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大中 정권, 군사비로의 전용 가능성 알고도, 不法性 알고도 5억 달러를 金正日의 개인계좌 등으로 보냈다! 日本人 요시다가 회담 주선, 싱가포르 예비회담에도 동석. 「金大中 정권 실세 비자금 창고지기」 김영완도 참석. 公私가 없는 난장판 같은 흥정과 거래와 착취와 은폐의 전모 |
한국의 펜타곤 페이퍼 |
月刊朝鮮은 對北 불법송금사건에 대한 특검 및 大檢 중수부 수사 기록 약 3000페이지를 입수했다. 현재 공개재판이 진행 중인 이 사건의 全貌(전모)는 이 수사자료에 들어 있다. 이 수사자료를 읽어 보면 그동안 언론에 보도되지 않고 묻혀 버렸던 중요 사실이 많고, 언론에서 문제제기만 한 상태에서 확인되지 않았던 것이 확인된 것들도 많다.
이 수사자료는 鄭夢憲(현대그룹 회장), 朴智元(前 문광부 장관·남북예비회담 특사), 李益治(前 현대증권 회장), 金保鉉(現 국정원 對北담당 차장), 김재수(현대그룹 구조조정본부장), 金忠植(前 현대상선 사장), 李起浩(前 대통령 경제수석 비서관), 金潤圭(前 현대아산 사장) 등 남북 頂上회담을 둘러싼 對北 뒷거래의 핵심 관련자들의 진술조서를 담고 있다. 鄭夢憲씨가 李益治씨를 통해 朴智元씨에게 주었다는 150억원어치의 CD 추적기록도 자세하게 붙어 있다. 이 수사자료를 읽어 보면 남북 頂上회담은 출발부터 公私가 구분되지 않은 엉망진창의 윤리 속에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頂上회담을 주선한 인물은 일본인 요시다氏이고 그는 싱가포르 예비회담에 동석하여 남북한 대표들을 소개시키고 있다. 남북 비밀접촉에 일본인이 입회를 한 것이다. 입만 열면 자주적 통일을 외치던 남북한 당국자들의 진면목이다. 놀랍게도 무기상이자 金大中 정권 실세들의 「비자금 창고지기」인 김영완씨도 이 비밀접촉장에 나타났다. 남북 頂上회담이 성사되도록 주관한 것은 鄭夢憲의 현대그룹이었다. 頂上회담 성사에 따른 이익을 노렸겠지만 鄭회장은 그에 따른 부담만 고스란히 진 것으로 나타난다. 2000년 상반기 6개월 동안 북한 정권은 現代로부터 5억 달러를 뜯어 갔다. 金大中 정권은 처음엔 1억 달러를 정부가 부담하기로 했다가 결국은 현대로 하여금 頂上회담 개최 비용 전부를 대게 만들어 버렸다. 頂上회담도 주선하고 경비도 부담하게 된 鄭夢憲의 현대그룹을 등친 것은 金大中 정권의 실세들이었다는 것이 이 수사기록의 증명이다. 朴智元씨는 150억원, 權魯甲씨는 200억원을 鄭夢憲씨로부터 받아갔다는 것이다. 對北사업에 편의를 봐주겠다는 權魯甲씨의 얘기에, 鄭夢憲씨는 權씨가 요구하는 대로 3000만 달러를 스위스 은행에 송금했다고 진술한 직후 자살했다. 지금까지 수사로 확인된 것만도 약 700억원이 金大中 정권의 실세들에게 넘어갔다. 이 기간 현대그룹은 「왕자의 난」이란 內訌(내홍)을 겪고 있었고, 극심한 유동성 위기에 몰리고 있었다. 남북한에 약 7000억원의 현금을 뜯긴 기업이 성할 리 없었다. 林東源(前 국정원장), 朴智元 두 사람은 李起浩 경제수석에게 현대그룹에 대한 특혜 지원을 요구하고, 李수석은 반발하는 장면도 보인다. 산업은행은 현대상선과 현대건설에 대해 5500억원의 특별부당지원을 하고 만다. 金正日 정권으로의 송금 과정이 간첩을 잡아야 할 국정원 직원 명의 등으로 이뤄졌다는 것은 차라리 희극이다. 국정원 對北담당 차장 金保鉉씨는 『군사비로 전용될 가능성을 알고도』 송금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林東源 국정원장은 『이런 식의 對北송금은 불법이다』고 金大中 대통령에게 보고했으나 金대통령은 『그렇더라도 송금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敵將의 군자금으로 5억 달러를 불법송금하는 것을 승인하는 소름끼치는 역모의 장면이 이 수사기록에 있다. 5억 달러는 북한당국의 공식계좌가 아니라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의 金正日 계좌와 對南공작기관 계좌로 들어갔다고 한다. 요약하면 이미 40억 달러로 추정되는 金正日의 비자금을 불려 준 셈이다. 林東源, 朴智元, 金保鉉 세 사람은 특검 수사를 앞두고 사전에 만나 진실을 은폐하는 모임도 가졌던 것으로 나타난다. 金大中과 현대그룹은 국민들을 속이고 적을 이롭게 한 민족사적 범죄를 저질렀다. 이에 月刊朝鮮은 국민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하여 이 수사기록을 국민들에게 보고하기로 하였다. 月刊朝鮮 12월호에 핵심을 간추려 싣고 약 2000페이지 분량(계좌추적 기록 제외)의 수사기록 全文을 月刊朝鮮 인터넷(monthly.chosun.com)에 게재하기로 했다. 金大中 정권은 국민을 속였지만 月刊朝鮮은 언론의 사명을 다하여 진실을 국민들에게 알릴 것이다. 이 사건은 작년 5월호 月刊朝鮮 기사가 발단이 되어 드러난 것이므로 이번 수사기록 全文 게재는 2년에 걸친 추적보도의 마무리라는 성격을 띤다. ![]() 「對北 불법송금 수사를 위한 특별검사」(이하 특검)의 수사가 본격화되자 비밀송금을 주도했던 林東源(임동원) 前 국정원장, 朴智元(박지원) 前 대통령 비서실장, 李起浩(이기호) 前 경제수석 등은 네 차례 비밀 대책회의를 가졌다. 이들은 현대가 對北사업 독점의 代價(대가)로 송금한 것으로 하자고 짜 맞춘 4억 달러 외에 「정부가 남북 頂上회담의 대가로 지불한 1억 달러에 대해서는 끝까지 비밀을 지키자」고 입을 맞췄다. 「頂上회담을 돈 주고 샀다」는 사실이 밝혀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月刊朝鮮이 입수한 특검의 수사자료에는 특검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허둥대는 對北 송금 관련 핵심 인사들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金保鉉(김보현·60) 국정원 3차장(남북 頂上회담 당시 국정원 제5국장)의 특검 진술 내용이다. <2000년 4월 하순경 봉은사 앞에 있는 코엑스 인터콘티넨탈 호텔 1250호에서 제가 연락하여 저녁 식사 후에 朴智元을 만나서 당시의 여러 가지 정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1억 불(달러)에 관해서는 조사를 받더라도 말을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점이 알려지면 정상회담을 돈 주고 샀다는 오명을 들을 것이고, 남북관계에도 나쁜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 5월 중순경 林東源, 朴智元씨에게 제가 연락을 하여 같은 장소에서 만나서 걱정을 함께 하고 역시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2003년 5월 하순경 같은 장소에서 林東源을 만나 같은 이야기를 나눈 바 있습니다. 2003년 5월24일경 李起浩로부터 연락을 받고 같은 장소에서 만나 『하나(1억 달러)는 없다』고 다짐을 한 바 있습니다> 金大中 대통령과 林東源·朴智元씨 등은 「5억 달러는 정상적인 사업거래 과정에서 현대가 북한에 지불한 돈」이라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5억 달러는 頂上회담 준비를 위한 남북 당국자 간 접촉과정에서 현대의 對北 사업 독점권과 직접적 관계없이 북한의 요구에 끌려가다가 결정됐다. 