ‘변명’은 어감(語感)이 다르다. 변호는 억울한 사람을 위하여 하는 것이고, ‘변명’은 ‘잘못에 대하여 구실을 대는 것’이다.
북한정권은 2010년 미국 전문가에게 영변에 있는 우라늄 농축 시설까지 공개하였다. 한국과 미국 정부는 이것 말고도 지하에 적어도 하나 이상의 농축 시설을 갖고 있으며 농축된 우라늄으로 매년 1~2개의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고 본다. 임동원이 고의든 실수든 정보판단을 엉터리로 했다는 이야기이다. 김대중의 생각을 반영한 행동인지, 그 자신이 김대중을 오판으로 몰고 갔는지는 더 알아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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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17일 개성공단 종합지원센터 옆 북측 개성공단 총국사무소에서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이 마중 나온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겸 대남담당 비서와 악수하고 있다. /조선DB |
林東源의 正體
국정원이 2013년에 공개한 노무현-김정일 대화록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김정일 : 오늘 아주 수고 많았습니다. 정열적으로 많이 이야기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임동원 선생 건강하지요?
김만복 : 예 건강합니다.>
김정일이 安否(안부)를 물은 임동원 전 국정원장의 正體에 대하여 前 합참의장이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다.
2012년 12월5일 부산역 광장에서 국민행동본부 주최로 열린 NLL 반역 규탄 집회 때 연사로 나온 金辰浩(김진호) 전 합참의장은 林東源(임동원) 전 국정원장의 세 가지 수상한 행적을 폭로하였다.
<첫 번째로 그는 정책간담회에서 ‘북한이 군사력을 증강하는 이유는 주한미군의 戰力이 강하기 때문에 그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어력 보강이므로 駐韓(주한)미군을 UN평화유지군으로 역할변경 시켜야 된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휴전 이후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유지는, 우리 군과 주한미군의 군사력이 결합된 韓美연합에 의해 북한이 전쟁을 도발치 못하도록 전쟁억제력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외교안보수석이라는 사람이 주한미군의 무장을 해체시키는 PKO(평화유지군)로의 역할변경 논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북한이 주장하는 주한미군 철수와 같은 주장이었습니다.>
임동원 당시 청와대 안보 수석 비서관은 1998년 무렵에 이미 북한군의 입장에 서서 주한미군을 對北억지戰力이 아니라 평화유지군으로 無力化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냈다는 뜻이다. 이런 구상은 2000년 김대중-김정일 회담을 통하여 密約으로 굳어진다. 김대중은 이 사실을 숨기고 국민들에게 지금의 주한미군 주둔을 김정일이 양해하였다고 허위 보고하였다.
두번째 수상한 점에 대하여 김진호 예비역 대장은 이렇게 설명하였다.
<1998년 6월 북한의 잠수정이 동해안에 침투 후 북상하다 우리 漁網(어망)에 걸려 우리 해군이 잠수정을 나포 예인했습니다. 그때 청와대에서는 북한의 잠수정이 “훈련 중 기관고장으로 표류했을 가능성” 등을 언론에 거론하며 대응을 자제하도록 군에 요구했었으나 우리 군은 영해침범으로 규정하고 잠수정을 나포, 예인했습니다. 이때 잠수정 내의 북한 승무원 9명이 모두 自爆을 했었습니다. 북한은 이를 두고 ‘훈련 중 기관고장으로 표류한 잠수정을 남한군이 인도적 구조활동을 하지 않아 북한군이 희생 되었다’며 그들의 對南공작 활동을 우리에게 책임을 덮어씌웠습니다.
원래 잠수정은 해저를 통해 은밀히 침투하는 공격용 무기입니다. 북한 잠수정이 우리의 영해에 침범한 ‘잠수정 침투사건’인데 북한군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임동원의 思想(사상)의 배경은 무엇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입니다.>
'제 정신인가 분노.'
金 전 합참의장은 <셋째는 1999년 6월15일, 제1차 연평해전이 있고 나서의 사건입니다>고 했다.
<1999년 6월6일 서해 NLL 북방한계선 일대에서 꽃게잡이를 한다는 명분으로 NLL을 침범하기 시작한 북한의 경비정은 우리의 수 차례에 걸친 경고조치에도 불구하고 10여 일간 연일 NLL을 침범하였습니다. 6월15일, NLL을 넘어오는 북한경비정의 배꼬리를 우리 해군이 뱃머리로 들이받아 뱃몸으로 밀어내기를 하는 과정에서 북한군이 우리 경비정에 선제포격을 가해왔고 이에 우리 해군이 즉각 응사, 敵 경비정 1척을 격침시키고 어뢰정 1척을 반 침몰시키는 작전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작전의 결과로 우리 해군은 경미한 배 파손과 6명의 경상자가 발생한 반면 북한군은 30명 이상의 사망, 실종자와 경비정 1척 침몰, 경비정 4~5척 대파 및 어뢰정 반 침몰 등 참담한 패배를 당했습니다. 우리 군에는 1953년도 휴전 이래 남북 정규군 간에 벌어진 전투에서 가장 완벽하게 승리한 전투 사례로 기록되는 작전이었습니다.
