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기마유목민족 돌궐과 한민족의 관계

서석천 2014. 5. 12. 20:48

 

 

[질풍노도와 같이 등장한 기마군단]
흉노 왕족, 중국 거쳐 한반도에서 신라를 건국
한국과 중국의 모든 김씨는 흉노의 후예

1.세계사와 문화사를 바꾸는 홍산문화의 대발굴

중국의 황허문명과 궤를 달리하는 북방알타이 문화권은 한반도, 만주, 몽골 및 내몽골, 신장위구르, 티벳, 중앙아시아, 우크라이나 및 남러시아, 터키, 동부유럽 등 유라시아 스텝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다. 이 지역은 오랫동안 기마유목민족의 활동무대였다. 역사시대에 들어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서부에서는 스키타이, 흉노, 훈, 돌궐, 위구르, 토번, 서하, 셀주크·오스만튀크르 등이, 동부에서는 선비, 유연, 수-당(선비), 요(거란), 금-후금(여진·청), 원-티무르-무굴(몽골) 등의 국가가 건설되었다.

그런데 1920년대부터 내몽골 자치구의 요령성 접경 홍산지역에서 신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대거 발굴되었고 최근까지 발굴이 계속되고 있는 데, 그 유물들은 놀랍게도 BC 7000년 전까지 소급되는 고대 문명공동체의 존재를 밝히고 있다. 특히 1983~85년 홍산지역의 「우하량」에서 BC 3500~3000년경 초기 중앙집권국가의 흔적을 보여주는 적석총, 여신묘, 대형제단, 옥기 등 유적·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 초기문명 유물들은 계급이 완전분화되고, 사회적분업이 이루어진 중앙집권국가가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대발견이었다.

의문의 이 문명은 중국사에도 나타나지 않는, 그동안 중국이 자신들의 문명이나 문화라고 주장한바 없었던 지역에서 홀연히 나타났다. 이것이 바로 세계 4대 문명권보다 적어도 1000년 이상 앞서는 고대문명으로, 세계역사와 문화사를 다시 쓸 수밖에 없게 하고 있는 「홍산문화」이다. 중국 역시 자국 영토내에서 황허문명보다 앞선 고대문명이 출현한데 대해 놀라고 있는데, 역사공정은 바로 이 토대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중국 영토로 편입된 만주(79만㎢)와 내몽골(148만㎢), 신장위구르(166만㎢), 티벳(127만㎢) 지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황허 문명과 확연히 구분되는 또다른 문명 지역이며, 현재 동북·서북·서남공정 등의 이름으로 역사공정이 전개되고 있다.

한편, 내몽골자치구 적봉시 인근 하가점이란 촌락에서 발굴된 「하가점하층문화」는 BC 2400~1500년 청동기 시대에 지금의 난하-요하 사이의 요서지방에 강력한 중앙집권국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이 문화 역시 중국의 황허문명과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문명권이다. 따라서 이 「홍산문화」· 「하가점하층문화」는 한민족 고대국가인 배달국·고조선의 존재와 직결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면 한민족의 유래와 고대역사가 밝혀지는 무대가 새롭게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신화가 역사로 바뀌는 전율의 드라마가 우리 역사학자들의 혜안과 수고에 의해 전개되기를 기대한다.
홍산문화 유적-유물.
홍산문화 유적-유물.
2. 4세기말 혜성과 같이 서양사에 등장한 「흉노-훈」과 20세기 기적의 경제사를 쓴 「한민족

한민족의 시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현대 한국인의 조상이 수만년 전 알타이·몽골 지역에서 한반도로 이주해 왔으며 현대 한민족은 신석기시대(BC 5000~1000)와 청동기시대(BC 1000~300)에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했던 몽골계 민족의 후손으로 추정… 중앙아시아와 우랄 인근, 알타이지역이 한민족의 기원이 시작된 장소”(러시아 유가이 교수)
“조선족이 최초에 서방 파미르고원 혹은 몽고 등지에서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서 동방으로 나와서 …”(단재 신채호 선생)
이렇듯 한민족 시원지를 바이칼호·몽골지방 또는 파미르고원·천산지역으로 보는 것이 다수 견해다. 한국 고대문명은 한반도 북부와 시베리아·만주·몽골·알타이·중앙아시아에서 활약한 북방기마민족과 연결되며, 한민족은 흉노·선비·돌궐·거란·몽골·여진 등 북방 기마유목민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많은 연구가 있다.
한민족 기원과 관련한 주요 지형.
한민족 기원과 관련한 주요 지형.
최초의 스텝제국이며 기마군단의 전형인 흉노가 역사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BC 4세기경이다. 그러나 흉노는 고대로부터 중국 역사와 같이 존재했었다. 몽골고원을 본거지로한 흉노제국은 중앙아시아와 서역 지방까지 방대한 영역을 장악한 거대국가였다. 그러나 AD 155년 선비·한나라군에 의해 멸망한 후 잔존세력들은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로부터 약 2세기가 지난 후 유럽에 돌풍같이 등장하여 파죽지세로 진격해 로마인들을 공포에 빠뜨린 훈 제국은 바로 이들이 세운 국가다. 훈족은 기마전술·생활관습·문화 등에서 흉노와 많은 유사성을 보이고 있어 흉노의 후예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흉노-훈과 우리 한민족 사이에는 과연 어떤 관계가 있을까?