이번에 수사자료를 정독한 결과, 북한에 송금된 5억 달러 가운데 1억 달러는 당초 정부가 남북 頂上회담 합의의 대가로 북한 측에 지급하기로 약속했던 돈이고, 나머지 4억 달러도 頂上회담의 대가로 지불된 것으로 밝혀졌다. ![]() 對北 송금액 5억 달러 전체가 남북 頂上회담 성사에 대한 뇌물이었던 셈이다. 鄭회장은 2000년 3월9일 싱가포르에서 남북 頂上회담을 위한 예비접촉이 시작된 전후 6개월 사이 북한 측에 5억 달러, 남한 측에 700억원을 뜯겼다. 朴智元 비서실장이 150억원을, 동교동계의 실력자인 權魯甲 前 고문이 200억원을 현대로부터 현찰로 챙겼다고 검찰은 보고 있다. 검찰은 權 前 고문이 추가로 3000만 달러를, 해외 계좌를 통해 현대에서 받은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4억 달러가, 현대가 확보한 독점사업권의 대가가 아니라는 사실은 특검 수사자료 곳곳에서 확인된다. 4억 달러를 주기로 확정된 시점(2000년 4월8일)에는 현대가 어떤 사업의 독점권을 가질 것인지에 대한 논의도 진행되지 않은 때였다. 현대가 5억 달러를 책임지기로 확정된 것은 2000년 4월8일 열린 北京 3차 접촉에서였다. 남측의 朴智元과 북측의 송호경이 공식 회담을 하는 다른 한편에 鄭夢憲 회장은 따로 호텔 방을 잡아 놓고, 송호경과 협상을 별도로 진행했다. 남북한 간의 실질적인 협상, 즉 돈 얘기는 鄭夢憲-송호경 라인에서 이뤄졌다. 송호경은 두 방을 오락가락했다. 朴智元 장관이 「현금 지급」에 난색을 표시하면, 鄭夢憲 회장의 방으로 가서 鄭회장을 압박했다. 『4억 불을 달라』는 북측의 요구를 수용할 때, 鄭夢憲 회장은 금강산 관광사업에 대한 대가 지급 때처럼 몇 년에 걸쳐 사업이 진행됨에 따라 分納(분납)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했으나, 북측은 頂上회담 직전 완납을 요구했다. 鄭夢憲 회장 본인의 진술이다. <회담(北京의 3차 접촉, 2000년 4월8일)에 임해서 중국 베이징 차이나 호텔 객실을 정부 측과 저희가 따로 잡았고, 남북 당국자 간 회담은 저희가 머물고 있는 같은 층의 다른 객실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남북 당국자간 회담을 종료한 후에 송호경 부위원장이 제가 기다리고 있는 객실로 찾아와서 하는 말이 『남측의 입장이 지난번과 바뀐 것이 없어서 더 이상 회담을 진행할 수 없어 끝내고 왔다』면서 사실상 회담이 결렬됐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다시 對北사업권에 대한 대가 10억 불 얘기를 꺼내 놓았습니다. 송부위원장은 저희에게 7억 불을 요구했고, 저는 『지금 우리도 형편이 어렵기 때문에 그렇게 까지는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북한이 정 그렇다면 3억 달러까지는 줄 수 있다』고 하였으나, 송부위원장은 5억 불을 고집하였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서로 양보를 하지 않으려고 실랑이를 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4억 불에 합의를 하였습니다. 4억 불을 주기로 합의를 하고 나니까 다시 북측은 이 자금을 언제까지 줄 것인지를 놓고 다시 논의를 하였는데, 북측은 4억 불을 회담 전까지 달라고 요구하여, 저는 『회담 전까지 4억 불을 주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니까, 송부위원장이 『그럼 정상회담을 그만두겠다』면서 지급 시기를 회담 전까지로 못을 박으려고 하였습니다. 저희 입장에서는 이왕 4억 불을 주기로 하는 마당에 정상회담은 성사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그럼 회담 전에 이 자금을 주면 우리 정부 측과 계속 협의를 하겠느냐』라고 하니까, 송부위원장도 『그렇게 약속을 하면 계속하겠다』라고 하여, 저희는 한발 더 나아가 이 돈을 회담 전까지 주는 대신에 4억 불 중 5000만 불은 물건대금 등으로 처리하고 나머지 3억5000만 불을 현금으로 지급키로 제의하여 그 부분까지 합의가 이루어져 그날 결렬되었던 남북 당국자 간 회담이 재개되었고, 그때가 새벽 무렵이었습니다> ![]() 송호경은 北京회담에서 朴智元이 남북 頂上회담 성사의 대가로 「1억 달러」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하자, 현대 측에 「지급보증」을 요구했다. 鄭夢憲 회장은 「경제규모 세계 12위 나라의 정부가 한 약속을 개인기업이 지급보증하라」는, 터무니없는 주장까지 수용했다. 그룹이 유동성 위기에 몰린 상태에서 방만하게 對北사업까지 벌여 놓은 鄭夢憲 회장은 남과 북 양쪽 정부 모두에게, 약점을 잡힌 희생자였다. 그의 진술내용이다. <송호경이 한참 시간이 흘러서 저희가 머물고 있는 객실로 다시 찾아와서 『남측이 한 장(1억 불)을 주기로 했다』면서 『남측이 안 줄 경우 너희가 대신 지불하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정부가 주겠다고 했으면 그쪽에서 줘야지 어떻게 우리가 대신 내놓느냐』고 하니까, 송호경이 『그럼 당신들이 보증을 서라』고 하여, 제가 『그건 거기(정부) 꺼고, 우린 우리 껀데, 어떻게 우리 보고 책임을 지라고 하는 거냐』면서 거절을 하니까 송호경이 『(현대에 의한) 정부의 보증이 되지 않으면 정상회담도 할 수 없다고 강경입장을 보였습니다. 저는 한발 물러서는 척하면서 『좋다 남측 정부가 못 줄 경우 우리가 책임을 지겠다. 그렇다면 당신들도 우리에게 주기로 한 사업권에 통신사업을 추가하여 포함시키고, 독점권을 넣어 달라』고 했습니다> 鄭회장은 특검 조사에서 「4억 달러는 북한이 남북 頂上회담과 연관시켜서 요구한 돈」이라고 돈의 성격을 분명히 밝혔다. 