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신각라 누루하치
청태조(김누얼)
누러하치(後金=大淸帝國)
애신각라 누루하치
[愛新覺羅-大淸帝國]
조선(주신)의 영역은 한반도(일본포함),만주대륙(연해주포함),북중국(몽골,티베트)에 이르렀습니다.
주신 말기에 단군께서 스스로 하야하신후, 국력이 약해지자 쥐나(중국)족의 연나라가 번성하여 고조선의 영역이 몽고지역과 고구려지역으로 분단되었고, 이후에 다시 위화도회군의 이조개국에 의해 만주와 반도가 분단되었으며 이조를 접수한 일제가 미소에 패망하면서 반도마저 분단되어 오늘까지 지내왔는바 동북공정 즉, 김정일에 의해 또 그나마 한반도 반(북한영토)이 지나의 접수 위기에 처해있다. 주변4대강대국중에 한반도 통일을 바라는 나라는하나도 없는바 이는 한반도통일이 될경우 한민족만 좋지 미중러일에는 도리어 위협적존재가 되기때문임이 자명하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대한민국내에 통일을 반대한 매국노땅소송후손들이 상당수 존재하는바, 이들은 모두 부정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자들이다.
한민족전통의 실사구시의 이념에 따라, 자신의 사리사욕과 부귀영화를 추구하지 않고 검소하게 살면서 부국강병,고토수복의 일념으로 평생을 다받쳐 청렴결백하게 살아온 김누얼! 불가능으로 여겼던 중원정복을 마침내 이룬, 오랑케 야만인이라고 불렸던 고려의 정통후손 려진족의 金나라 청제국! 한민족 10대 위인전 제4편 누런하치(시라소니)편을 회원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청태조 스라슨 누루하치]
금씨(김씨金)로써, 함경북도 회령 출신인 누런하치는 어려서부터 좀 병약한 편이었기에 호랑이처럼 생겼으나 몸이 허약하다하여 큰고양이 과인 스라슨(=북한과 만주에쪽에 서식하던 맹수류로써 일명 시라소니라고도 하며 하이애나와 비슷한 맹수류로 호랑이 다음이라 하여 누런하치라고 불렀슴)즉, 누런하치라고 이름지어짐(당시에 한민족의 이름은 현재의 중국식이 아니었기때문에 순 우리말로 부르기쉬운 이런식이었슴: 예)붙들어라=부떠리, 개똥이,누렁이,바둑이(바둑의 원조는 고조선), 양양이, 우무리,두리등....)
[만주] (세상의 중심이되는 땅이란 뜻=한주)
지금은 만주라고 불리워지고, 이씨조선이후부터 한반도하고 다른 개념이 되어버렷지만
이조 이전까지 ,만주와 한반도는 하나의 개념이었고,만주라고 따로 떼어서 전체를 부르는 단어는 없었다. 이러한 개념은 주신 = 고구려 =신라= 고려때까지 이어졌으나 반역의 이조정권(중국변방국,자치성)이 들어서면서 만주지역의 동포들이 신라때 발해처럼 독립하면서 지금처럼 만주지역의 개념이 새로이 자리잡게 된것이고 이렇게 한반도와 만주가 분리되기 시작하였다.
이곳은 태초부터 한민족의 오래된 보금자리였으며, 5천년이 넘도록, 조상의 뼈가 묻힌 단군의 주신(조선), 고구려(높구려=백두산), 발해(진), 거란(요),돌궐(몽고,원),고려 금 청으로 이어진 한민족의 전통 지역이다.
지금은 만주라고 불리워지고, 한반도하고 다른 개념이 되어버렷지만
이조 이전까지는 ,한반도는 하나의 개념이었고,만주라고 따로 떼어서 전체를 부르는 단어가 없었다. 이러한 개념은 주신 = 고구려 =신라= 고려때까지 이어졌으나
반역의 이조정권(중국자치성)이 들어서면서 만주지역의 동포들이 발해처럼 독립하면서 지금처럼 영역의 개념을 새로이 한것이고 이렇게 비로서 분리된것이다.
이곳은 태초부터 한민족의 오래된 보금자리였으며, 5천년이 넘도록, 단군의 주신(조선), 고구려(높구려=백두산), 발해(진), 거란(요),돌궐(몽고,원),고려로 이어진 한민족의 영역이다.