①학계에서는 북방 유목민 일부가 한반도 남부 신라에 정착했다고 인정하고 있다. 1990~92년 김해 대성동에서 많은 고분과 유물이 발굴되었는데, 적석목곽묘·토기·투구·철제갑옷·마구·동물문양장식·오르도스형 동복 등이다. 이는 흉노·선비·부여·고구려 등 북방기마유목민족의 한반도 진출을 말해준다. 흉노의 무덤은 직사각형 구덩이에 시신을 안치하고 나무덧널을 넣은 다음 돌을 쌓아 올린 적석목곽분인데 신라무덤(천마총, 황남대총 등)도 이와 매우 흡사하다. 흉노와 신라의 친연관계는 무덤은 물론, 편두풍습과 제철기법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②고대 북방유목민들에게는 금으로 치장하는 풍습이 널리 퍼져있었고, 이는 알타이를 고향으로 하는 북방민족의 상징이었다. 신라는 금을 세공하여 금관과 다양한 장신구를 만들었다. 세계적으로 동물형 장식 등 고대 금 세공기술은 스키타이와 신라가 가장 뛰어났다. 고대 한국은 금관의 나라라고 할 만큼 우수한 기술로 금관을 제작했다. 전세계 발굴 금관의 2/3가 우리 것이다. 신라 금관을 보면 윗부분의 나무와 사슴뿔 형상, 잎새 모양 장식, 곡옥 등 북방 알타이계통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신라 금관
신라 금관
③가야·신라에서는 고구려·백제에는 없는 순장하는 풍속이 나타난다. 이는 흉노 등 북방민족의 전통이었다. 흉노는 다른 민족에 흡수되어 사라졌으나, 우리에게는 씨름·언어·습속·의복·풍습 등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또한 한국어에는 북방알타이계 언어들과 연결된 다수의 어휘가 나타난다. 간(干)·각간(角干) 등 왕을 뜻하는 단어는 물론, 백제·신라·고구려의 관직명에서 많은 알타이계 어휘가 보이고 있다.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혁거세」는 돌궐어로 통치자 즉 천자(天子)라는 뜻이라 한다.

④흉노가 신라·가야를 건국했다는 연구도 있다. 흉노에는 선우가 직접 다스리는 중심부와 동·서부지역을 다스리는 좌현왕·우현왕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고조선 등 한민족의 고대정권 구조와 유사하다. BC 174년 흉노의 영걸 묵특 선우는 돈황 넘어 서역을 정벌하고 실크로드를 장악한 후, 우현왕을 두어 다스리게 했다. BC 121년 흉노의 우현왕(휴도왕) 사후 태자 김씨 형제(김일제, 김륜)가 중국으로 들어와 한 왕실에서 활약했고, 전한 멸망 후 세운 것이 ‘신’나라다(왕망:원래 김망이라 한다). 이들 후예가 김해와 경주 일대에 들어와 신라·가야를 형성했다. 따라서 한국과 중국의 모든 김씨는 흉노인이며, 김해 가야는 흉노인 김씨의 나라였다. 또한 신라로 진출한 김씨 왕국을 확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서동인, 흉노인 김씨의 나라 ‘가야’)

⑤논란이 있지만, ‘단군세기’에 따르면 고조선 3세 단군때 삭정을 약수지방(감숙성)에 유배시켰다가 그 땅에 봉한 것이 흉노의 시조라 하며, 30대 및 37대 단군시절에는 흉노가 고조선에 조공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여진·선비·몽고·흉노 등은 본래 我의 동족이었다. … 我에서 분리된 흉노·선비·몽고…”라고 하여 흉노가 우리에게서 분리된 점을 갈파하고 있다.
현재 몽골인들은 흉노를 자신의 조상으로 생각하고 교과서에서도 몽골 최초의 고대국가가 흉노라 한다. 또 튀르크계 국가인 터키의 교과서는 튀르크의 고대국가가 흉노라 한다. 헝가리에서는 훈족의 후예가 유럽에서 건설한 나라가 헝가리이며, 헝가리인들은 훈족의 통치자 아틸라를 자신의 위대한 선조로 생각하고 있다. 모두 국경의 역사가 아닌 민족과 흐름의 눈으로 역사를 보고 있는 것이다.