구체적인 對北사업의 독점권을 확정짓고 그 대가로 준 돈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래 그의 결정적 진술이 나온다. <잠정합의서(2000년 8월22일 현대아산과 아태평화위가 체결한 「7대 경협사업권」 합의서)에 3억5000만 불에 대한 내용이 기재가 되어야 마땅한데, 그 당시에 합의내용 자체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던 것도 아니고, 북측은 이 자금을 남북정상회담과 연관시켜 요구했던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협의 결과가 공개될 경우 정상회담의 대가성 시비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었기 때문에 합의서상에는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고, 「별도로 정한 금액, 조건 및 방법에 따라 아태에 지불한다」는 문구를 넣었던 것입니다> 특검의 이병석 검사는 2000년 4월 北京 접촉에서, 그리고 頂上회담 이후에 논의된 「독점 사업권에 구체성이 있는지」를 묻는다. 鄭회장은 진술을 하고 있는 2003년 6월23일까지도 『구체적인 사업권 취득을 위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대답했다. <문 독점권은 어떤 사업에 대한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답 저희가 북한으로부터 취득하는 사업권 전체에 대한 독점권을 말하는 것입니다. 문 이 당시 구체적인 사업권에 대한 체결이 이루어진 것이 있었나요. 답 그 동안 對北협상에서 저희가 진출할 수 있는 사업분야 정도까지는 논의가 있었지만, 구체적인 사업권을 취득하거나 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이번에 보다 구체적인 사업권을 확보할 수 있도록 북측과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 對北 접촉에 나선 정부와 현대 사이에는 「정상회담의 대가로 얼마나 지불할 것이냐」에 대한 논의가 진행된 적이 없었다. 반면 송호경은 朴智元과 鄭夢憲을 분리해서 상대했다. 송호경은 협상 초기에 한국 정부와 현대 측에 頂上회담 성사에 대한 대가로 각각 5억 달러와 10억 달러를 제시했다. 특검의 수사자료를 읽다 보면, 頂上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일본과 중국으로 뛰어다니는 鄭회장의 모습이 곳곳에 나타난다. 결국 鄭회장은 頂上회담을 성사시켜야만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북한 측의 무리한 주장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 측은 북한 통신사업 등의 독점사업권을 확보해서, 이걸 미국·일본 기업에 팔면 5억 달러를 벌충할 수 있을 것으로 안이하게 판단했다. 하지만 현대의 등을 떠밀어 5억 달러를 비밀 송금하게 만든 한국 정부도, 5억 달러의 현찰을 챙긴 북한도, 현대가 과연 생 돈 5억 달러를 뜯기고도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북한은 頂上회담 이후 현대의 독점사업권 확보에 냉랭한 반응을 보였고, 한국 정부는 현대에 대한 특혜금융지원을 무작정 계속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 남북 頂上회담을 추진한 쪽은 對北사업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던 현대그룹이었다. 鄭夢憲의 진술이다. <저희가 對北사업을 위해서는 남북관계의 긴장완화가 필요하였으며, 긴장완화를 위해서는 남북간 정상회담의 개최가 필요하다고 판단을 하고서, 1999년 12월말경 1998년부터 對北사업을 위해 북측과 접촉을 했던 李益治 현대증권 회장에게 『우리가 남북회담을 성사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하였으며, 이익치 회장이 한국계 일본인 요시다의 중계로 다시 북측의 아태 부위원장 송호경과 접촉을 하였으며, 이익치 회장으로부터 북측에서 남북정상회담 추진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요시다와 현대그룹의 인연은 1989년 鄭周永 명예회장이 북한을 처음 방문하던 때부터 시작했다. 요시다가 그 訪北을 성사시킨 거간이었다. 현대가 對北사업을 본격화하면서, 요시다는 북한과 현대의 중개자로 활약했다. <1998년 2월 하순경 북경에서 이익치 회장, 요시다가 북측의 조선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 송호경, 황철 참사를 만났으며, 이때 저희 측이 금강산관광사업을 북측에 제의하니까, 북측은 물자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鄭夢憲 진술) <요시다의 아버지가 金日成과 친분관계가 있었습니다. 요시다는 북한에서 잡은 꽃게와 같은 물건을 넘겨받아 직접 일본으로 판매를 하는 일종의 무역중개업을 오랫동안 하면서 북한 측과는 상당한 친분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金保鉉 진술) <2000년 2월 (남북 頂上회담) 가능성 검토를 하면서 요시다를 알게 되었고, 요시다는 金正日 위원장의 의전비서인 전희정(現 이집트 대사)과도 잘 안다고 하여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였습니다> (金保鉉 진술) 현대는 남북 頂上회담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다시 요시다를 앞세웠다. <1999년 1월경 현대아산이 설립된 이후에 한국계 일본인인 요시다의 북한 내에서의 영향력을 인정하여 현대아산의 고문으로 임명하였는데, 鄭夢憲 회장이 저에게 『이런 일은 보안을 요하는 사안이니까 이회장(이익치)께서 요시다를 만나서 북한 측 의사를 타진하라』는 지시를 하였습니다> (李益治 진술)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는데, 무슨 일 때문에 요시다가 국내에 들어왔을 때 요시다를 만나서 『鄭夢憲 회장님께서 남북정상회담을 알아봐 달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얼마 후 요시다로부터 가능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때 요시다가 『저쪽의 조건이 안기부 사람을 대표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李益治 진술) <對北사업 때문에 鄭夢憲 회장과 김윤규 사장은 