이 제1차 연평해전으로 인해 局地戰이 전면전으로 비화 될 수도 있다는 판단 아래 미국과 긴밀한 협조를 하고 북한의 전쟁도발 의지를 말살하기 위해 미국의 항공모함을 포함한 핵잠수함의 한반도 戰力전개를 연합사령관과 제가 합의하고 이를 공표하는 등 사태를 진정시켜 나가는 중 뜻밖의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장이던 통일부 장관 임동원이 합참의 서해 연평해전 작전 경과보고를 받으면서 “우리 군이 꼭 그렇게(대응사격으로 敵 경비정을 침몰시킨 것)뿐이 할 수 없었는가?”라고 질책하는 투의 질문을 했었습니다.
敵이 NLL을 침범하고 이를 저지하는 우리 경비정을 향해 선제공격하여 우리 장병이 부상당하고 배가 파손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자위권 발동을 위해 대응사격을 한 것인데 “그렇게 뿐이 할 수 없었냐?”라면 우리가 敵의 공격으로 격침이라도 당해야 했단 말입니까? 국가 안보의 최고 책임자인 NSC 사무처장의 직위에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입니까? 제 정신인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利敵행위가 역력'
김진호 장군은 전 국정원장을 利敵행위자라고 규정하였다.
<지금까지 열거한, 함께 공직에 몸담았을 당시의 임동원의 행적을 보면 북한을 이롭게 하려는 利敵(이적)행위가 역력합니다. 더욱이 ‘한반도평화포럼’의 또 다른 공동대표인 백낙청이라는 사람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反체제의 대표적 인사였던 김지하 시인이 12월4일자 조선일보 특별기고문에서 “깡통 빨갱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적행위를 해온 자와 ‘깡통 빨갱이’가 주도하고 있는 ‘한반도평화포럼’의 천안함 재조사 요구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명백하다고 봅니다.>
조갑제닷컴은 김진호 장군의 이런 주장에 대하여 임동원 씨의 반론이나 설명을 들으려고 연락을 취하였으나 응답이 없었다. 임동원 씨는 국정원장이던 시절 현대그룹이 조성한 2억 달러의 불법자금을, 국정원을 시켜 김정일의 해외 비자금 계좌로 보내게 한 사람이다. 김대중-김정일 사이의 주한미군 중립화 密約에도 깊이 간여하였다. 김정일은 그런 사람의 건강을 물은 것이다.
국군포로송환요구를 '냉전수구세력의 방해'라고 표현
햇볕정책의 핵심 집행자 중 한 사람이고 對北불법송금 사건에도 일정한 책임이 있는 林東源(임동원) 전 국정원장이 수년 전 '피스메이커'라는 회고록을 썼다. 중앙books에서 나온 이 책의 474 페이지엔 이런 대목이 있다.
<(2000년) 8.15 이산가족 교환방문 후 9월 초 우리 정부는 화해의 상징으로, 북한에 돌아가기를 원하는 비전향장기수 63명 전원을 판문점을 통해 무조건 송환했다. 분단 피해자들의 인권을 존중하겠다는 우리 정부의 성숙한 자세를 과시한 것이다.
당연히 냉전수구세력의 송환반대와 방해가 극심했는데, 이들은 '가치관의 혼란 우려' '북측의 체제선전에 이용당할 우려' 등을 들먹이며 '탈북자 및 국군포로 문제와 연계시켜야 한다'는 논리로 송환 반대 여론을 조성했다. 7년 전 이인모 노인을 비롯한 비전향장기수 송환을 반대할 때 들고나온 논리를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씨의 용어선택에 문제가 있다. 63명은 비전향 장기수이기도 했지만 북한정권을 위해 복무한 간첩과 빨치산 등이었다. 양심수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이었다. '화해의 상징'이란 말도 맞지 않다. 간첩과 빨치산으로부터 피해를 당한 것은 한국과 국민이다. 가해자는 이들과 북한정권이다. 화해는 가해자가 사과함으로써 시작된다. 피해자가 가해자한테 서비스하는 것은 화해가 아니라 굴종이다. '화해의 상징'이 아니라 '굴종의 상징'이란 말이 정확할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분단 피해자들의 인권을 존중하겠다면 분단 피해자들이 누구인지 定義할 필요가 있다. 임씨는 간첩질과 빨치산 행위를 하여 조국을 뒤엎고 적화혁명을 하려 했던 반역자들을 '분단 피해자'로 보고 있다. 이는 북한정권이나 남한 좌익들의 시각과 비슷하다. 정상적인 국민들중 간첩과 빨치산들을 '분단의 피해자'로 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건전한 국민들은 6·25 납북자들, 휴전 이후의 납북어부들,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들을 북한정권의 피해자로 본다. 임씨는 이들의 인권을 생각하는 정상적인 가치관의 소우자들을 '냉전수구세력'이라고 호칭했다. 그는, 간첩 빨치산을 북송하려면 국군포로를 송환받아야 한다는 당연한 주장을 한 국민을 '냉전수구세력'으로 매도한 것이다. 이런 용어사용법은 북한정권이나 남한좌익과 일치한다.
