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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정복남 영상미디어 기자 |
이철용(63) 전 의원은 “박원순 변호사는 남의 희망은 짓밟고, 자신은 ‘아름다운 가게’ ‘희망제작소’ ‘소셜 디자이너’ ‘나눔 1%’라는 감성적 간판으로 정치권에 진입하려는 두 얼굴을 가진 시민운동가”라며 “2000년 낙선·낙천운동 때는 내가 정치인생을 접었지만, 2011년 서울시장 선거 때는 그가 낙선·낙천운동 대상이 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9월 27일, 기자는 미 하버드 대학원 출신 현각 스님(본명 폴 뮌젠)이 머물던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옥에서 인생상담소 ‘통(通)’을 운영하고 있는 이철용 전 의원을 만났다. 이 전 의원은 기자에게 “지난 9월 6일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서울시장 보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박원순 변호사를 지지하고 홀연히 떠나던 날, 솔직히 잠을 청할 수 없었다”면서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박원순씨만은 절대로 서울시장 후보가 돼선 안 된다”고 했다.
이 전 의원은 빈민운동가 출신으로 1988년 문익환 목사와 이문영 당시 고려대 교수가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에게 추천해 정계에 입문했다. 첫돌 전에 결핵성 관절염을 앓아 장애3급인 그는 장애인 최초의 지역구 국회의원(도봉을)이었다. 13대 의원 시절, 그는 ‘싸움닭’으로 통했다. 그는 1989년 5공화국 청문회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향해 “살인마!”라고 외쳤고, 1991년 낙동강 페놀 방류 사건이 일어났을 때 비커에 페놀을 붓고 환경처 장관에게 “당신이 먹어보라!”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초등학교(서울 종암초)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그는 자신의 빈민운동 경험을 살린 소설 ‘꼬방동네 사람들’ ‘어둠의 자식들’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낙선·낙천 대상 86명 중 59명 떨어져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한 박원순 예비후보는 2000년 16대 총선 때 총선시민연대의 집행위원장으로 낙선·낙천운동을 이끌었다. 이 전 의원은 “그때도 지금처럼 정치 불신이 심했고, 시민 권력은 기성 정당을 압도했다. 총선시민연대는 표적 퇴출 운동을 벌였고, 김대중 정권은 ‘낙선·낙천운동은 시민의 저항권’이라며 불법 운동을 밀어주었다”고 했다.
2000년 1월 전국 412개 단체들로 구성된 총선시민연대는 16대 총선에서 부적절한 후보자에 대한 공천 반대, 낙선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그들은 4월 3일 공천 반대자 64명, 반인권 권력과 납세 비리, 저질 언행 관련자 22명 등 모두 86명을 낙선 대상자 명단에 포함시켜 발표했다.
결국 86명의 낙선 대상자 가운데 59명(68.6%)이 떨어졌고, 22명의 집중 낙선 대상자 중 낙선자는 15명(68.2%)이었다. 특히 수도권에서는 20명의 낙선 대상자 중 19명이 무더기로 떨어져 낙선운동의 위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박원순 변호사가 주도한 운동은 그 순수성을 의심받았다. 낙선·낙천운동 대상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던 JP(김종필)는 “총선연대는 홍위병(紅衛兵)”이라고까지 했다.
낙선운동 지도부는 그후 선거법 위반으로 톡톡히 대가를 치렀다. 30여명이 법정에 섰고, 울산과 광주 등 일부 지역의 대표자들은 대법원에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2001년 8월 헌법재판소는 ‘총선연대의 낙선·낙천운동을 금지하는 현행 선거법은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사실 확인도 거치지 않고 명단 작성”
- 총선시민연대가 낙선 대상자로 지목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기업에서 2000만원을 받았다는 것인데, 기업에서 직접 장애인단체(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 준 돈이었습니다. 검찰에서 서너 시간 참고인 조사를 받고 무혐의로 끝난 일이었습니다. 16대 총선을 앞두고 당내(새천년민주당)에서 ‘이철용에게 전국구라도 주자’는 얘기가 돌고 있을 때 총선연대가 공천 반대 인사 리스트에 내 이름을 올렸던 겁니다.”