임동원 국정원장을 자주 만났고 친분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으며, 저희도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회담이라면 당연히 남측 대표로 국정원장이 나설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북측이 안기부 사람을 대표로 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내세워서 국정원장이 대표로 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李益治 진술) 鄭夢憲 회장은 2000년 1월 朴智元 문화관광부 장관을 서울의 플라자 호텔 로비에서 만나 『북쪽에서 남북 頂上회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왔다』고 했고, 朴장관은 『내가 한번 알아보겠다』고 말했다. ![]() 鄭회장은 2000년 1월 하순경 朴장관으로부터 『이 일은 내가 맡기로 했다. 한번 추진해 보라』는 공식 입장을 전달받았다. 2000년 2월 하순경 요시다는 『3월9일 싱가포르에서 예비접촉을 하자』는 북한 측의 뜻을 현대 측에 전달했다. 鄭회장은 이 사실을 朴智元 장관에게 알렸다. 2000년 3월9일 싱가포르에서 있었던 첫 번째 남북한 간의 예비접촉 협상장에 외국인인 요시다가 참석했다. 朴智元 장관은 싱가포르 현지에 「비자금 창고지기」 김영완을 데리고 나타났다. 頂上회담을 對北사업에 이용하려는 현대의 私(사), 남북 접촉 현장에 비자금 관계자를 데리고 나타난 朴智元 장관의 무분별이 뒤섞이면서, 남북 頂上회담을 위한 접촉은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시작됐다. 요시다는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협상 현장 주변에서 대기했다』고 주장했다. 鄭夢憲의 설명은 다르다. <저는 2000년 3월9일 싱가포르에서의 예비접촉을 위해서 3월8일 프랑스에서 싱가포르로 저 혼자 이동하여 이익치 회장, 요시다와 합류를 하였고, 다음날 리츠칼튼 호텔에서 남북 당국자 간 예비접촉이 이뤄졌습니다. 저와 이익치 회장, 요시다가 참석하여 양측을 소개하고 인사를 나누도록 하는 정도에서 일단 저희는 물러났습니다> (鄭夢憲 진술) 싱가포르 예비접촉은 탐색전으로 끝났다. 이날 金大中 대통령이 베를린에서 북한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을 강조하는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지만, 협상의 의제로 오르지 않았다. <송호경은 저와 金大中 대통령과의 인간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것이 가장 궁금하였던 것 같고, 송호경은 『고위층(대통령)이 회담할 용의가 있느냐』는 등 회담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이루어졌습니다. 송호경 부위원장이 『상층부에 당신들 의중을 보고하겠으며, 2000년 3월17일 중국 상해에서 다시 만나서 논의를 해보자』고 하였으며, 『이 내용에 대해서는 상층부의 의사를 받아야 하니까 접촉사실에 대해 외부에 발표를 하지 말자』는 제의를 하여, 예비접촉 사실에 대하여는 비밀에 부치기로 하였습니다> (朴智元 진술) ![]() 2000년 3월17일과 18일에 열린 上海(상해) 1차 회담에서 북한 측은 金大中 대통령이 베를린 선언을 언급하면서 『가급적 많이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남한 측은 『베를린 선언에서 밝힌 대로 頂上회담이 잘 진행되면 비료든지 쌀이든지 지원할 수 있고, SOC(사회간접자본) 사업을 하는 데 남측이 도와줄 수 있다』는 제의를 했다. 頂上회담의 대가로 돈 얘기가 본격적으로 오고 가기 시작한 것은 北京 2차 접촉(2000년 3월23일)에서였다. 정상회담 대가로 지불할 돈의 규모로 남북한 간에 「10억 달러나 20억 달러, 「5억 달러」, 「2억 달러」 등의 구체적인 액수가 제시됐다. 北京 2차 접촉은 북측의 무리한 돈 요구로 결렬됐다. 다음 회담 일자도 잡지 못했다. <회담을 하던 중에 돌연히 북한 측의 송호경이 5억 불을 현금으로 요구하였습니다. 이런 말을 듣고 저(金保鉉 국정원 3차장)와 박장관이 거의 동시에 어떻게 그런 큰돈을 줄 수 있겠느냐고 강하게 우겼습니다. 북측은 재차 같은 내용을 요구하였고, 저희 당국자들은 그러면 우리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회의장을 박차고 나왔습니다> (金保鉉 진술) 朴智元 장관은 회담이 결렬되자 鄭회장을 불러 『일국의 장관을 협상테이블에 모셔다 놓고 이럴 수가 있느냐』고 호통을 쳤다. 당국자 간 회담은 결렬됐지만, 현대 鄭夢憲 회장팀은 송호경과 협상을 계속했다. 북한 측은 사회간접자본투자 지원 같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복잡한 거래보다는 「캐시(현찰)」를 선호한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鄭夢憲의 특검 진술이다. <이날(2000년 3월23일) 남북 당국자 간 회담이 끝난 직후에 북측과 현대 간에 접촉이 있었으며, 제가 송호경 부위원장에게 『어떤 협의가 있었습니까』라고 물으니까 송호경 부위원장이 『그냥 뭐 남에서 비료든 쌀이든 인도적 지원을 해주겠다고 하였고, 잘되면 SOC 사업을 지원해 줄 수 있다』고 했으며, 『남측이 「향후 잘되면 10억 불이든 20억 불이든 몇 년에 걸쳐서라도 지원해 줄 수 있다」고 하더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들은 뭐라고 했느냐』고 하니까 송호경 부위원장이 『캐시(현금)를 요구했다』라고 하여 『얼마나 요구했느냐』라고 하니까 『캐시로 5억 불을 요구했다』라고 하여, 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정부가 어떻게 돈을 줄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송호경 부위원장이 저희에게 『그동안 논의되던 사업권의 대가로 10억 불을 내놔라』라고 하여, 저는 『무슨 소리냐 그동안 논의되어 오던 사업권의 가치를 따져보더라도 2억 불 정도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줄 수는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다음 회의는 어떻게 하기로 했느냐』고 하니까 송호경 부위원장이 『3월29일 베이징에서 갖기로 했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鄭夢憲 진술) 鄭夢憲은 북한의 「사업권에 대한 10억 달러 요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특검에서 진술했다. 