간첩은 동정하고, 국군포로는 외면하고
한편, 납북자와 국군포로 등 自國民의 인권을 외면하고 범죄를 저지른 공산주의자의 인권을 챙겨주는 행위를 임씨는 '인권을 존중하는 성숙한 자세'라고 정의했다. 임동원씨가 '냉전수구세력'이라고 매도한 국민들은 자유와 헌법을 소중하게 여긴다. 임씨는 이들에게 냉소적인, 아주 감정적 표현을 했다. '들먹이며' '방해가 극심' '고스란히 반복'이라는 말이다. 특히 '들먹이며'라는 단어는 비아냥거릴 때 쓰는 말이다. 북한이 불법으로 억류하고 있는 국군포로들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애국자들을 비아냥거리고 있는 사람이 체제수호 기관의 책임자였다! 좌익들이 쓰는 용어로써 애국자를 비난한 사람이 對共정보수사기관인 국정원의 원장이었다!!
김대중 정부가 북송한 63명 중엔 일본인을 납치해갔던 辛光洙라는 거물 공작원도 있었다. 일본 정부는 2002년에 그 2년 전에 북송된 辛光洙를 인터폴을 통하여 국제수배했다. 신광수는 일본인을 납치한 범인임이 밝혀진 유일한 경우이다. 신광수는 안기부 조사에서 김정일로부터 직접 납치 지령을 받았다고 자백했었다. 따라서 김대중 정부가 신광수를 일본으로 넘기지 않고 김정일 품안으로 보내준 것은 결과적으로 김정일의 범행 物證(물증)을 인멸한 셈이다. 김대중, 임동원씨가 양심이 있다면 납치범 신광수를 보내주면서 납치된 일본인을 돌려 달라고 하든지 生死라도 확인해달라고 요구했어야 했다. 이는 인간의 기본적 윤리가 아닌가?
임동원씨가 국정원장 시절이던 2000년 6월 모 국정원 직원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김정일의 해외비자금 계좌로 거액의 不法자금을 보냈다. 간첩 잡는 기관을 간첩을 위한 봉사기관으로 전락시킨 임동원씨는 국정원 불법도청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기소되었고,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던 사람이다. 그는 2007년 연말, 대법원에 상고했다가 갑자기 상고를 취하한 지 나흘만에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 의하여 사면복권되었다.
미국이 北의 核의혹 조작했다고 조작한 임동원
북한당국은 2009년 9월 핵폭탄 제조를 위한 우라늄 농축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고 플루토늄을 무기용으로 재처리중이라고 유엔 안보리 의장에게 통고하였다. 2010년엔 미국 전문가 팀을 초청, 영변의 우라늄 농축시설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임동원 씨는 뭐라고 했던가?
<부시 대통령은 북을 '악의 축'이요 '선제핵공격'의 대상이라며 위협하고, 핵의혹을 조작해 제네바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미국은 국제기구까지 동원해 북측을 압박하고, 쌍무회담을 기피하며 북한이 핵문제의 국제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런 워싱턴의 네오콘들의 방해책동에 맞서 우리 민족은 힘을 합쳐 지뢰를 제거하고 '평화회랑' 건설을 위해 매진했던 일을 이제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위의 글을 쓴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십중팔구 북한정권의 선전원이든지 조총련이나 從北좌익 인사일 것이라 대답할 것이다. 우선 용어가 정상적인 한국인이 쓸 수 없는 것이다. '네오콘들의 방해책동' '핵의혹 조작' 등등의 용어에선 좌익 운동권 냄새가 난다.
이 글의 필자는 국정원장, 통일부 장관을 지내고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에도 세종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했던 林東源(임동원)씨이다. 이 글은 '피스메이커'라는 그의 회고록에 실려 있다. 세종재단은 日海(일해)재단의 후신이다. 日海재단은 김정일이 지령한 아웅산 테러로 죽은 17명의 엘리트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성금을 모아 만든 재단이다. 그 재단 이사회가, 사사건건 김정일을 칭찬하고 그의 정책을 옹호하며 미국을 공격하는 林씨를 이사장으로 뽑은 것은 노무현 정권 시절이었다.
미국이 핵의혹을 조작했다는 주장은 조작이고 악질적인 모함이다. 파키스탄 무샤라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파키스탄의 핵기술자 칸 박사가 북한에 우라늄 농축기술과 장비를 넘겨주었다고 시인했다. 북한의 우라늄 농축에 의한 핵무기 개발 계획이 발각됨으로써 제네바 협정이 파기된 것이지 미국이 核의혹을 조작하여 일방적으로 폐기했다는 주장은 엄청난 거짓 선동이다. 더구나 임동원씨가 그렇게 비호하여준 그 북한당국이 스스로 우라늄 농축 시설을 공개, 임동원 씨를 우습게 만들었다. 그가가 인간으로서, 公職者(공직자)로서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회고록을 회수하였어야 했다.
그의 회고록중 <이런 워싱턴의 네오콘들의 방해책동에 맞서 우리 민족은 힘을 합쳐 지뢰를 제거하고 '평화회랑' 건설을 위해 매진했던...>이란 대목의 의미는 김대중과 김정일 정권이 反美공조했다는 뜻이다. 敵軍(적군)과 손 잡고 동맹국을 반대하였다고 자랑하고 있는 셈이다. 林씨는 이를 '우리 민족은 힘을 합쳐'라고 표현했다. 수백만 同族(동족)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김정일 정권이 민족반역자인가, '우리 민족'인가? 민족반역자와 손을 잡는 것은 민족공조인가 민족반역공조인가? 임동원 씨가 지금도 공개적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한국이 彼我(피아)식별 기능과 응징력이 마비된 나라임을 증명한다. 이런 사람이니까 김정일이 노무현을 만난 자리에서 안부를 물은 것 같다.
