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사회주의 종주국으로 세계에서 가장 영토가 넓은 국가로 북아시아 전체와 동유럽의 대부분에 걸쳐있고, 아홉개의 시간대에 걸쳐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다. 북서쪽에서 남동쪽 으로 노르웨이,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그루지야,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중국, 몽골, 북한 오호츠크 해와 베링 해협, 알래스카 주에서 미국, 일본과 해상 국경을 유지하고 있다. 동토의 땅 인 러시아는 해외 진출을 위해서 부동항을 얻기 위해서 남하정책을 추진하여 터키 등 주변국들과 전쟁을 일으켰고,극동에서는 연해주를 청나라로부터 획득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를 세우고, 시베리아 철도를 건설했다. 이때 고려인들의 불라디보스톡을 건설하는데 지대한 힘을 보탰으나 하바로스크, 사할린 등으로 강제이주 당한 恨 이서린 땅이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동방정책의 핵심 거점 도시로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출발하는 곳으로
극동 함대 사령부가 위치한 이 도시는 그래서 이미 한 세기 전에 근대 도시의 위용을 갖추었다. 일제 강점기 망국의 한을 달래며 많은 애국지사들이 모여든 곳이기도 하다.
실제로 안중근 의사도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거행하기 위해 이 도시에 들러 최재영 선생에게 자금을 지원받았으나
최 선생은 이 일로 이 도시를 점령한 일제에 붙들려 목숨을 잃었다.
어쨌거나 한반도가 비루한 초가집에 오물 냄새를 풍기고 있을 시절에 이처럼 아름다운 근대 도시를 만든 것을 보면서 조선 말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한 제정 러시아의 힘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1985년 3월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대외적으로 '신사고'노선에 입각한 과감한 외교에 나서 냉전을 종결시키는 한편, 1986년 2월 제27차 당대회에서 "개혁'개방" 노선을 선언하고, 1991년 7월 당중앙위는 맑스'레닌주의를 고르바초프에 의해 공식적으로 포기하고 소비에트 연방이 15개 공화국으로 해체되면서 러시아를 중심으로 새롭게 러시아를 창설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일제시대엔 수많은 독립운동 계획들이 수립되었던 한인 독립운동의 전진 기지(대한광복군정부, 대한국민의회,..등)였어며 1910년대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 운동으로 러시아 연해주내의 의병을 통합하여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는 "대한 광복군 정부"라는 독립군 조직을 만들었고...1919년‘대한국민의회’로 개편(임시정부)했던 곳이다.
한민족의 애환이서린 불라디보스톡을 13,000t급 "DBS-크루즈"로 동해항을(5/31, 14:00) 떠나 장장 20여시간 항해끝에 불라디보스톡항에(6/1, 12:00)도착했지만 이국적인 느낌은 별로 없다. 20여시간의 항해중에도 선내에는 레스토랑, 나이트클럽, 바, 노래방, 사우나, 면세점, 훼밀리마트, 샤워장 등이 있어...선내부대시설로 아무 불편함 없이 편하고 즐거운 밤 이였다. 선상에서 목조욕탕 뜨거운물에 몸을 담가보는 색다른 경험도 상큼했고...
2시간 가까이 입국수속을 마치고 호텔 체크인 까지 짜투리시간에 냉전시대 초강대국 소련의 부동항 블라디보스톡 시내관광에 나서며 옛 발해의 영토였던 이 땅의 내력을 짚어본다.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러시아 연해주(沿海州)지방에 있는 항만도시 인구 70만 명으로 “동방을 지배하라”라는 뜻으로 동해 연안의 최대 항구도시 겸 군항이며 소련 극동함대의 근거지 이고, 북극해와 태평양을 잇는 북빙양 항로의 종점이며,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시발점이자 종점이기도 하다. 1891년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3세의 구상으로 착공해 1916년 개통한 세계 최장 철도망. 서쪽 모스크바와 동쪽 블라디보스토크 간 9288km를 잇는다. 항구 맞은편에 역사가 보인다. 철도 종점인 임항역(臨港驛)의 북쪽이 시의 중심지구이다.