鄭회장은 특검에서 『북한이 요구한 10억 불을 듣고 흘려버리는 정도로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며 『향후 對北사업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의 가치를 구체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이 자금을 바로 달라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對北사업을 추진하면서 처리하면 될 것으로 생각을 하였다』고 말했다. 송호경이 鄭회장에게 얘기한 「3월29일 베이징 회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돈에 대한 남북한 당국의 현격한 시각차 때문이었다. ![]() 결국 3월29일 北京에서 자리를 함께한 것은 송호경과 鄭夢憲이었다. 頂上회담의 예비접촉 再開(재개) 책임을 鄭夢憲이 떠안은 것이다. 그런데 다시 만난 송호경은 鄭회장에게 「10억 달러」 얘기를 또 꺼냈다. <이날도(2000년 3월29일) 송호경 부위원장이 지난번 접촉에서 언급하였던 10억 불을 요구하였으며, 저는 『그것은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요구다』라고 하니까, 송호경이 『그럼 7억 불은 가능하겠느냐』라고 하여, 저는 『그것도 많다』는 이유로 거절하는 등 같은 이유로 협상은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제가 『그럼 이제 더 이상 회담을 하지 않을 거냐』라고 하니까, 송호경 부위원장은 『더 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라면서 여운을 남겨, 제가 『그럼 내가 돌아가서 정부 측의 입장을 확인해 보고 다시 연락을 주겠다』라고 하고, 그날 협상을 종료하였습니다> 鄭회장의 중재로 北京 3차 접촉이 4월8일 北京에서 열렸다. 회담에 앞서 金大中 정부는 「첫 頂上회담 기념으로 북측이 주민 선물용으로 쌀과 생필품을 줄 수 있도록 현금 1억 달러를 頂上회담 전에 줄 수 있다」고 입장을 정리했다. 송호경이 거듭 현대 측에 요청하고 있는 「10억 달러」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와 현대 사이에 아무런 입장 정리가 이뤄지지 않은 채 4월8일은 다가왔다. 북측의 송호경은 朴智元과의 당국자 간 협상에서 「남북 頂上회담 합의의 대가」로 5억 달러의 현찰을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검 수사자료를 종합하면, 북측은 「남북 頂上회담 성사의 대가」로 현대에서 10억 달러, 정부에서 5억 달러를 받아내 모두 15억 달러를 받아내려는 목표치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합의문 작성을 하기 전에 북측에서는 (한국 정부 측에) 5억 불을 요구하다가 우리 측의 1억 불이 맥시멈이라는 주장을 듣고 다시 2억~3억 불이라도 주었으면 좋겠다고 줄다리기를 하다가 약 1시간 반 정도가 경과될 무렵에 1억 불 지원을 수용하였습니다> (金保鉉 진술) 鄭夢憲 회장은 남북 예비접촉 장소인 北京 차이나 월드 호텔에 자신의 협상장을 따로 설치했다. 앞에서 기술한 대로 송호경은 鄭회장을 상대로 현대가 지불할 「남북 頂上회담의 대가」를 4억 달러로 타결짓고, 정부가 「남북 頂上회담 대가」로 내놓기로 한 1억 달러에 대한 「현대의 지급보증」을 받아낸다. 송호경과 鄭회장은 즉석에서 4억 달러 지불을 명기한 합의서에 서명했다. ![]()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 북한의 통신사업을 포함한 대규모 국책사업의 독점권을 즉석에서 鄭夢憲에게 약속할 위치가 아님은 분명하다. 현대 핵심 관계자도 이 합의서가 어떤 내용인지, 어떤 효력을 가질 것인지 모르고 있었다. <협상을 마치고 鄭夢憲 회장이 저에게 간략한 합의서 한 장을 보여 주었는데 鄭夢憲 회장과 송호경이 서로 서명한 것이었습니다. 얼핏 기억되는 내용이 SOC 사업권과 몇 가지 사업권이 언급되었고, 특히 기억 나는 것은 독점권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가와 관련하여 정확하지는 않지만 4억 불이라는 금액이 기재되어 있는 약식 합의서였습니다> (李益治 진술) 4억 달러를 주기로 합의를 한 이후 현대는 북한 측과 구체적으로 사업권 문제를 협의한다. 이렇게 해서 2000년 5월경에 나온 것이 「현대의 7大 경협 사업권에 대한 잠정 합의서」이다. 金大中 정부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열어 현대의 對北사업지원을 논의했다. 이를 토대로 경제장관회의, 민주당과의 당정협의, 현대 채권단회의에서 『현대 「왕자의 난」(2000년 3월) 이후 유동성 위기가 있으니 제2의 대우 사태가 나면 또 하나의 IMF가 올 수 있으니 현대는 살려야 한다』는 정부 측의 뜻을 전달했다. 이로써 남북 頂上회담 성사를 매개로 한 對北 5억 달러 비밀 송금의 시나리오가 완성됐다. 이제 어떻게 5억 달러라는 거액의 자금을 비밀리에 조성하고, 이것을 미국의 감시망을 피해 몰래 북한에 송금하느냐가 難題(난제)로 등장했다. 특검 조사자료를 보면, 경제에 밝은 李起浩 경제수석은 『이렇게 큰돈을 비밀리에 조성하고 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돈을 남북경제협력기금 등을 통해 조달하는 방법을 검토하자』는 요지의 의견을 제시한다. 국회 논의 등을 통해 공개적으로 현대 측에 장기 低利(저리) 융자 자금을 지원하자는 주장이었다. 金大中 정권이 李수석의 주장대로 현대의 對北사업이 「북한의 경제개발과 사회간접자본 확충을 위한 투자」라는 점을 들어 국회와 국민을 설득하는 작업에 들어갔다면, 對北 비밀 송금을 하는 불법을 피해갈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북한이 요구한 「현찰 5억 달러」는 현대의 사업 독점에 대한 대가도 아니었고, 金正日의 목적은 자신의 비밀계좌로 들어올 「캐시」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비밀접촉 과정에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林東源과 朴智元은 『현대가 보낼 5억 달러를 남북협력기금에서 장기 저리로 대출하자』는 李수석의 주장을 그 자리에서 잘라 버렸다. 