서양 역사를 뒤바꾼 흉노-훈제국, 세계역사를 다시 쓰게 하는 홍산문화, 현대 세계경제사의 무대에 당당히 등장한 대한민국. 그 흐름의 역사를 보다 열린 마음과 시각으로 이해해 보았으면 하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1. 선비족의 기원과 화북을 제패한 화려한 등장

몽골고원을 근거로 거대국가를 이루었던 흉노에 이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기마유목민족이 선비(鮮卑)족이다. 선비족은 몽골-퉁구스계로 추정되는 유목민족으로, 몽골 동부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일어나 몽골고원과 만주의 경계에 있는 대흥안령산(일명 선비산)에서 목축과 수렵으로 생활하였다. 시라무렌강은 내몽골 적봉시 북부에서 발원하며, 바로 홍산문화지역의 중심이다. 중국 사서에서는 흉노는 ‘호(胡), 선비족은 오환과 함께 ‘동호(東胡)’로 불린다.

선비족은 1세기초부터 흉노의 지배를 받았으나 흉노가 남·북 흉노로 분열하자 후한과 연합하여 북흉노를 서쪽으로 몰아내고 몽골고원을 차지해 북아시아의 패자가 되었다. AD 156년 ‘단석괴’란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나 부족을 통합하고 흉노의 옛땅을 차지하여 거대국가를 건설했다. 선비는 동호의 남쪽 일파인 오환까지 통합하여 몽골고원-바이칼호-만주-오르도스 지역 일대를 장악하면서 최대 영토가 490만㎢에 달했다. 이때 선비는 중국(후한)을 침략하는 등 힘을 과시했지만 단석괴 사후 다시 분열되어 내몽골에서 할거했다. 대릉하 유역의 ‘모용부’, 시라무렌강 유역의 ‘우문부’, 그 남쪽의 ‘단부’, 내몽골 현 호화호특시 방면의 ‘탁발부’등이 두각을 나타냈다.

후한 멸망 후 중국을 진이 통일했으나 ‘8왕의 난’으로 혼란을 겪는 가운데 북방 기마민족인 ‘흉노·선비·갈·저·강’의 5개 민족이 남하하여 화북지방에 각각 정권을 세웠다. “오호십육국” 시대(AD 304~439)로, 북방의 오호(五胡)와 한족이 세운 16개 나라가 135년 동안 흥망을 거듭했다.
오호는 다음과 같다.

① 흉노 분열 후 내몽골 지역에 있던 ‘남흉노’는 북쪽 선비 세력의 압력으로 황허강의 오르도스 지역으로 남하하였다가 만리장성 내 중국영역에 자리 잡았다. 남흉노의 직계 후손인 ‘유연(劉淵)’은 외척이 한나라 출신이어서 한나라 후예라는 명분으로 오호족 최초 정권인 한(漢·前趙)을 건국한다(AD 304). 유연의 아들 유총(劉聰)은 ‛중국의 아틸라’로 불리는데, 진나라 낙양을 점령하고 장안으로 쳐들어가 인구의 절반을 학살한 인물이다. 당시 북중국을 장악한 흉노세력을 피해서 양자강 이남으로 피난간 중국왕조가 동진이다.

② 전조의 유총 사후 흉노의 다른 계통으로 갈족인 석륵이 후조(後趙)를 세우고 전조를 멸망시켰으나 불과 20년만에 선비족 모용씨에게 정복당했다(AD 352).

③ ‘선비족 탁발씨 부족’은 내몽골 호화호특을 근거로 하다 만리장성 아래로 남하하여 산서북부에 자리 잡고 시조 ‘역미’의 손자 ‘의여’가 대국(代國)을 세웠다(AD 310). ‘선비족 모용씨 부족’은 현재의 요녕성 창려를 근거로 만주 남부 요동과 요서지역을 장악하고 ‘모용 황’이 연국(燕國 : 전연·후연·서연·남연)의 기초를 다졌다(AD 337~438).

④ ‘티베트계 저족’은 감숙 남부와 사천 북부 산지에 근거하다가 ‘부홍’이 장안을 수도로 섬서 지역에 전진을 건국했다. 그후 국가기반을 확고히 한 ‘부견’이 모용의 지배지역을 모두 제압하고 북중국을 장악했으나 후대에 모용씨에 다시 자리를 내어줬다(AD 350~394).

⑤ ‘또다른 티베트계 강족’의 ‘요장’은 감숙성을 본거지로 하다가 ‘부견’ 사후 모용씨가 장악했다가 떠난 장안을 점거하여 후진을 세웠다(AD 386~417).

이처럼 왕국의 난립이 지속되던 대혼란기는 선비족 탁발부에 의해 다시 통일됐다. 탁발부의 역사는 ‘역미’에서 출발해 손자 ‘의여’가 대국(代國)을 세웠고, 5대손 ‘십익건’이 부족통합과 국가정비를 이루었는데, 십익건의 손자가 태조 도무제 ‘탁발규’이다. AD 386년 즉위한 탁발규는 모용의 후연을 정복하고 위(북위)를 건국하였다. 탁발규는 주위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오르도스에서 몽골 남부를 세력 하에 두면서 후연과 맞섰다.