바다를 끼고 구릉을 이룬도시 모양이 흡사 부산과 닮았다.
먼저 혁명의광장으로 간다. "스베틀란스카야" 의 중심에 위치한 광장 중앙에 깃발과 나팔을 든 병사의 거대한 동상이 서 있다.
불라디보스톡의 중심이자 상징인 광장이다.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구 쏘련을 위해 싸웠든 병사들을 위한 기념물이 있으며,
불라디보스톡의 대표적인 유적중 하나다. 바로 옆에는 극동함대사령부도 함께있다.
이곳에서 전승기념일을 비롯한 여러 축제 및 각종 행사가 펼쳐 진단다. 중앙광장 왼쪽 편으로는 "벨르이 돔" 이라고 불리는 흰색 건물의 연해주 주정부 청사가 있다. 잠수함 박물관은 2차 세계 대전 당시에 14대의 적함을 침몰시킨 전설적인 잠수함을 1975년에 그대로 옮겨 보전, 현재는 잠수함 내부를 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내부에는 선실, 기관실, 조타실, 함장실 등의 실제 잠수함 내부를 세심하게 직접 볼 수가 있으며, 잠수함의 연혁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잠수함 전시관 옆에는 제 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들의 이름을 담은 기념비와 1년 내내 불이 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꽃, 승리의 아치라 불리우는 니꼴라이 개선문도 둘러보고,극장, 굼백화점 건물등 관광하고 독수리 전망대로 이동한다.
블라디보스톡에서 가장 높은산(214m)에 위치한 전망대로 시내거리와 금각만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언덕으로, 기념품 상점과 키릴문자를 만들었다는 키릴형제의 동상이 서 있다. 독수리 전망대에서 내려와 블라디보스톡 거리를 걸어면서<동양의진주'동양의 유럽>이라고 일컬어지는 거리의 건축양식은 독특한 아름다움을 간직하여 유럽의 정서와 문화를 느낄수 있었다.
전망대에서 해양공원으로, 젊은이들의 데이트거리인 아르바트거리 산책하고 교포가 운영하는 아리랑식당에서 저녁먹고 슈퍼에 들려 간식거리 사들고 호텔투숙, 2일째 일정 마무리한다. 내일은 메인코스 비단산이다. 블라디보스톡 사진
3일째(07:00), 북위 43° 동토의 땅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비단산으로 간다. 우리가 흔히 다니든 산의 위도는 북위 35°~ 37°내외가 대부분이다.
기껏 높아봤자 38°쯤 될 것이다. 더욱이 한라산은 33°쯤으로 더 낮다. 위도만 보면 무슨 동토의 땅이나 되는 것 같아 보인다. 호텔에서 버스로 2시간 가량 달려 등산기점에 도착하면 "까마즈(육공트럭)"라는 2차대전때 사용했음직한 군용트럭을 타고 1시간 가량 밀림속으로 빨려든다. 나는 아직까지 이런길은 본 기억이 없다 개울을 건너고 웅덩이를 넘고 자갈 아닌 바위같은 돌을 넘고... 완전히 수륙양용 탱크다. (10:20)산행 들머리에 도착하여 개곡을 따라 산행은 시작된다.