-조선닷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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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허위신고하겠다는 김계관에게, "현명하게 잘하셨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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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조선일보 DB |
<2007년 2월13일, 6자회담은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조치 합의’(2·13 합의)에 따라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폐쇄·봉인, IAEA 감시·검증요원의 영변 복귀, 對北 중유 5만 톤 제공 등이 마무리되면서 초기조치가 완료되었다. 초기조치 완료에 따라 6자회담 참가국들은 2007년 9월 27일~30일간 중국 베이징에서 제6차 6자회담 2단계 회의를 개최하여 ‘9·19 공동성명’ 이행의 다음 단계 진입을 위한 논의를 진행하였다. 이 회담에서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제2단계 조치 합의(10·3 합의)’ 가 도출되었고 10월3일 6자회담 참가국들에 의해 최종 승인 되면서 6자회담 과정은 비핵화 2단계에 진입하게 되었다.
‘10·3 합의’ 주요 내용
① 모든 북한 핵시설 연말까지 불능화
② 모든 북한 핵 프로그램 연말까지 신고
③ 북한 핵 물질·기술·노하우 이전 금지
④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 과정 개시
⑤ 대 적성국 교역법 적용 종료 추진
⑥ 미·북, 일·북 관계정상화 노력
⑦ 중유 100만 톤 상당 경제·에너지 지원
‘2007년 2월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조치 합 의’(2·13 합의)에 따라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폐쇄·봉인, IAEA 감시·검증요원의 영변 복귀, 대북 중유 5만 톤 제공 등이 마 무리되면서 초기조치가 완료되었다. 초기조치 완료에 따라 6 자회담 참가국들은 2007년 9월 27일~30일간 중국 베이징에 서 제6차 6자회담 2단계 회의를 개최하여 ‘9·19 공동성명’ 이 행의 다음 단계 진입을 위한 논의를 진행하였다. 이 회담에서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제2단계 조치 합의(10·3 합의)’ 가 도출되었고 10월 3일 6자회담 참가국들에 의해 최종 승인 되면서 6자회담 과정은 비핵화 2단계에 진입하게 되었다.>
이 합의의 핵심은 <모든 북한 핵 프로그램 연말까지 신고>였다. 이날 노무현 대통령은 평양에서 김정일을 만나고 있었다. 김정일은 북한의 6자 회담 대표 김계관을 불러 합의 사항을 설명하도록 하였다. 공개된 '김정일-노무현 회담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김계관(북한 외무성 부상): 신고에서는 우리가 핵계획, 핵물질, 핵시설 다 신고합니다. 그러나 핵물질 신고에서는 무기화된 정형은 신고 안 합니다. 왜? 미국하고 우리하고는 교전상황에 있기 때문에 적대상황에 있는 미국에다가 무기 상황을 신고하는 것이 어디 있갔는가. 우리 안한다.
-모든 핵프로그램을 다 신고한다고 약속한 북한이 대한민국 대통령 앞에서 핵폭탄과 관련된 핵물질은 신고하지 않겠다고, 즉 핵심적인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盧 대통령의 반응이 놀랍다.
*노무현 대통령: 수고하셨습니다. 현명하게 하셨고, 잘하셨구요. 나는 공개적으로 핵문제는 6자회담에서 서로 협력한다. 이것이 원칙이다. 그러니까 6자회담 바깥에서 핵문제가 풀릴 일은, 따로 다뤄질 일은 없습니다. 단지 남북간에 비핵화 합의 원칙만 한번 더 확인하고, 실질적으로 풀어나가는 과정은 6자회담에서 같이 풀어나가자 이렇게 갈거니까요.
북한이 무기화된 핵물질은 신고하지 않는다고 억지를 부려도 노무현은 따지지 않고 오히려 '현명하게 하셨다'고 칭찬한다. 형사 앞에서 도둑이 '훔친 장물을 어디 팔았는지는 진술할 수 없습니다'고 해도 형사가 '현명하십니다'고 칭찬하는 꼴이다.
김정일 앞에서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핵문제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국정원 공개 노무현-김정일 대화록).
“그동안 해외를 다니면서 50회 넘는 정상회담을 했습니다만 그동안 외국 정상들의 북측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 나는 북측의 대변인 노릇 또는 변호인 노릇을 했고 때로는 얼굴을 붉혔던 일도 있습니다.(중략).주적 용어 없애 버렸습니다. 작전통수권 환수하고 있지 않습니까…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에 외국군대가 있는 것은 나라 체면이 아니다… 보내지 않았습니까… 보냈고요… 나갑니다. 2011년 되면… 그래서 자꾸 너희들 뭐하냐 이렇게만 보시지 마시고요. 점진적으로 달라지고 있구나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작계 5029라는 것을 미측이 만들어 가지고 우리에게 거는데… 그거 지금 못한다… 이렇게 해서 없애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2012년 되면 작전통제권을 우리가 단독으로 행사하게 됩니다. 남측에 가서 핵문제 확실하게 이야기하고 와라 주문이 많죠. 그런데 그것은 되도록 가서 판을 깨고… 판 깨지기를 바라는 사람의 주장 아니겠습니까? (중략). 나는 지난 5년 동안 북핵문제를 둘러싼 북측의 입장을 가지고 미국하고 싸워왔고, 국제무대에서 북측의 입장을 변호해 왔습니다.”