AD 439년 3대 세조 태무제(탁발도)가 화북을 통일하여 거대한 탁발왕국을 건설해 남쪽 중국왕조(송)와 남북조시대를 열었다. 탁발사-도-준-홍-굉-각으로 이어져온 선비족 탁발왕조는 그러나 북방민족의 기풍을 잃으면서 문약해졌고 동·서로 분열되었다가 마침내 550~556년 북제·북주에 나라를 빼앗겼다. 이후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여 수나라를 건국한 양견(문제)은 북주의 군사귀족으로 한족과 선비족의 혼합혈통이다. 수에 이어 당을 건국한 당고조 이연도 마찬가지로 선비족 출신의 무장이다.
선비족 국가(왼쪽). 오른쪽은 프랑스국립 동양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3~4세기 선비족의 벨트 버클.
선비족 국가(왼쪽). 오른쪽은 프랑스국립 동양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3~4세기 선비족의 벨트 버클.
2. 기마군단 선비족이 건설한 국가들이 한민족 역사와 만난 현장

중국의 전국 7웅 중 패자인 ‘연’나라(오호 16국 시대 모용부의 ‘연국’과 다름)는 BC 300년경 ‘진개’를 앞세워 동호와 고조선을 공격했다. 중국은 전국시대를 진나라가 통일하고 한나라가 이어 받으면서 흉노정벌에 나섰으나 기마군단 흉노에 참패하고 오히려 흉노에 조공하게 됐다. 이런 와중에서, 한나라의 변방국이 된 ‘연’에서 고조선 계열 인물로 알려진 위만이 고조선 일부(번조선)지역을 점령하여 위만조선정권을 세웠으나, (BC 194) 한과의 전쟁 끝에 역사에서 사라졌다.

고구려의 영토확장 정책에 선비 모용부의 ‘연국’은 큰 걸림돌이 되었다. 고국원왕의 고구려는 연왕이 된 모용황의 침공(342년)으로 심대한 타격을 입는 등 후연 시대까지 이들은 고구려 서북방 팽창정책에 최대의 걸림돌이었다. 그러나 불세출의 영웅 광개토대왕은 후연의 수차례 공격을 격퇴시키고 대강국 고구려의 기틀을 공고히 했다. 광개토대왕은 5호 16국 시대로 불리는 북중국의 혼란 상황을 적절히 이용해 국력을 최대한 신장시키는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북위가 통일을 이루고 군사강국으로 등장하자 장수왕은 남북조 등거리 외교로 고구려를 안정시켰다.
선비족 무덤벽화 무사도(연나라 시대, 내몽골 조양)와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왼쪽부터).
선비족 무덤벽화 무사도(연나라 시대, 내몽골 조양)와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왼쪽부터).
고구려는 이후 선비인들이 건설한 수·당나라와도 국운을 걸고 싸웠다. 수 문제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강국부민 정책을 추진했으나, 고구려 침략 전쟁으로 국력을 소진시키는 바람에 결국 실패했다. 598년 문제가 고구려 침략에 실패하자, 양제는 전왕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113만 대군으로 침공했으나 살수에서 참패하고 평양으로 진공한 4만명 수군은 몰살되었다. 613년, 614년에 양제는 2·3차 고구려 침략전쟁을 일으키나 또 다시 실패했다. 수나라는 결국 37년만에 문을 닫았다.

당태종 역시 북방산서지역 한족과 선비족 혼합혈통의 귀족집안 출신이다. 이는 당 또한 민족융합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북방민족이 중원에 진출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건국되었음을 말해준다. 이연의 아들 이세민은 당 태종으로 즉위한 후 중원을 통일하였으나 두 번에 걸친 고구려 정복에는 실패했다. 그 후 3대 고종이 신라와 연합하여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안동도호부를 평양에 설치했으나 신라가 당을 격퇴하고 이를 차지했다.

3. 기마군단의 역사속에서 비추어 보는 한민족의 고대역사

스키타이, 흉노, 훈, 선비 등 AD 5세기 이전에 유라시아대륙에서 활약한 기마유목국가들은 자신들이 기록한 역사가 거의 없다. 반대로 그들로부터 정복 또는 침략당한 정주민의 기록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들 기록에는 왜곡이 많을 수 밖에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기마군단이 건설한 국가들은 세계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만의 독특한 역동과 흐름의 흔적이 너무나 뚜렷히 남아있다.