그러나 이성계의 위화도 반역으로 원나라와 고려가 동시에 멸망하면서
이 와중에, 만주땅과 반도지역은 한민족인 려진과 한민족역사이긴 하지만 중국화교출신의 정권인 이조로 갈라져 자리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남북분단과 함게 현재까지 이르게 된것이다.
청나라의 이조정벌, 삼전도 예의은 누러하치의 유지를 받든 후대의 실현으로써 위화도 회군에 대한 역사적 심판 의 의미가 있었다. 단순히 발해의 "중국 정복 전, 신라 정벌 계획" "거란의 중국정벌전 고려정벌과 같은 전략적 의미만 있던것이 아니다. 누얼의 후손은 첫째. 태조의 유지실천 2. 중국정벌전 선대의 유지 실천(역사적 응징)의 의미가 분명하다는점을 밝힌다. (청연사)
당시, 이조의 지배국이었던 명나라는 고려인들(려진)들이 방어문제상 스스로 떠난 요동지역만 차지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 동쪽의 광활한 대지(만주지역)에는 여전히 상당한 인구수의 고려족인 려진인들이 살고있기때문으로써(려진:麗振 고구려 려자와 발해의 최초이름인 진자를 따 만든 이름임, 여진(女眞族)이라고 하는것은 이러한 사실을 조작한 중국사인데 세상에 여자이름을 따 민족의 이름을 짖는 나라가 어디있겠는가? 이런점을 상식에 비추어 생각해야지 이조식으로 무조건 중국이름을 사실대로 다 믿으면 왜곡,조작역사를 믿게되는것이니 참고바람) 그들의 행정력이 용이한 요녕성 지역만 지배하게 되었다.
려진족은 우리말 주신(중국말로 조선朝鮮)족으로 우리와 같은 민족이며 한 갈래이다.
만족 대사전(滿族大辭典)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듯이
여진(두음법칙으로 여진女)은 만족의 선세(滿族的先世)이며 만주어 발음으로 주신[朱先, 朱里, 諸申, 혹은 珠申]이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와 같은 민족[朝鮮=珠申] 주신족임은 명백한 진실이다.
개천(開天) 5457년: 서기 1559년, 만주의 대영웅 누루하치[努哈赤]가 멍거테무얼[猛哥帖木]의 5세손, 탑극세(塔克世)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성씨는 애신각라(愛新覺羅)인데, 애신(愛新)은 실라[新羅]를 사랑하고, 각라(覺羅)는 실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이름이 뜻하는 것처럼 옛 조국 실라를 잊지 않고 그리워하는 옛 실라의 망명 집안인 것은 이미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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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단민사는 애신각라는 김태조(金太祖)와 같이 계림(鷄林) 김(金)씨의 후손이라고 했다. 신라가 망한 후 경주 김씨 경순왕의 망명 왕자들이 금강산과 흑룡강성 그리고 백두산 속으로 흩어졌다가 훗날 제각기 힘을 모아 다시 흥기했던 것이다. |
개천(開天) 5481년: 서기 1583년, 누루하치는 돌궐의 태무진이 그랬고 고려의 최영이 그랬드시 한민족의 자존심과 주신의 원래영역을 되찾고저 하는 큰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분리되어있는 각 부족들을 통일해야만 하는것이 순서였다.
이러한 뜻으로 시작된 만주지역의 민족 통일전쟁은 수년간 계속되었고, 마침내 건주 여진(여진이 여러 부족중 가장 강력했던 부족)을 제압, 합방 한 후, 서기 1587년에는 쑤쯔허[蘇子河] 상류에 최초의 성을 구축하여 만주지역의 국가중 최고로 강역한 국가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누러하치는 1604년 전 자사(각지역 수령)들을 불러놓고 "이제부터 시작이다" 라며 본격적인 통일전쟁을 준비하도록 명령하였다.
서기 1607년에는 후이파, 13년에는 우라[烏拉]를 제압,병합하여 명실공히 통일 여진국을 만든 후 서기 1616년에 한(큰, 칸 汗)의 지위에 올랐다. 새 나라의 이름은 대김제국(大金帝國)의 영광을 계승하는 의미에서 후김(後金)으로 하고 연호를 천명(天命)으로 정하였다.