남북경제협력기금의 지출에는 국회의 사후 동의가 필요하다. 두 사람은 이익 회수 가능성도 없고, 구체적인 사업계획도 없는 현대의 對北사업을 국회에 들고 가서 『5억 달러 정도의 純益(순익) 회수는 가능할 것』이라고 야당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 李起浩 경제수석은 2000년 5월 초순 朴智元과 林東源으로부터 『현대가 북한과 對北사업의 사업권 대가로 5억 달러를 주기로 잠정 합의했는데, 여기에는 정부 부담 1억 달러도 들어 있다』, 『현대가 頂上회담 성사에 큰 역할을 했으니 경제수석이 현대를 많이 지원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李起浩의 특검 진술이다. <이에 대하여 본인은 『현대에 대한 특별지원 방법은 현재와 같이 투명해진 사회에서 대단히 곤란한 일이다. 과거와는 다르다. 아마 과거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과거와 같은 정경유착은 있을 수 없다. 할 수 있다면 남북경제협력기금에서 현대의 對北사업추진을 위해 현대에게 장기 저리로 기금융자를 해주는 방법밖에 없다』는 취지로 말을 했더니, 이에 대하여 박지원 특사와 임동원 원장 모두 반대했습니다. 『특별지원 방법에 대하여 남북경제협력기금을 제외하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주장에 대하여 박특사와 언쟁을 많이 하였습니다. 또한 『현재 현대의 구조조정 즉 시장이 신뢰할 만한 강력한 자구계획 요구, 현대투신 1, 2조원 부실문제의 자체처리 촉구, 鄭夢憲 계열의 강력한 계열분리 촉구 등을 현재 강력하게 추진해야 하기 때문에 특혜나 특별지원은 더욱 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을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박지원 특사와 임동원 원장은 경제수석에 대하여 많이 서운하게 생각하고, 불만도 많았습니다> 李수석은 林東源·朴智元으로부터 현대 지원 압박을 받은 직후 金大中 대통령에게 「정상적인 방법」에 의한 對北지원 방법을 보고했다. 지극히 원론적인 이야기다. 관심 있게 지켜봐야 할 대목이 있다. 5억 달러라는 돈을 송금하고 남북의 頂上회담이 성공했지만, 李수석이 거론한 남북한의 협력사업은 단 하나도 실행되는 게 없다는 점이다. <아울러서 그 직후에 본인은 대통령께 첫째 남북정상회담은 상호주의 원칙에 의거 남과 북이 상호 이익이 되는 상호협력 관계이어야 하고, 둘째로는 베를린 선언에서 나온 철도연결, 도로 등 사회간접시설 중장기 협력투자계획, 임진강 홍수방지계획, 북한의 농업기반 조성계획, 경의선 복선화 등 공공사업에 대한 중장기 계획을 수립하였고, 셋째 투자보장, 이중과세 방지, 청산결제 등 제도적 장치 마련, 넷째 IMF 등 국제기구에 가입시켜 북한을 지원하게 하는 방안 등에 대한 남북경제협력촉진방안을 보고 드렸으며(後略)> 6월 頂上회담 날짜를 잡은 林東源·朴智元으로서는 李起浩 수석과 한가하게 논쟁을 하는 데 보낼 시간이 없었다. 두 사람은 산업은행이 현대상선에 4000억원을 지원하는 빠른 길을 선택했다. ![]() 李수석은 『현대가 어려워지면 頂上회담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林東源·朴智元의 지원요청에 대출을 적극 추진했다. 李수석은 朴智元 장관의 요청에 따라, 2000년 6월26일 사모사채 인수방식으로 산업은행이 현대건설에 1500억원 여신지원을 하는 데도 압력을 가했다. 李수석은 『현대상선이 그렇게 많은 돈을 대출받아 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놀라움을 표시했다. 鄭夢憲 회장은 자신의 계열사 사장들에게 對北 송금액을 할당한다. 『일이 잘 안 되면 朴智元 장관에게 얘기하라』는 지시와 함께. <정몽헌 회장은 자신이 출국하기 직전인 2000년 5월31일부터 6월1일 사이에 각 사장들을 불러서 현대상선에 2억 불, 현대건설에 1억5000만 불, 현대전자에 1억 불 등 모두 4억5000만 불을 분담시켰다> (특검 검사의 심문에서) <정몽헌 회장이 출국에 앞서 진술인(이익치)에게 『각 사장들에게 對北 송금 지시를 해두었는데, 사장들이 자금동원에 어려움이 있다고 하면 박장관에게 이야기하여 협조를 얻어 송금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은 상태에서, 진술인(이익치)은 현대상선 김충식 사장으로부터 자금사정이 어렵다는 보고를 받았다> (특검 검사) 현대상선은 「2억 달러 조달」이라는 숙제를 해결하기에는 재정상태가 너무나 취약한 상태였다. <현대건설 등 현대그룹의 자금난, 소위 「왕자의 난」(2000년 3월)등으로 「대우 다음은 현대」라는 분위기가 팽배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김재수 구조조정 본부장이 『상선은 유동성 문제가 없다』고 발표한 것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오히려 역으로 「상선도 어렵다」는 인식이 팽배해져, 현대상선에 대한 대출금을 금융기관이 급속도로 회수하고 있었으며, 삼성생명에서 일시에 2000억원을 회수한 후 연쇄적으로 2000년 6월까지 2700억원의 대출금을 회수해 감에 따라 매일 1000억 정도의 차입금이 만기 도래하는 등 급박한 상황이었으며, 또한 현대상선은 그룹의 지주회사로서 장기불황의 가속화, 계속적인 대규모 신규투자, 1조7000억원에 달했던 보유 유가증권 가액이 수천억원대로의 급락 등으로 인한 재무구조 악화로, 금융권으로부터 신규자금 차입이 어려워짐에 따라, 1~2년 전까지는 상선의 운전자금 차입금이 5000억원 선에 불과하던 것이 2000년 6월 당시 운전자금 차입금 규모가 2조9000억원으로 급증함에 따라 채권기관이 경쟁적으로 상환을 요구하여 회사의 존립이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李益治 진술) 현대상선 金忠植 사장은 『정부에 빌려주는 돈이다. (나중에) 정부에서 받아 준다』고 설득하는 鄭夢憲·李益治에게 자신이 반발했다고 주장한다. <2000년 6월1일경 정몽헌 회장이 미국으로 출장하기 직전인데, 출국 당일인지 그 전날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위 출장 직전에 저를 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사옥 12층 회장실로 불러서 『급히 정부에 돈을 빌려 주어야 한다. 자세한 것은 이익치가 얘기해 줄 거다. 