-北核문제와 관련하여 敵의 입장에 서서 동맹국과 싸우고 국제사회에서 敵의 변호인 노릇을 했다는 노무현의 고백은 敵의 핵개발 비호, 즉 利敵旣遂(이적기수)의 증거이다. 그 利敵행위의 결과 敵은 수십 개의 핵폭탄을 보유,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敵의 핵개발을 저지하려면 동맹국인 미국과 긴밀하게 협조해야 하는데 敵의 입장을 가지고 미국과 싸웠다는 것은 반역을 했다는 자백에 다름 아니다. 핵무장하지 않은 나라의 국군통수권자가 핵무장한 敵을 위하여 동맹국과 싸웠다고 敵將 앞에서 자랑한 것은 利敵을 넘어 정신의 정상성을 의심하게 한다. 로버트 게이츠 당시 미 국방장관이 그 직후인 2007년 11월에 노무현을 만났다. 김정일을 만나고 온 한 달 뒤였다. 게이츠 전 장관이 쓴 회고록에 의하면 盧 당시 대통령은 게이츠에게 '아시아의 가장 큰 안보 위협은 미국과 일본이다'고 말하더라고 한다. 게이츠는 '나는 그가 반미주의자라고 결론내렸고 약간 돌았다고 생각했다'고 썼다.
노무현은 사실상 김정일의 핵무장을 도왔다. 시간과 돈과 물자를 주고, 방패까지 되어 주었다. 비유하면, 냉전 시절에 미국 대통령이 동맹국을 무시하고, 소련의 핵개발을 지원한 것보다 더 황당한 이야기이다. 적어도 미국은 핵무장 국가였다.
10월3일의 합의는 북한이 <모든 핵 프로그램 신고> 의무를 지키지 않아 이듬 해 파탄이 났다. 북한은 농축우라늄과 핵폭탄 제조에 들어간 핵물질을 빼고 플루토늄만 신고하여 미국 등과 갈등을 빚다가 2009년 제2차 핵실험으로 판을 깼다. 노무현 대통령이 '현명하게 잘하셨다'고 칭찬한 행패의 뒷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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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核·미사일 개발의 배후 서상국의 실체
소련 유학파로 김일성大에서 물리학 가르쳐
⊙ 1998년 조선중앙통신, 김정일이 김일성상과 노력영웅 칭호 수여했다고 보도
⊙ 북한 핵개발은 도상록→이승기→서상국으로 이어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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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27일 북한이 영변 5MW 원자로의 냉각탑을 폭파하고 있다. 북한은 2007년 10·3 합의에서 ‘영변의 5MW 실험용 원자로, 재처리시설(방사화학실험실) 및 핵연료봉 제조시설의 불능화’를 하기로 하고, 이 조치의 일환으로 미국의 CNN방송 등이 중계하는 가운데 냉각탑을 폭파했다. |
얼마 전 북한의 고위 탈북자가 이런 얘기를 꺼냈다. 또 다른 고위 탈북자 역시 위의 얘기가 사실이라고 확인했다. 이 탈북자는 김일성종합대학에 재학 중이던 때 서상국 박사로부터 직접 수업을 들었다고 한다.
복수의 관계자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수소탄(수소폭탄)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통신은 지난 2015년 12월 10일, 김정은이 최근 평양의 평천혁명사적지를 시찰하면서 “우리 조국은 자위의 핵탄, 수소탄의 거대한 폭음을 울릴 수 있는 강대한 핵 보유국이 됐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수소폭탄’은 핵융합을 활용한 것으로 보통 원자폭탄에 비해 수십 수백 배의 위력을 가진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했다. 미국 역시 북한의 주장에 대해 의구심을 드러냈다. 조니 어니스트 백악관 대변인은 “현 시점에서 접근 가능한 정보는 그런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다”고 말했다. 북한이 핵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한 것은 지난 2013년 2월이다. 당시 해외 언론들은 ‘북한의 핵실험이 성공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10여 개월 만에 북한은 업그레이드된 ‘수소탄’ 얘기를 들고 나왔다.
이번 발언이 특정한 의도를 가진 북한의 ‘블러핑’이라고 쳐도, 북한이 그동안 끊임없이 핵개발에 목을 매 온 점, 그리고 핵개발을 주도하고 있는 영민한 두뇌를 가진 누군가가 세대에 걸쳐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북한은 핵개발 3세대를 거쳐 4세대를 준비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20대 때 소련에서 박사학위 받은 천재 물리학자
오늘날 북한의 핵 및 미사일 발사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서상국 박사는 천재 물리학자로 전해지고 있다. 나이는 70살 전후다. 서 박사로부터 직접 수업을 들은 한 고위 탈북자의 얘기다.