유라시아대륙의 기마유목민족이 건설했던 나라들은 민족이나 국경 개념이 대단히 개방적이었다. 유목민족제국은 대부분 다수 민족의 부족 연맹체라 할 수 있다. 흉노제국은 알타이 부족 연맹체로 튀르크, 몽골, 만주-퉁구스, 한(韓)민족계 등이 어우러진 혼성국가였다. 흉노란 제국은 있으나 흉노민족이란 없다. 또 선비란 민족은 있으나 선비라는 통일국가는 없다. 오늘날 터키에서는 흉노제국을 그들의 초기국가라 하고, 몽골에서는 자기들의 고대국가라 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오히려 한민족과 흉노의 관계를 언급하면 민족주의 과대 발상이라 하는 한국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한(韓)민족은 하나의 민족이 아니다. 단일민족이란 이름으로 미화할 대상이 아니며 그럴 이유도 없다. 광활한 유라시아 동·서 스텝지역에서 오랜 기간 삶을 영위했던 기마유목민족의 면면한 DNA가 오늘날 한국인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필요도 부정할 수도 없다. 우리의 고대국가에서는 언어·관습제도 등 많은 부분에서 알타이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어 이들이 알타이계의 부족연맹에서 출발했을 것으로 보여지는 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어떻게 다른 세상과 교류·협력했고 또 다른 세력과 투쟁하면서 살아왔는지, 고대 화려한 역사로부터, 어렵고 참담했던 기록으로부터 시작해 현재 우리가 묵도하는 기적의 현장에 이르기까지 마음의 여유를 갖고 풀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유라시아 기마유목민족사의 흐름에는 마음을 닫아버리고, 실존했던 고조선이 역사에서 사라진데 대해서는 눈을 닫아버리고, 중국이 가져가는 고구려사에 대해서는 인식을 닫아버려서는 우리의 정체성을 생각해 볼 수조차 없게 되는 것이다.

 

1. 유라시아지역에 최초의 대제국을 건설한 돌궐

흉노는 유라시아 대초원지역에서 기마유목민이 건설한 최초의 스텝제국이었으며 기마유목국가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흉노는 유라시아대륙 양단에 강력한 흔적을 남겼으나 한나라와 쟁패하는 가운데 분열되면서 유목민 선비에 패배해 역사에서 사라졌다(151년). 선비족은 몽골고원 일대를 장악하고 대제국을 건설하였으나 단석괴 사후 다시 분열되어 중국의 화북지방으로 남하하여 5호16국 시대를 열게 됐다(304년). 선비의 남하로 생긴 공백을 틈타 몽골계 유연이 몽골고원을 차지하고 150년 가까이 지배했으나 또 다른 유목민 튀르크계 돌궐에 멸망당했다(330~555).

흉노의 후예로 알려진 튀르크족에서「부민(Bumin)」카간이란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 돌궐을 건국(552년)했으며 나라의 정식 명칭은 Kok Turk인데, 이는‘하늘의 신성한 튀르크’란 뜻이다. 부민카간을 이은「무한(Mukhan)」카간(553-572)은 최고 전성시대를 열었는데, 돌궐비문은 그에 대해“사방에 군대를 보내 모든 종족을 복속시키고, 머리를 가진 자는 머리를 숙이게 하고, 무릎을 가진 자는 무릎을 꿇게 하였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 그의 장례식에는 중국, 티베트, 비잔틴, 유연, 거란, 고구려 등에서 사신이 왔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돌궐은 유라시아지역 동서·남북에 걸쳐 건설된 최초의 대제국으로 최대 영토가 1,000만㎢를 넘었고,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당나라와 쟁패하면서 역사의 중심에 등장했다. 그러나 돌궐은 초원제국의 분열이라는 역사상 전례를 벗어나지 못하고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돌궐과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한 서돌궐로 분열됐다(582년). 둘로 나뉜 돌궐은 국력이 쇠잔해지면서 동돌궐은 630년, 서돌궐은 651년에 각각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그 후 50년의 암흑시대를 거치면서 당에 대해 꾸준히 독립투쟁을 전개했고, 마침내 682년「쿠틀룩」이란 뛰어난 지도자가 나타나 거의 완전하게 돌궐을 재건하여 후돌궐시대를 열었다. 후돌궐은 720년경「빌게」카간 때 최전성기를 맞이했는데, 이시기에 세워진‘오르혼비문’은 유라시아 기마유목민족사의 기념비적인 유물이다. 빌게카간 사후 급속히 약화된 후돌궐은 745년 위구르·당·티베트의 협공을 받아 멸망했다.