계곡을 따라 1시간쯤 오르면 해발400m 지점에 지혜의폭포를 만나고... 1시간쯤 진행하면 또 다른폭포를 지나 해발670m인 계곡끝지점에서 잠시 쉬었다 해발955m 지점인 야영지까지는 급경사 오름길로 이번산행의 가장힘든 지점이다. 비단산은 극동러시아 나홋카와 파르티잔스크 사이에 있는 연해주에선 가장 높은산으로 연해주의 보석으로 불릴 만큼 아름다우며, 자작나무를 비롯해 단풍나무등 각종 나무가 자생하고 있는 생태계보고로, 6부 능선에서 정상까지는 우리나라 지리산 능선과 비슷한 주목 군락지와 풍화작용에 의해 생긴 '너널지대'가 타나고 초입에는 우리나라 서낭당 처럼, 마을의 안녕과 액운퇴치, 소원성취 등을 기원하기 위해 나무 위에 여러 가지 색상의 헝겊을 걸어놓은 우리의 토속신앙과 아주 흡사하고, 너덜지대 곳곳에는 우리의풍습 처럼 치성을 드리는 장소도 있어 이 산이 한때 이곳을 지배했던 발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짐작한다. 일제 당시에는 이곳에서 독립군이 빨치산 투쟁을 한 곳으로 유명하며, 신이 옛 보하이('발해'를 부르는 러시아어) 전사에게 돌멩이를 내려주면서 산이 생겼다는 전설도 있는 비단산 정상에(13:47) 오르면 동쪽으로는 우리의 동해바다가 보이고 북서쪽으로는 광활한 시베리아 타이가지대가 펼쳐지는 장관이 펼쳐진다. 정상엔 누군가 타고왔다 버리고 간 녹슨 자전거가 딩굴고, 방독면같은 걸 쒸어놓은 말뚝이 정상임을 표시한다. 들머리에서 3시간30분 걸렸다. 하산길은 올랐든길 되밟아 내려간다. (16:26)에 도착하니 우리를 태우고 왔든 까마즈 기사와 산악가이드가 러시아 차를 끓여놓고 한잔 권한다. 따끈한 차 한잔에 6시간의 피로가 설탕처럼 녹아든다. 호텔로 가든중에 어제 저녁먹은 아리랑식당에서 러시아명물 킹크렙과 보드카 포식하고 이튿날 아침 체크아웃 하니 출항시간 까지 남은 짜투리시간에 기독교의 한 교파로 러시아인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러시아의 국교인 정교회 성당에 잠시들렸다가 내부와 건물사진 몇장담고... 제20회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연 '루스키 섬'으로 간다. APEC정상회의를 위해 지금까지 루스키 섬과 블라디보스토크시(市)를 갈라놓았던 '동(東)보스포루스 해협' 위에 길이 3100m,인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를 놓아 루스키 섬과 블라디보스토크시(市)를 연결한 연륙교를 건너 루스키섬에 왔다. 루스키 섬에있는 극동연방대학 캠퍼스 안에는 호텔에 버금가는 기숙사가 있어 APEC 정상회의는 대학 캠퍼스에서 열리고 정상들은 기숙사에서 묵었다 는 가이드의 설명만 듣고 도로변에서 건물사진 몇장담고 비내리는 다리를 건너 블라디보스톡항에서 출국수속(12:00) 마치고 (14:00)출항 (6/4, 11:00)동해항에 도착한다.
⊙ 비행기 타고 2시간만 가면 만날 수 있는 ‘이국적인 항구도시’ 블라디보스토크… 한국 관광객들로 붐비지만 볼거리 등 부족 ⊙ 우수리스크엔 ‘연해주 독립운동의 代父’ 최재형, ‘헤이그 특사’ 이상설의 자취 남아 있어
블라디보스토크 중심가에 있는 ‘극동 소비에트 정권 전사 광장’이다.
‘가장 가까운 유럽’이라고 불리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다녀왔다.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2시간가량이면 닿는 이곳엔 슬라브계(系) 백인들이 우리와 전혀 다른 양식으로 지은 건물에서 그들만의 생활양식에 따라 살고 있다. 우리 입장에서는 확실히 이국적인 도시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럽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은 아니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유럽’이라고 표현하는 건 어폐가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중심가엔 과거에 지어진 유럽식 건물들이 즐비하지만, 자세히 보면 분위기는 유럽의 여느 도시와 다르다. 푸른 하늘, 고풍(古風)스러운 건물, 노변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는 현지인 등 유럽 도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풍경’이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없다. 무뚝뚝한 러시아인 특유의 찡그린 표정, 옛 소련 시절 건축물과 각종 선전용 동상, 미세먼지로 가득한 잿빛 하늘은 우리가 아는 유럽과 거리가 멀다. 도로를 가득 메운 ‘노후 경유차’들이 내뿜는 매연을 맡고 있으면, 중국이나 동남아에 온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다. 블라디보스토크는 ‘가까운 유럽’이 아닌, ‘가까운 러시아 도시’일 뿐이다.