“제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수업을 들었을 때가 22~23살이었습니다(현재 50대 중반). 그때 서상국 박사가 40대 중·후반 정도였으니, 지금 70살 전후일 겁니다. 김일성종합대학 물리학부를 맡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서상국 박사를 두고 천재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김일성종합대학에 워낙 특출한 선생들이 많지만 서 박사는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게 머리가 좋았습니다. 소련에서 유학생활을 했는데, 박사 학위를 받았을 때 나이가 서른이 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소련 사람들을 제치고 최우수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고요. 사람이 워낙 머리가 좋고 전문지식이 해박해서 소련에서 북한으로 되돌려보내지 않으려고 미인계까지 썼다고 했습니다. 북한 보위부가 이 모습을 보고 바로 북한으로 불러들였다고 합니다.”
—수업을 들을 때 어떻던가요.
“키도 훤칠하게 크고, 얼굴도 갸름하니 잘생긴 것으로 기억합니다. 학식이 뛰어나고,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습니다. 당시 김일성종합대학에 서 박사 얘기는 늘 화제였습니다. 서 박사가 소련에 유학할 때, 교수가 칠판에 문제를 쓰고 학생들에게 풀라고 했답니다. 소련으로 유학을 온 동구권 나라 애들이 열심히 풀기 시작했는데, 서 박사는 칠판을 빤히 쳐다보고 팔짱만 끼고 가만히 앉아 있더랍니다. 교수가 ‘왜 문제를 풀지 않느냐’고 했더니 ‘가치 없는 문제다. 틀린 문제를 내 놓고 왜 풀라고 하느냐’고 해 교수가 깜짝 놀랐답니다.”
—소련에서 미인계까지 쓸 정도면 대단한 인재였던 모양이군요.
“소련에 유학할 때 좀 흔들흔들했나 봅니다. (사상적으로) 단호했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소련에서 계속 설득을 했다는 것으로 봐서는 ‘잘하면 주저앉힐 수 있겠다’ 싶을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요즘도 활동하고 있을까요.
“저는 북한이 행하고 있는 모든 핵실험과 핵개발, 미사일개발 등의 모든 배후에 서상국 박사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1998년 서상국 박사에 대해 소개를 한 적이 있다. 그 소개에는 물론 ‘핵개발’과 관련된 언급이 없다. 통신의 내용이다.
“서씨가 지난 30여 년간 후대교육사업과 과학연구사업을 벌이면서 ‘양자역학’, ‘소립자이론’ 등 40여 편의 저서와 100여 건의 가치 있는 소논문을 집필했다. 8명의 박사와 20여 명의 학사(석사)를 키워 냈다. 김정일 위원장에 따르면, 서씨는 후대교육사업과 기초과학을 발전시키고 최신과학 분야를 개척하는 데 이룩한 성과를 높이 평가해 ‘김일성상’과 노력영웅 칭호를 비롯한 국가표창을 수여하도록 배려했다. 대회와 행사에 불러 수령님(김일성)을 모시고 기념사진을 찍는 영광을 안겨 줬다”
도상록-이승기-서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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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정은이 2015년 12월 개보수를 끝낸 평양 평천혁명사적지를 시찰했다고 북한 《로동신문》이 보도했다. 김정은은 이 자리에서 “우리 조국은 자위의 핵탄, 수소탄(수소폭탄)의 거대한 폭음을 울릴 수 있는 강대한 핵보유국으로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
일본 도쿄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개성 송도중학교에서 물리교사로 지냈던 도상록씨는 〈헬륨화 수소이온에 대한 양자역학적 취급〉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국제 학계에 이름을 알렸다. 그는 광복 후 서울대학에서 교편을 잡을 예정이었으나, 김일성의 자필 초대장을 받고 1946년 5월 월북했다. 그는 이후 김일성종합대학 창립준비위원회에서 일을 시작했고, 개교(1946년) 이후에 물리학부 초대 학부장, 물리강좌장, 핵물리강좌장 등을 역임했다.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은 도씨에 대해 ‘핵구조이론, 양자역학, 원자로물리 등 교과서와 참고서 30여 종을 집필하고, 핵가속장치를 비롯한 핵물리 실험장치를 개발하는 등 원자력 부문의 첫 교육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도상록씨는 지난 1990년 사망했다.
그와 함께 북한 핵개발의 기초를 닦은 이는 서울대 공과대학장으로 재직하다 한국전쟁 때 월북한 이승기씨다. 이씨는 일본에 유학 중일 때(1939년) 화학섬유의 일종인 ‘비닐론’을 발명해 유명해진 이다. 월북한 후에 국가과학원 함흥분원장을 맡았고, 지난 1996년 사망했다. 이씨의 일가가 이후에도 북한에서 대대로 ‘과학자 집안’으로 우대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북한중앙방송은 지난 1999년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전국 과학자 기술자 대회’를 보도하면서 “이승기 일가 중에 35명의 박사, 학사(석사), 연구사가 자라났다”고 했다.
이들 1세대는 소련으로부터 ‘IRT-2000’ 연구용 원자로를 도입(1965년)해 핵연구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후 북한은 지난 1979년 자체 기술로 영변에 5MW 원자로 건설에 착수했고, 1986년부터 공장을 가동했다. 북한은 1983~1993년에 핵무기 개발에 필수인 고폭실험을 70차례 실시했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1989년 원자로 가동을 중단했다.