동돌궐에 속했던 유목민족은 전통을 유지했으나 불교의 영향으로 불교화했고 이후 원의 지배하에 들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 서돌궐은 초원지역에서 유목과 오아시스 농경생활을 병행하다가 압바스 왕조의 지배하에서 이슬람을 받아들이면서 일부 세력은 터키 지역으로 계속 서진했다. 이들 서돌궐세력은 960년경 셀주크 장군의 지휘로 실크로드를 따라 부하라·사마르칸트로 이주했고, 1037년 토그릴이 셀주크튀르크를 건국했다(1037~1194). 서진을 계속한 셀주크튀르크 일족은 아나톨리아 지역(터키)에서 비잔틴 제국을 격파하고 룸셀주크를 건국했다(1077년). 룸셀주크 세력약화 후 서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오스만1세가 오스만공국을 건국(1299년)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튀르크제국의 출발이다.
돌궐의 황금유물./사진=몽골국립박물관
돌궐의 황금유물./사진=몽골국립박물관
2. 북방민족 돌궐과 통일중국의 대결

돌궐이 건국되던 시기에 중국은 5호16국 시대를 지나 남북조시대에 들어섰으며, 돌궐은 북위가 분열되는 상황에서 무력으로 북조를 압박하는 등 우월한 지위를 견지했다. 589년 중국은 수나라가「통일」하고 돌궐은 동·서로「분열」되는 큰 정세변화가 일어났다.「통일」과「분열」은 향후 양국의 역사전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키워드다. 통일 수나라는 돌궐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돌궐 분열을 더욱 조장하고 그 결과 더욱 약화된 돌궐을 압도하는 위치에 서게 되는데, 이것이 역사다.

수나라에 이은 강력한 왕조 당나라는 돌궐과 다시 대적하게 된다. 당나라는 290년간 존속한 통일 왕조로, 중국은 한나라에 이어 제2의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자신을 진시황과 한무제에 비견했던 당태종 이세민(627~649)은 끊임없는 팽창정책을 추구했으며 따라서 그에게 가장 큰 위협이며 숙제는 바로 고구려와 돌궐이었다. 고구려는 수나라 대군을 격파하고 결과적으로 멸망에 이르게 한 바 있고 돌궐은 수시로 중국영역을 공략하면서 국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당태종의 집념으로 630년 동돌궐이, 651년에는 서돌궐이 당에 멸망했다. 이어 668년에는 고구려 또한 나·당 연합군에 패하고 700년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다.

당나라의 국력은 대단했다. 당은 선비계가 세운 왕조로, 당나라 사람은 남북조시대 이전의 중국 한족의 후예라기보다는 한족과 이민족이 융합한 새로운 공동체라 할 수 있다. 당나라는 주변의 이(異)민족의 새로운 피를 수혈하고 문화를 교류하는 등의 개방정책을 통해 융성했고 전성기에 교류한 국가가 70여 개국에 달하는 등 중국왕조의 대명사가 되었다. 수도 장안은 전 세계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인 국제도시로서 문명과 교통 교류의 허브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당나라 현종은 서역장악을 위해 고구려유민의 후예 명장 고선지로 하여금 서역원정을 하게했다. 고선지는 11년간(740~751) 다섯 차례 출전했다. 747년 출병시에는 해발 4,600미터의 탄구령을 넘는 전설의 진군을 했고, 중앙아시아, 파미르, 실크로드를 관장하는 안서도호부의 책임자가 됐다. 연전연승하던 고선지장군은 751년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의 패권을 두고 타쉬겐트 부근 탈라스강 유역에서 압바스·티베트·돌궐의 이슬람 연합군과 맞선 대전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패했다. 고선지군대는 중국의 중앙아시아지역의 마지막 진출세력이었고, 이 전투의 패배로 중앙아시아 지역에 이슬람 세력이 뿌리를 내리게 됐다. 고선지 장군은 그 후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모함을 받아 죽었다.
터키교과서에 실린 돌궐의 전성기 영토 지도.
터키교과서에 실린 돌궐의 전성기 영토 지도.
3. 돌궐시대와 동아시아 최강 기병국가 고구려 역사

돌궐 건국 전 몽골고원과 내륙 아시아지역은 150년간 몽골계 유연이 지배했으며, 유연은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돌궐이 유연을 멸망(552년)시키고 동진하면서 여러 유목민족과 거란을 복속시킴에 따라 고구려의 서북국경에 전운이 감돌게 됐다. 돌궐은 고구려와의 사이에 있는 거란·말갈족에 대한 정벌전쟁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와 적대적 관계에 서게 된 것이다.전성기 돌궐의 무한카간은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고구려는 말갈족과 연합하여 이를 격퇴하기도 했다. 당시 돌궐은 동로마제국과 교류하였기 때문에 동로마 문헌에‘고구려인들은 위험에 대처하는 강인한 정신력과 매일 매일의 신체 단련으로 투지가 높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고구려의 국력과 고구려인의 기상을 실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수나라가 건국되고, 돌궐이 동서로 분열되는 582년경 이후에는 고구려와 돌궐은 상호 우호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강력한 수나라의 등장이 돌궐과 고구려의 관계를 우호적이고 긴밀하게 바꾼 것이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반면 돌궐세력은 약화되면서 고구려는 홀로 수와 대적하게 되나 끝내 수를 격파하고 침공을 막아냈다. 이어 등장한 당나라는 동·서돌궐을 멸망시킨 후 팽창정책을 지속했고 돌궐 없이 홀로 남은 고구려는 영류왕·연개소문 시대에 단독으로 최강의 당을 상대하다가 668년 결국 멸망했다. 강한 북방유목민족국가가 존재할 때는 중국을 견제하여 고구려가 안정될 수 있었으나 북방세력이 쇠퇴할 때는 강국 고구려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682년 돌궐이 당의 지배에서 벗어나자 당이 다시 돌궐과 전쟁에 돌입하면서 세력의 공백기가 생겼고, 이를 이용해 고구려 후예들은 만주일대에서 발해를 건국하여 한민족사의 남북국시대(신라+발해)를 열었다. 발해건국에 참여한 말갈은「숙신→읍루→물길→말갈→여진」으로 시대별로 달리 불리웠던 우리민족의 갈래다.