누루하치는 그동안 우리말과 함께 써 오던 한자(漢字)가 발음하기에 소리말이 아니라 불편하다하여 새로운 글자 "려진 문자"를 발명토록하였으며, 주신,고구려,고려로 이어진 수리전술을 개발하여 팔기제도(八旗制度)를 제정하여 군대의 기본으로 삼도록 하고 도성을 허투아라[赫圖阿拉]로 옮겼다.
서기 1618년, 마침내 대명 선전포고를 하고 뛰어난 군사력으로 푸순[撫順]을 점령하고,청하(淸河)지방의 한족들을 멀리 서쪽으로 추방함으로써 이 지역을 완전히 다물(입안에 넣는다는 뜻=내속)하였다.
개천(開天) 5523년: 서기 1625년, 후김은 다시 서울을 심양으로 옮긴후, 요하 이동 70여성을 모조리 탈환하였다. 이 과정에서 연로한 누루하치가 병사하였는데 이때, 그의 여덟번째 왕자인 황태극[皇太極]에게 " 우리는 본래 백두산 천지에서 나온 민족이다. 조선은 어머니의 나라이니 잘 자내도록하여라..그리고 너는 반드시 본래의 영토를 수복하는 과업을 이루어야 한다, 이를 명심하라!" 고 유언 하였다.
1,636년, 황태극은 큰의 유언에 따라 나라 이름을 후김(後金)에서 백두산 천지를 뜻하는 청(淸)으로 고치고 아버지 누루하치를 청의 태조라 부호하고, 여진인을 세계중심지란 뜻인 만주인으로 부르도록 명 하였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서도 후김, 청으로 이어지는 만주의 동포들은 남쪽에 있는 동족의 나라인 조선[李氏 朝鮮]에게 연합군을 형성하여 민족의 원수인 한족[漢族之國=明]을 토벌하자고 간절히 요청하였으나, 얼빠진 본래가 화교들인 이씨조선 왕족들은 동족인 청을 오랑케라고 도리어 비하,거부하고 명나라에 빌붙어 만주 형제국을 실망시켰다. 이에 조야에서 이조정벌을 주청하였으나 태조의 유언에 따라 황태극은 이를 거절하였다.
드넓은 만주벌판을 종횡으로 누비며 생업을 꾸리던 만주인들은 고구려시대와 똑같이 기마민족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무술(팔기군제),사냥과 농업을 함께 하는 특유한 생활방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이 중에 팔기군제도는 평상시에는 밭 갈고 사냥하며 정상적인 생활을 하다가, 일단 전시 동원령이 내리면 그들이 속한 깃발을 들고 자신들이 보유하고있던 말에 올라 그대로 전선으로 내닫는 체제여서, 국가 위기에 대처하는 기동력이 상당히 신속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기동력)(이점은 후고려 창시자인 궁예의 통치방법이었는데 누러치하는 여러모로 궁예의 시스템이었슴)
8기군 설명:에는 제각기 고유한 색깔이 있었다. 정황(正黃), 정홍(正紅), 정람(正藍), 정백(正白), 양황(黃), 양홍(紅), 양람(藍), 양백(白)이었다. 8기제도는 군사, 경제가 일체된 사회 체제로서, 누루하치는 8기의 최고 통수권자이며, 군정 대사는 8기 수령들이 공동으로 상의하여 결정하고 최고 통치자의 계승권도 8기에서 선거를 통해 뽑았다. 이처럼 청조(淸朝)는 항상 준전시 태세를 취하고 있었고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전국민이 모두 동원되는 국가 총동원 체제였으므로, 인구 비례상 10대 1이 넘는 열세에도 불구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을 정복하고 무려 276년 동안 중국인들을 다스리며 천하를 호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8기군제도를 창시한 누러하치는 8기군제도에 대해 " 이제도는 궁예의 군사제도이었다" 라고 말한점[연사: 금부 누러하치]을 기억해두어야 한다. )
청조가 중국을 제압하고 천하제일의 강국으로 위엄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이른바 실사구시라는 전통적 실익추구 사고방식(현실적,과학적,합리적)인 철학과 생활방식때문인데, 세습왕제체제이면서도 화교 이조나 다민족국가인 지나(중)국과는 달리 장자가 아니라 왕자들 중 가장 훌륭한 왕자를 뽑아 황제로 추대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청제국 역사에 있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인물은 위안스카이(원세개)란 인물입니다.