서상국 박사의 뒤를 이어 3세대 핵 과학자들이 현재 현역에서 뛰는 것만은 분명하다. 또 다른 고위 탈북자는 “서 박사의 뒤를 잇는 과학자들이 그에 못지않은 천재일 가능성이 높다. 1970년대 말 이후의 북한은 교육에 있어 ‘선택과 집중’을 했기 때문에 북한 최고의 천재들이 핵개발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북한의 교육제도는 11년제 의무(무료)교육이다. 유치원 1년, 소학교(초등학교) 4년, 고등중학교(중·고등학교) 6년이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1학년 때는 김일성이나 김정일 장군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는 단계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면 공부나 조직생활을 잘하는 모범생들은 ‘소년단’에 입단한다. ‘소년단’ 입단선서는 김일성 일가에 대한 찬양 일색이다. 대략적인 내용은 ‘나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께서 세워 주시고 경애하는 아버지 김정일 장군님께서 빛내어 주시고 영광스러운 조선소년단에 입단하면서 언제 어디서나(하략)’이다. 이때부터 북한의 어린이들은 부모의 말보다는 장군님의 말을 따르고, 당과 수령에 충성하는 것에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도록 교육받는 셈이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면 ‘청년동맹’에 가입하는데, 이때부터는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다. 5학년 때부터 군사정치학 수업을 듣는데 산에서 고립됐을 때, 지도 없이 방향 찾는 법, 지도 보는 법, 아무런 도구 없이 밥하는 법 등을 가르친다. 고등중학교를 졸업하면 군대, 대학교 진학, 무직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등 다양한 길이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북한은 철저하게 ‘수재교육’을 표방한다. 공산주의를 표방한 북한이 ‘교육’에 있어서만큼은 아이러니하다. 한 고위 탈북자의 얘기다.
“북한의 사회주의 이론은 평등입니다. 똑같이 잘 먹고 잘사는 겁니다. 그래서 1950~60년대 초창기에는 똑같이 공부를 시켰습니다. 사람은 똑같으니 같은 교육기회를 제공하면 똑같은 속도로 발전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소련에서의 실험이 있기 전까지는요.”
—소련에서 어떤 실험이요.
“토마토를 키우는데 물도 흠뻑 주고, 비료도 주고, 외부 여건을 계속 풍족하게 줬는데도 토마토가 자라는 것이 고만고만한 겁니다. 토마토는 그저 토마토일 뿐인 겁니다. 그래서 종자개량을 했더니 토마토의 크기가 커지고, 높이도 높아지면서 튼실한 토마토가 나온 겁니다. 이래서 나온 것이 김일성의 ‘종자론’입니다. 주위 환경은 중요치 않다, 종자 자체를 개량해야 한다는 겁니다.”
김일성의 ‘종자론’이 나온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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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 산하 한미연구소가 운영하는 북한 전문 웹사이트인 ‘38노스’가 2013년 10월 19일 촬영한 북한 영변 핵시설 위성사진. 원자로와 터빈, 발전기 건물의 오른쪽 배수관으로 원자로 냉각에 사용한 온배수가 배출되고 있다. |
“고등중학교 때였습니다. 하루는 외부에서 선생들이 와서 ‘이 반에서 공부 제일 잘하는 애가 누구냐’고 해서 데리고 갔습니다. 처음 있는 일이라서 무슨 일인가 싶었습니다. 나중에 들어 보니 ‘머리 좋은 놈 뽑으려고 그런다’는 겁니다. 그렇게 반 대표들끼리 시험을 보고, 학교 대표를 뽑아서 시 대회에 보내고, 그런 식으로 제일 머리 좋은 놈을 중앙으로 보낸 겁니다. ‘제1중학교’가 천재들만 모인 그런 곳입니다.”
—우리로 치면 과학고등학교 정도겠네요.
“그렇죠. 그런데 거기는 돈이나 빽이나 그런 거 안 통했습니다. 가끔 남한에는 돈으로 해서 ‘뒷문’으로 넣었다는 식(式)의 얘기들이 나오는데 북에는 그런 거 없습니다. 그냥 무조건 머리만 보는 겁니다. 이렇게 시험을 치르는 과정에 나쁜 소문이 돌았습니다.”
—어떤 소문입니까.
“그렇게 제1중학으로 뽑혀 가면 ‘핵’이라는 것을 연구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때 ‘핵’이 뭔지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만 ‘핵이라는 것을 연구하면 대접받고 빨리 승진한다더라’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조금 지나니까, ‘핵을 연구하면 무슨 물질(방사능)에 노출되고, 노출되면 빨리 죽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부 똘똘한 애들 사이에서는 시험을 못 보면 뽑히지 않을 테니까, 어떻게든 시험을 엉망으로 보자는 얘기가 파다했습니다.”