중국통일 후 돌궐의 분열과 멸망은 고구려의 멸망으로 이어졌고, 후돌궐의 부활은 고구려의 부활(발해의 건국)로 연결됐다. 이는 초강대국의 등장에 따른 인접국가의 운명과 이에 맞서는 전략에 관한 중요한 시사를 하고 있는 대목이어서, 오늘날의 동아시아 정세를 판단할 때도 참고 할 필요가 충분히 있다고 보여 진다.
중국의 통일왕조인 한나라시대에는 고조선과 흉노의 협력을 경계했고, 수·당시대에는 고구려와 돌궐의 동맹을 경계했다. 이것이 강력한 중앙집권국가 통일 중국왕조의 대외전략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외교정책의 기본인 것이다.
동아시아 최강 기병국가 고구려의 몰락은 초원제국 돌궐이 멸망했기 때문

 

기마유목민족 돌궐과 한민족의 관계(上)

1. 유라시아 스텝지역에 수많은 튀르크국가를 건설한 기마유목민「돌궐」, 현대의「터키」로 이어지다.

돌궐족은 유라시아 스텝지역 역사의 핵심인 기마유목민족이다. 튀르크족으로도 불리는 돌궐은 오늘날의 터키를 건국하기 전 이미 수천년에 걸쳐 아시아를 중심으로 유럽·아프리카 등지에 100여개의 크고 작은 국가를 건설했다. 튀르크족은 알타이산맥에서 기원해 서쪽으로 진출했다. BC 20세기경 등장한 흉노는 튀르크족과 몽골족이 혼재된 유목민 집단이어서 흉노가 튀르크의 선조라 할 수 있다. 이 튀르크가 아시아 동부에서 서진하면서 유라시아 전체로 그 영역을 확대했다.

최초의 튀르크족 국가는 BC 3세기의「흉노(아시아훈제국)」다. 흉노가 분열되면서 서진한 세력은「훈(유럽훈제국)」을 건국했고, 이어 질풍노도와 같이 유럽에 엄습하여 세계사를 뒤흔들었다.

다음으로 등장한 튀르크국가가「돌궐(괵튀르크)」로, 튀르크라는 이름을 쓴 최초국가다. 돌궐은 745년 멸망하고, 알타이산맥에 살던 또다른 튀르크계「위구르」가 새로운 제국을 건설했다. 이 시대를 전후하여 튀르크족이 서진하면서 이슬람화 하게 되고 이후 이슬람 튀르크 국가들이 중앙아시아 등지에 계속 세워지게 된다.

11세기 들어 실크로드를 따라 서진한 튀르크 일파가「셀주크튀르크」를 건국했으며(1037), 만지케르트전투(1071) 승리로 비잔틴제국을 제압하고 오늘날 터키 땅인 소아시아 반도까지 차지해「룸셀주크」라는 나라를 세웠다. 몽골의 공격으로 셀주크제국이 멸망한 후 룸셀주크도 약화되면서 오스만공국이 세워졌고 이후「오스만튀르크제국」으로 이어졌다. 16세기 슐레이만 1세때는 제국의 전성기로 발칸반도, 헝가리, 소아시아, 흑해 일대, 이집트 및 아프리카 북부 등을 차지하여 지중해를 장악했으며, 최대 영토는 560만㎢에 달했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이 제국도 그러나 레판토해전의 패배(1571), 2차 빈 포위 실패(1683) 등으로 영토를 잃어가다 19세기에는 발칸반도, 이집트, 아랍지역까지 상실하면서 급속히 약화되었다. 이후 1908년 청년터키혁명을 거쳐 1923년 ‘아타튀르크 케말 파샤’에 의해 오늘날의 터키공화국이 건설됐다. 이렇게 돌궐은 552년 건국 이래 몽골고원에서 유럽지역까지 광대한 스텝지역을 무대로 종횡무진 활약하면서 1·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튀르크국가를 건설하는 등 유라시아스텝지역의 역사를 계속해 써 내려 갔다. 오늘날 터키의 교과서는 이들 튀르크국가를 모두 터키 역사로 가르치고 있다.
튀르크인들이 사는 세계지도(위)와 6.25 참전기사(아래)/자료=터키교과서
튀르크인들이 사는 세계지도(위)와 6.25 참전기사(아래)/자료=터키교과서
2. 기마유목민 최초로 문자기록을 남기고 동서교역의 중심 실크로드를 경영한 초원제국 돌궐