매우 중요한 일이니, 절대 차질 없게 하라』고 하여, 제가 『현대상선의 자금 사정이 지금 매우 어렵습니다』라는 말로 거절을 하자, 정몽헌 회장이 『걱정하지 마라. 정부에서 받아 준다. 절대 차질이 나선 안 된다. 이익치가 하라는 대로 차질 없이 하라』고 하였으나, 『회사 자금사정이 정말 어렵습니다』라고 하고는 그냥 돌아왔습니다> (金忠植 진술) ![]() <2000년 6월1일 회장님이 출국한 그 다음날인가에 이익치 회장이 저를 계동 이익치 회장실로 불러서 갔더니 이익치 회장이 하는 말이 『2억 불을 급히 정부용도로 써야 한다. 이것은 정부에 빌려 주는 돈이다. 대통령이 북한에 가야 하는데 이거 안 하면 안 된다. 상선이 꼭 도와줘야 한다』고 하기에, 제가 『무슨 소리냐. 하루하루 부도 막기도 힘들다. 지금 상선 자금사정이 극도로 어려운 것은 당신이 더 잘 알지 않느냐. 나는 절대로 못 한다』라는 취지의 말을 하면서 『회장님 똑똑히 모십시오. 나는 절대로 못 합니다』라고 화를 냈더니, 이익치 회장이 『당신이 국가적 대사를 그르치려고 그래? 분명히 바로 정부에서 갚아주는 돈인데 왜 그래』라고 하는 말을 한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국가적인 대사와 상선이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왜 하필이면 상선입니까』라고 목소리를 높여 거절하고 나서 자리를 박차고 나왔던 것입니다> (金忠植 진술) 산업은행의 4000억원 대출은 현대의 김윤규와 李起浩 수석 간의 협의에서 최종 결정됐다. <2000년 6월5일 아침 출근 직후에 이익치 회장이 저를 계동사옥으로 불러서 갔더니, 이회장이 『청와대에서 산업은행에 이야기가 다 됐으니, 산업은행으로 빨리 가라. 그러면 당신이 달라는 대로 줄 거야』 그러시면서 『이것은 급박하게 정부에게 상선의 계좌와 이름만 빌려 주는 거야. 걱정하지 마. 금방 들어와』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지금 빨리 가서 산은총재를 만나』라고 하셨습니다> (金忠植 진술) 현대상선은 산업은행 대출금 (4000억원) 중 2300억원은 국정원으로 넘기고, 나머지 1700억원 가운데 1000억원을 현대건설에 지원했다. 나머지는 현대상선의 운전자금으로 사용했다. 특검의 수사자료를 보면, 2300억원의 외화환전과 對北비밀 송금업무는 국정원이 全擔(전담)했다. 『환전 송금의 편의만 제공했다』는 지금까지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현대상선 측이 2억 달러 문제에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었다. <(金保鉉 국정원 3차장) 김윤규가 액수까지 부탁을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다만 頂上회담 전에 보내야 한다고 다급하게 부탁하였던 것입니다. 문(특검 박광빈 특검보) 임동원 원장은 당시 제5국장이었던 진술인으로부터 『현대 측으로부터 2억 불을 북한으로 보내려고 하는 과정에서 환전편의 제공요청이 왔었다』면서 자신에게 『실무부서에 가능여부를 하문해 달라』는 건의가 있었으며, 최규백 실장으로부터 가능하다는 보고와 함께 실무자의 연락처를 받아서 진술에게 건네준 기억이 있다고 하던데 어떤가요. 답(金保鉉) 임원장에게 2억 불이라고 보고를 했는지 기억이 없으나 위와 같이 보고를 하여 임원장으로부터 실무자인 김○○, 김△△의 전화번호를 받은 사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김윤규에게 전화번호를 가르쳐 준 적이 있습니다> <김충식 (현대상선) 사장은 송금방법에 대하여 전혀 걱정을 하지 않았던 것이고, 2000년 6월7일 (4000억원을) 대출받은 이후 6월8일 김윤규 사장을 따라 나가서 국정원 직원을 만났으나 별다른 이야기도 없어 얼굴 정도만 확인한 채 돌아갔고, 사무실로 돌아와 바로 김윤규로부터 북한 측 돈자리(계좌번호)를 건네서, 국정원 직원을 만나서 자기앞 수표 2240억원을 건네주니까 국정원 직원이 송금을 마치고서 영수증을 건네주기에 가져온 것이 전부라고 한다> (특검 검사의 심문) ![]() 돈을 보낼 북한 측 「돈자리(계좌번호)」는 2000년 5월23일부터 25일까지 금강산 부두 기공식에 참석한 鄭夢憲 회장에게 직접 전달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에 수사기록을 검토한 결과, 현대상선이 조달한 2억 달러는 2000년 6월9일 북한 對南공작기구 대성은행의 계좌(중국은행 마카오 지점)으로 송금되고, 현대전자와 현대건설이 조성한 2억5000만 달러는 홍콩과 싱가포르에 있는 金正日의 비밀계좌로 송금됐다는 기술을 발견했다. 현대상선이 조성한 2억 달러 가운데 국정원 직원 김○○의 명의로 중국은행 마카오 지점, 계좌주 「DAESUNG BANK」로 송금한 4500만 달러가 실제 계좌주인 「DAESUNG BANK-2」와 일치하지 않아 송금처리되지 않는 송금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현대전자의 미국 및 현지 법인은 현대건설 런던지사가 팩스를 통해 알려준 영국 「홍콩상하이 은행」의 「현대건설」 명의 계좌로 2000년 6월9일 1억 달러를 송금했고, 같은 날 2000만 달러, 6월12일 8000만 달러등 모두 1억 달러를 북한 측 계좌로 송금했다. 현대건설이 조성한 1억500만 달러는 이승렬 현대건설 금융재경본부 금융재정담당 상무이사, 임종익 당시 현대건설 재무기획부장이 실무를 담당하여, 2000년 5월 말경 외환은행 홍콩 지점 등 10개 계좌를 이용하여 홍콩 및 싱가포르에 있는 金正日 비밀계좌로 송금된 것으로 특검조사에서 확인됐다. 북한에 송금됐던 현대상선의 2억 달러인 2235억원과 현대건설 1억5000만 달러 가운데 1000억원 등 모두 3235억원이 산업은행 대출로 조달됐다. ![]() 金保鉉 당시 국정원 5국장은 북한에 넘어간 5억 달러가 군사적으로 전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특검에서 밝혔다. 