—인민이 평등하다는 북한에서 교육만큼은 다르게 취급하는군요.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에 보내려면 사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것은 벌써 파다하게 알려진 사실입니다. 제1중학교를 졸업해야 평양의 중앙대학에 갈 가능성이 높고, 김일성종합대학이나 중앙대학을 졸업해야 당간부나 북한 지도층으로 편입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자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사교육을 시켜서라도 제1중학교, 평양 중앙대학을 가려 합니다. 북한 도시지역에서는 과학기술, 정보통신 분야의 우수한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습니다. 반면 지방, 농촌, 산간벽지 학교는 방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고위 탈북자의 증언을 토대로 보면, 북한은 이미 1970년대 후반에 고등중학생(중·고등학교) 시절에 전국에서 가장 머리 좋은 애들을 뽑아서 핵개발을 시킬 의도가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뽑힌 이들은 ‘핵개발 2세대’인 서상국 박사의 교육을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전국 1~10등에게 해킹만 가르친다면?
서상국 박사의 존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북한 내에서는 파키스탄의 ‘핵의 아버지’인 카디르 칸 박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대접을 받는 것으로 전해진다. 서 박사는 소련에서 유학을 마치고 보위부에 의해 평양으로 온 이후에 한동안 지방에서 지냈다고 한다. 고위 탈북자의 증언이다.
“서 박사가 북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소련에서 많이 찾았던 모양입니다. 한 번은 소련의 핵 관련 장치에 에러가 생겼답니다. 소련의 과학자들이 고치려고 시도를 했는데 다 실패해서, 결국 서 박사를 불렀답니다. 서 박사가 크게 어려워하지 않고 장치를 고쳤답니다. 이후에 소련에서 서 박사에 대한 신뢰가 더 커졌고, 북에다 자꾸 서 박사를 잠깐 다녀가게 하라는 요청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탈북자인 K박사도 이 얘기를 자주 했습니다. 소련이 그 정도로 탐낸 과학자가 북에 있었다면서요.”
—그래서 평양에서 내보냈군요.
“먼 촌구석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번은 종합지원 학생들이 농촌지원(우리로 치면 농활 같은 것)을 갔다가 서 박사를 만난 모양입니다. 자기들끼리 어떤 수학 문제를 내놓고는 못 풀어서 끙끙거리고 있는데, 서 박사가 다가오더랍니다. 농사 짓는 사람이 불쑥 수학 문제를 보여 달라고 하니까, 학생들이 웃었던 모양입니다. 서 박사가 문제를 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풀었다고 합니다. 그때 농촌지원 갔던 학생들이 평양에 돌아와서 이 얘기를 하면서 학생들 사이에서 ‘촌구석에 대단히 똑똑한 사람이 있다’ 정도로 얘기가 돌았습니다.”
서상국 박사가 언제 다시 평양으로 되돌아왔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고위 탈북자가 그에게 수업을 받았을 때가 1984~1985년이니, 이즈음에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강의를 한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북한 내부에서조차 그의 얼굴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김일성 시절부터 북한은 ‘지식인대회’ 등을 통해 과학자들의 존재를 공공연하게 밝혀 왔다. ‘1세대’ 핵 개발자인 이승기씨가 김일성과 나란히 앉아 있는 사진 등은 공개됐다. 하지만 서상국 박사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또 다른 고위 탈북자에 따르면 서 박사는 강의는 거의 하지 않고 평안북도 영변의 핵시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그가 사는 아파트는 국가안전보위부 요원들이 철저히 경호를 하고 있으며,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프랑스에서 치료를 받는 등 ‘특별대우’를 받는 것으로 전해진다.
서상국, 러 核 관련 부품 北 반입 역할한 듯
서씨는 평양으로 되돌아온 이후에 러시아를 종종 방문했다고 한다. 서씨가 과거 소련에서 공부하던 시절의 인맥을 활용해 핵 관련 시설, 부품을 북한으로 반입하는 역할을 했을 수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북한식의 ‘선택과 집중’ 교육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북한이 ‘핵개발 4세대 주역’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고위 탈북자의 얘기다.
—지금도 전국에서 수재들을 모아서 핵개발을 시킨다고 볼 수 있을까요.
“그러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1970년대보다는 그 열기가 덜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핵 이외에 해킹 등 수재들이 필요한 곳이 다양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북한이 외교통상위원회 소속 국회의원 컴퓨터를 해킹해 발칵 뒤집혔는데요.
“요즘은 북한 내에서 해킹이 대우가 좋으니까 너나없이 해킹을 하는 겁니다. 앞으로 그런 현상은 더욱 가속화할 겁니다. 국민들의 평균 두뇌로는 남한이 좋을 수 있지만, 북한에서 선택과 집중 교육을 받은 수재들을 따라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서울과학고에서 전교 1~10등을 뽑아서 핵만 연구시킨다고 해 보죠. 그렇게 한 시간이 벌써 40년이 되어 갑니다. 그런데 핵개발을 못했을까요? 또 그들에게 해킹 교육만 시켰다고 해 봅시다. 그들이 한국의 컴퓨터 해킹을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김일성 왕조 국가에서나 가능한 얘기겠습니다만요.
“초 엘리트 교육의 수혜자는 당연히 김정일이었고, 지금 김정은입니다. 우리나라의 수재들이 성형외과에서 돈 벌기 위해 수술을 할 때, 북한은 당 차원에서 최고 수재들을 모아 놓고 전략적으로 한 가지만 파게끔 하는 겁니다. 북한이 폐쇄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만, 또 돌이켜보면 전국에서 최고 머리 좋다는 사람들을 모아서 집단훈련을 시키면 저렇게 무서운 힘을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