유라시아 기마유목민족은 약 2,500년에 걸쳐 세계사의 중심무대에서 활약했다. 돌궐도 바로 이 기마유목민족이다. 기마유목민족들은 정주민족과는 달리 오랜기간 자신의 문자를 갖지 못했고, 그 결과 기록문화가 취약하다. 그래서 이들에 관한 오랜 기록은 정주민족의 시각에서 보고 쓰여진 것들 뿐이다. 「스키타이」는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그 존재를 처음 기록했고, 「흉노」에 대해서는 사마천이 사기에서 언급했다. 이들이 본 스텝지역의 기마유목민족은 매우 호전적이고 잔인하며, 더 나아가 비문명과 비문화의 대명사로까지 다루어지기도 했다. 이것이 오늘날 유라시아스텝민족의 역사가 왜곡되고 세계사에서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는 한 원인이 아닐까.

그런데 돌궐은 예외였다. 그들은 유라시아 스텝민족 중에서 최초로 자신들의 문자를 가졌고 기록을 남겼다. 몽골북부 오르혼(Orkon) 강주변에서 AD 720-735년경 세워진 돌궐어 비석이 발견됐다. 이 비석은 후돌궐지도자들의 업적을 기념하는 것으로, 돌궐제국은 물론 유라시아 기마유목민족의 잊혀진 역사를 다시 꺼내어 새롭게 보게 만드는 기념비적인 문화유산인 것이다. 이 비석의 비문에는 돌궐제국의 건국, 역대 카간들의 업적, 주변국과의 관계, 군사 및 사회제도, 법과 관습 등 스텝지역 기마유목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비석은 1709년 러시아-스웨덴 전쟁에서 포로가 된 스웨덴 장교 ‘슈트라흐렌베르그’가 포로 생활 중에 발견하여 1730년 학계에 소개함으로써 알려졌는데, 19세기말에 본격적 연구가 진행되어 덴마크 학자 ‘톰센(V.Thomsen)’이 판독했다.

이 비문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돌궐어 문헌이다. 그런데 이 비문 중 퀼테킨비문에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바로 고구려에 대한 것으로, 572년 ‘무한카간’이 사망하자 고구려가 사절을 파견했다는 기록이다. 이 비문 동쪽면 40줄 중 네 번째 줄에는 ‘동쪽의 해뜨는 곳으로부터 뷔클리(bükli<bök(kö)li<mäkkoli(맥코리)로도 읽는다)…에서 문상객이 와서 애도했다’고 적혀있다. ‘뷔클리’는 ‘맥족고구려’라고 해석되고 있다. 이는 튀르크족이 서방으로 진출하면서 고구려의 존재를 ‘코리’라는 이름으로 알렸다는 것을 말해준다. 당시 돌궐과 교류하던 동로마 문헌에 고구려가 등장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이후 10세기 왕건이 고구려를 계승하여 고려라 이름 했으며, 고려가 남송 및 아랍세계와 교역하면서‘코리아’라는 이름으로 널리 소개됐다. 따라서 코리아 명칭은 고구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는 민족구성과 언어, 관습, 문화 등은 물론 이름까지 명백한 한민족고대국가로 중국이 시비할 사안이 아니다.
퀼테킨(왼쪽)과 퀼테킨 비문/사진=카자흐스탄 문화정보부
퀼테킨(왼쪽)과 퀼테킨 비문/사진=카자흐스탄 문화정보부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게 된 돌궐은 중국과 비잔틴제국간의 교역로인 실크로드를 장악하게 된다. 실크로드에서는 소그드인이 동서교역을 맡고 있었고, 돌궐의 보호 아래 교역이 이루어졌다. 돌궐은 교역확대를 위해 비잔틴제국과 직접 무역을 위한 협정을 체결하고 이를 계기로 돌궐과 비잔틴 간에 우호관계가 맺어져 페르시아를 동·서에서 견제하는 구도가 됐다. 이는 중국의 수·당에 대항하는 고구려와 돌궐이 우호관계를 갖게 되는 상황과도 비교해 볼 수 있다(본고 11편 참조). 고구려를 이어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도 돌궐과는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코리아' 명칭이 고려가 아니라 고구려에서 유래했다는 근거
/하편에 계속됩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