이철용 의원이 낙선·낙천 대상자 명단에 자신이 들어가 있는 데 대해 극력 반발하자, 총선연대는 긴급 간부회의를 열었다고 한다. 이 의원이 발표 당일인 2월 2일 총선연대 사무실로 찾아가 실무자들과 박원순 위원장에게 “1997년 한보그룹으로부터 한 푼도 받은 사실이 없으니 명단에서 즉각 이름을 빼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 전 의원은 “총선시민연대 관계자들은 당황했고, 2월 7일 총선시민연대 관계자와 함께 대검을 찾아갔다”면서 “총선연대는 사실 확인도 거치지 않고 정치적으로 명단을 작성한 것이 확인된 셈”이라고 했다.
결국 2000년 2월 10일 총선시민연대는 “사실 관계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애매한 설명과 함께 이 전 의원을 2차 낙선·낙천 대상자 명단에서 슬그머니 뺐다. 이 전 의원은 “총선연대는 당시 내가 대표로 있던 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을 멋대로 끌어들여 단체 이름을 실컷 도용해 전국적 지지를 받는 것처럼 과장하다가, 일주일 후에 일방적으로 ‘귀 단체를 제외시킨다’는 공문 한 장을 달랑 보내는 불법도 저질렀다”고 했다.
이철용 전 의원은 낙선·낙천 명단에서 ‘유일하게’ 이름이 빠졌지만, 그 길로 정치적 재기(再起)를 접고 말았다. 그는 “한 번 대상자에 이름이 오르자, 정치적으로 치명상을 입게 됐다”면서 “이념의 시대도, 독재 타도의 시대도 끝나고 진짜 전문가가 국회에 가야 하는 시대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도 정치를 떠난 또 하나의 이유”라고 했다.
- 억울했다면 이후에 왜 바로잡지 않았습니까.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개적으로 사과하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떠들었죠. 그런데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어요.”
세월이 지나 분노도 사그라질 무렵인 2010년 8월 무렵, 박원순 변호사는 최열 환경운동연합 전 대표까지 대동하고 두 차례나 이 전 의원에게 “식사라도 하시자”며 불쑥 나타났다. 박원순 변호사는 당시 “이 선배님이 사과 편지를 쓰라면 쓰겠다”고 했다고 한다. 이 전 의원이 “이 시간 이후로 당신을 용서할 테니, 누가 그 명단을 내려보냈는지 그것 하나만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하자, 박 변호사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선배님 이름을 누가 낙선·낙천운동 대상자에 집어넣었는지 정말 모른다”며 모르쇠로 일관했다고 한다.
“뒤에선 사과하고, 앞에선 부인”
이철용 전 의원은 2010년 9월 4일자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이 사실을 언급했고, 당시 인터뷰한 기자가 ‘미안하다’는 말을 분명히 했는지를 확인하자, 최열씨는 “만나서 미안하다고 했다”고 말했으나, 박원순 변호사는 “노 코멘트 하겠다”고 했다. 이 전 의원은 “기자가 확인에 들어가자, 180도 다른 행동을 보인 것”이라며 “골방에서는 사과를 한 그가 언론에 대해서는 그 사실을 부인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치부(恥部)를 감추기에 급급한 얄팍한 정치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철용 전 의원은 “박원순 변호사가 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르고, 뒤축이 너덜거리는 구두를 신고 다니는 ‘생쇼’를 더 이상 방치하면 안 된다”면서 “국민은 강남 61평짜리 월세 아파트 논쟁, 시민단체의 돈줄 논란 때문에 그를 거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씌워 정치 생명을 끊어놓은 것도 모자라 잘못을 뉘우치는 양심마저도 외면한 그의 도덕성을 거부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