청나라의 실재 마지막 황제였던 사람입니다.그가 이조를 관리하던 담당관으로 재직시절이 있었는데, 그는 주신말(한국말)을 잘하여 통역이 필요없었다고 합니다.(이조실록에 의하면 그가 이조왕실,특히 민비와 많은 대화를 하였는데 통역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없슴) 원세개는 만주족(한민족)팔기군 제2사령관(왕족)이었던 아버지의 자손으로, 하남성에서 태어나 청 말기에 황족으로써 이조담당관을 자청하여 근무하였고, 돌아가서는 혼탁기에 청황제에 등극하나 지나족들의 반란(국민당군)을 제압하지 못하여 자신은 독살당하고, 가족 20여명은 모두 집안에 갖힌채 불타음으로써 비참한 종말을 고하였고, 청제국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영화 마지막황제와 실사인 청연사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슴을 이해바람)
이후에 고구려후손인 일본이 다시 중국을 정복하기위한 과정에서 이조를 합방하고, 만주국을 개국하여 유럽각국과 교황청에까지 국가로 정식승인을 받았으나 중국의 강력한반발로 인해 소련과 미국이 받아들이고 결국 중공과 소련이 5:1로 분할점령함으로써 만주국은 사라지게 됩니다.
원세개가 이조담당관시절 할아버지의 고향인 경기도 양평에 있는 모 사찰을 찾아 손수 쓴 휘호는 아직도 해당사찰에 보관중임이 연합뉴스로 보도된 바 있습니다.
우리 한민족인 몽고족이 그랬드시 만주족역시 중국을 통치하면서 그만한 지도적 위치에서 역할을 다하고 있었슴이 당시,서양인들 눈에도 정확히 보여졌기에 파생된 일례를 소개하자면, 서양인들이 중국인을 다스리는 관리를 "만다린"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 |
만주인들의 중국인 차별 정책도 당연했었는데, 일례를 보자면 중국인들도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풍습에 따라 머리를 변발하고 길게 따내려야 했다.(이조까지의 도령풍습), 만주 땅은 내지(內地)라 하여 중국인들은 허락을 받지않고는 출입하지 못했고, 특히 성지(聖地)인 백두산에는 경비병을 두어 지나족은 일체 접근치 못하도록 하였다.(백두산을 반으로 가른것은 같은 백두민족이기에 그렇게 한것인데 청제국이 지나족에게 대살륙당하면서 오늘 처럼 반쪽이 중공에게 속함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임) | |
백산흑수록(白山黑水錄)에는, 청조(淸朝) 시조는 장백산 북쪽 돈화현(敦化縣) 액마색(額摩索) 남쪽 100리 지점인 야액다력성(野額多力城)에서 일어났다고 했다. | |
최근 지나당국의 동북공정작업이 삼우선생으로 인해 한국인들이 인식하기기작했는데, 이 동북공정은 최근의 작업이 아니라 고조선때, 지나가 지배받을때부터 그들의 독립을 추구하면서부터 시작된 정책의 일환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북한정권이 불안해지면서 노골적이어 더욱 심각한문제가 되었는 바, 이러한 지나당국의 정책을 수행중인 중국의 학자들중에는 먹고 살아야 할 형편에 있는 주신족의 학자도 간혹 있는바,이러한 작업의 내용을 보자면 그들은 애신각라를 만주나 한국인이 아닌 중국 송(宋)나라 인으로 조작하여 기술하고 있슴을 볼수있다.
청제국은 백두민족의 역사로서 한민족 역사이다.
근대 세계사에 있어서 200여년 동안 중국을 지 배하며,중국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확보한 위력적인 만주족! 그들은 고려의 후손이었기에 백두산을 신성시했고,
그들의 아버지인 누러하치는 연개소문의 "금해 병서"를 머리에 베고자면서 한시도 고려 대의인 고토수복,대륙정복의 뜻을 잊지 않았던 인물이 다. 중국 화교정권이었던 이씨조선의 기록대로 만주는 다른 족속이 아니라 우리겨례였슴을 후 손들은 바르게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편집자주)
참고: 청연사,만주원류고,도중헌의 청제국 외3종 도움: 해돋는산님,삼우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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