뒷골목 식당보다 못한 ‘블라디보스토크 맛집’
연해주(沿海州) 주도(州都)인 블라디보스토크는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시작점이자 러시아 지역의 관문이다. 러시아 극동함대 사령부가 주둔하는 군항(軍港)이면서 연해주 최대 어업기지이기도 하다. 이곳은 현재 국내에서 인기 있는 여행지로 부상(浮上)하고 있다. 여행 목적일 경우 2014년 1월부터 ‘무사증 입국(60일 이내)’이 가능해졌고, 직항 여객기 취항 횟수도 대폭 늘었기 때문이다.
현재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는 한국인들에게 점령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수 방문지로 꼽히는 ‘아르바트 거리’ 등 주요 관광지는 한국인들로 넘쳐난다.
이 같은 한국인 관광객 증가엔 여행 프로그램의 역할이 컸다. 주(駐)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에 의하면, 블라디보스토크를 포함한 연해주를 찾는 외국인 국적에 ‘한국’이 압도적으로 많다. ‘현지 맛집’으로 알려진 식당들은 몰려드는 한국인 때문에 ‘특수’를 누린다. 해외 체류 시 되도록 국내 블로거들이 ‘맛집’이라고 선전하는 식당을 피하려고 했지만, 호기심에 ‘수○○’이란 중앙아시아 음식점에 들렀다. 식당 안은 온통 한국인이었다. 현지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몰려드는 한국인 관광객 때문에 오지 않는 것일까.
한국인 관광객들은 같은 블로거의 게시물을 봤는지, 샤슬릭(중앙아시아식 고기 꼬치구이)과 치즈가 들어간 빵 등을 시켰다. 역시 그들과 비슷하게 음식을 주문해서 맛을 봤다. 보수동시장 부근 뒷골목에 있는 러시아 식당보다도 수준이 떨어졌다. 현지 분위기를 느끼며 ‘진짜 러시아 음식’을 먹고 싶다면, 국내 블로거들이 추천하는 식당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 물론 이는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이자 조언일 뿐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역사는 짧다. 크림전쟁(1853~1856) 패배 후 ‘흑해 함대 배치권’을 잃은 제정(帝政)러시아가 동방으로 눈을 돌리고 나서 건설된 도시가 블라디보스토크다. 제정러시아는 원동의 항구도시를 키우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훗날 제정러시아의 마지막 황제가 되는 니콜라이 2세는 황태자 시절인 1891년, 동아시아 여행을 하던 중 시베리아횡단철도 착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했다. 당시 그의 행적은 항구 인근 ‘니콜라이 개선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니콜라이 개선문’ 인근에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해군 함정 4척을 격침했던 S-56 잠수함을 개조한 박물관, 러시아 해군의 참전 기념비, ‘영원의 불’이 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무명(無名)용사 동상이 있는 ‘극동 소비에트 정권 전사 광장’이 있다. 광장에선 주말마다 수산물, 채소, 치즈, 꿀 등 지역 특산품을 파는 장이 선다. 광장에서 도보로 5분 정도 이동하면 총연장 9298km에 달하는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시작점인 블라디보스토크역이 있다. 이를 제외하면, 블라디보스토크엔 외국인의 흥미를 끄는 관광지가 별로 없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지대의 고도가 낮아 해발고도 214m에 불과한 ‘독수리 전망대’에 오르면 시내 전경을 살필 수 있다,
독수리 전망대 바로 앞, 푸니쿨라 정류장 인근에서 금각교를 비롯한 블라디보스토크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곳에서 금각교를 건너면 ‘러시아 대표 공연장’ 마린스키의 연해주 분관이 나온다. 마린스키 연해주 분관에선 오페라, 발레, 협주 등 다양한 공연이 개최된다.
항일독립운동 근거지 新韓村
우수리스크 도라 공원 안에 있는 발해 유적 ‘龜趺’다. 우수리스크 일대는 발해 15부 중 率賓府였다. 당시 솔빈부의 말은 당나라 절도사들이 서로 사들이려던, 발해의 주력 수출품이었다.
연해주에 한인(韓人)이 살기 시작한 건 1863년이다. 당시 조선인 13가구가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 포시에트로 최초 이주했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1914년, 당시 연해주 한인은 6만3000명에 달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한인촌인 ‘신한촌(新韓村)’이 건설됐다.
한인 사회를 바탕으로 1911년엔 독립군 양성을 목표로 한 ‘권업회(勸業會)’가 창설됐다. 1914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 광복군 정부(대통령 이상설, 부통령 이동휘)’가 수립된다. 1919년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에 맞서 연해주 한인들은 최초의 임시정부인 ‘대한국민회의(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박영효, 국무총리 이승만)’를 설립했다.
이 같은 연해주 항일독립운동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은 우수리스크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10km가량 떨어진 연해주 제2의 도시 우수리스크는, 인구 14만명에 불과한 소도시지만 우리와 ‘인연’이 깊은 고장이라 방문해볼 만하다. 우수리스크엔 ‘연해주 항일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崔在亨)의 가옥이 있다. 최재형은 그 활동상이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다가 ‘3·1운동 100주년’인 올해 들어서 자주 언급되는 독립운동가다.
안중근의 후원자 최재형
최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재조명되고 있는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원 안)의 가옥이 우수리스크에 있다. 최재형은 1920년 일제의 시베리아 출병 때 체포돼 처형됐다.
1860년, 함경도 경원에서 노비와 기생의 자식으로 태어난 최재형은 9세 때 부모와 함께 연해주로 가서 러시아에 귀화했다. 형편상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최재형은 10대 초반부터 상선 선원 생활을 하며 견문을 넓히고, 러시아어를 익혔다. 이후 그는 러시아군 통역관, 군납업자로 일하며 큰 부(富)를 쌓았고, 노우키에프스크 한인 마을 도헌(都憲·면장)이 됐다.
당시 최재형은 도헌 연봉 3000루블을 은행에 예금해 그 이자로 매년 한인 학생 1명을 페테르부르크로 보내 공부하게 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후 군인들이 노우키에프스크로 모이자 이들에게 군자금과 군량을 제공해 의병활동을 지원했다. 1909년엔 직접 의병장으로 나서 일본군과 싸우며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같은 해, 안중근(安重根)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사살’도 지원했다. 안중근이 순국 한 뒤에는 그 유족을 돌봐줬다.
최재형은 1910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되던 한인신문 《대동공보(大東共報)》가 재정난에 빠져 폐간되자 이를 인수해, 항일정신을 고취하고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다. 1919년엔 상해임시정부에서 초대 재무총장으로 선임했지만 사양하고 우수리스크에 살며 항일운동을 지속했다. 그는 1920년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에게 체포돼 처형됐다.
‘헤이그 특사’ 이상설의 자취
우수리스크엔 ‘이상설 유허비’ ‘홍범도 기념비’ ‘안중근 기념비’ 등 항일독립운동에 몸바친 애국지사들의 흔적들이 있다.
우수리스크 군청에서 북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있는 ‘고려인 문화센터’에는 2015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옮겨온 ‘안중근 기념비’가 있다. 원래 블라디보스토크주립 의과대 앞에 세워져 있던 이 비석은, 2012년 말 철거돼 방치돼 있다가 2014년 8월 우수리스크로 이전·설치됐다. ‘봉오동·청산리전투(1920)’의 주인공인 홍범도(洪範圖)를 기리는 비석도 있다.
우수리스크 군청에서 남쪽으로 5km가량 이동하면 ‘헤이그 특사’이자 연해주 항일운동의 중추던 이상설(李相卨)의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이상설은 1917년, 48세에 생을 마감하면서 “독립된 조국이 아니면 그곳에 내 시신도 들여놓지 않겠다”며 사후 유해를 화장해 쑤이펀(綏芬)강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