金大中 대통령은 林東源 국정원장으로부터 『頂上회담 합의의 대가로 정부가 지불하기로 한 1억 달러를 현대에 부담시키기로 했다』는 보고와 함께 對北송금의 실정법상의 문제점을 보고받고, 『실정법에 다소 어긋나더라도』 對北 송금을 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검 조서에 따르면, 金大中 대통령은 불법을 알고도 불법 對北 송금을 추인하고,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돈을 직접 주는 것은 국민적 비판여론을 감내하기 어렵고 둘째 혹시 북측이 군사비로 전용할 우려가 있다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1억불 정도를 주더라도 남북정상회담을 열어서 해빙무드를 조성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金保鉉 진술> <2000년 5월 초순경 현대가 부담하기로 하는 박지원 특사와 임동원 원장의 제안에 대해서 저도 동의를 하고, 곧바로 대통령에게 보고를 드렸는데 보고시 임동원 국정원장은 대통령께 정부가 부담해야 할 1억 불을 현대가 맡기로 했다고 보고를 드렸고, 보고를 받은 대통령께서는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느냐』고 하셨고, 그러면서 『정부가 떳떳하게 해야 하는데』라고 하시며, 서운해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李起浩 진술) <문(특검 이병석 검사) 임동원 국정원장의 진술에 의하면, 진술인(박지원)과 이기호 수석이 현대의 북측에 5억 불 대가 지급에 대한 보고를 드리면서 5억 불 송금에 대한 실정법상의 문제점과 그에 반해서 현대 측이 취할 수 있는 이익 등에 대한 논의결과를 보고드리자, 보고를 받으신 대통령께서는 실정법에 다소 어긋나더라도 현대의 사업을 장기적으로 볼 때 인정해 줄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면서 사실상 묵인하는 쪽으로 말씀을 하셨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답 사업의 대가로 5억 불을 지급키로 했다는 내용의 잠정 합의서가 작성되었다는 보고를 받으셨지만 5억 불 지급에 대하여 승인하시는 그런 말씀은 없으셨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朴智元 진술) ![]() 북한의 현찰 요구로 후속 협상일자를 잡지 못하고 결렬되기는 했지만, 北京의 2차 접촉(2000년 3월23일)에서 남북 頂上회담의 시기, 의전 등에 관한 대체적인 의견일치가 이뤄졌다. 북측은 金大中 대통령의 회담 상대가 金正日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히 했으나, 金正日 명의의 초청에는 난색을 표시했다. 2000년 남북 頂上회담 당시 한국 언론에서 「金大中 대통령의 상대가 될 북한 측 인사가 누가될지 알 수 없다」는 식의 해설기사가 쏟아져 나왔지만, 金大中·金正日 간의 회담이 될 것이라는 사실에 처음부터 이견이 없었던 것이다. <북측은 남측의 희망을 고려해서 올해 편리한 시기에 金大中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공식 요청한다. 평양 방문날짜는 서로 합의하여 결정하되, 평양 방문과 관련한 실무적인 문제들은 차후 협의한다는 것이었으나, 우리 측은 정상회담 일정을 6월12일부터 14일까지 2박3일간으로 제시하고 합의문 초안 작성에 있어서 초청자를 金正日 국방위원장으로 명확히 표현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으며, 북측은 정상회담 일정은 6월 중순으로 일단 합의한 뒤 준비회담에서 최종 확정하자고 수정안을 제시하면서 정상회담에서는 金正日 위원장이 당연히 金大中 대통령의 상대역이 될 것이나, 북측 외교관례상 합의서에 金正日 위원장을 명기한 사실이 없다는 점을 들어 곤란하다는 입장을 강하게 피력하여 결국 양측은 초청자 명기 문제에 대해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2차 회담을 종료하게 되었습니다> (金保鉉 진술) <(北京 3차 접촉에서) 金大中 대통령의 평양방문 일자는 2000년 6월12일부터 14일까지 2박3일간으로 하고, 초청자 문제는 남측은 「金正日 국방위원장의 초청에 따라」, 북측은 「金大中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로 각기 별도 표기하기로 절충안에 동의하여, 남북 頂上회담 최종협의 「4·8 합의서」를 마쳤습니다. 공식 발표 시점은 이미 양측이 합의한 상태에서 대외 보안유지가 어렵다는 점을 감안, 최대한 빠른 시점인 2000년 4월10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하기로 하였습니다> (金保鉉 진술) 金大中 대통령의 訪北 일자가 예고 없이 하루 늦춰진 데 대해, 5억 달러 송금 지연이 원인으로 지목돼 왔다. 頂上회담 관계자들은 특검 조사에서 金大中 대통령의 경호를 위한 金正日의 배려로, 회담이 하루 늦어진 것이라고 밝혔다. ![]() <답 2000년 6월3일 임동원 원장과 제가 수행원(서훈 당시 과장)을 대동하고 극비리에 판문점을 통하여 방북을 하여 그날 저녁 金正日 위원장을 만나게 되었는데, 金正日 위원장이 김대통령의 신변안전을 확실히 해야 한다. 12일 방북을 하루 앞당기거나 하루 늦추는 방안도 생각해서 혼돈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을 하기에, 임동원 특사가 일정을 고려할 때 하루를 앞당길 수는 없다고 답을 하였고, 서로 결론을 내지는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6월4일 귀국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6월10일 (하루 연기한다는) 연락을 받고나서 직감적으로 하루를 늦추는구나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문 최근까지 이 부분은 알려지지 아니한 부분이지요. 답 임동원과 북측의 김용순 사이에 이 점은 극비로 부치기로 합의된 내용인데 최근 언론보도로 곤혹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문 진술인(김보현)은 6월3일 이외에도 정상회담을 앞두고 방북을 한 사실이 있는가요. 답 2000년 5월27일에도 임원장, 저, 서훈 3명이 판문점을 통하여 방북하여 대남담당사업비서인 김용순(67세)을 만나서 정상회담 진행문제와 공동선언문 채택문제를 협의하였으나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당일 돌아온 사실이 있습니다> (金保鉉 진술) 金保鉉 국정원 3차장은 정상회담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2000년 2월경 金大中 대통령이 金正日 위원장을 식견이 높다는 등으로 대접해 주기도 하고, 물자지원 등의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며 『1차회담(2000년 3월17일 중국 上海에서 개최)에서 인도적 차원의 지원방안과 SOC 사업지원 약속 등의 선제공격적인 제안을 한 바 있다』고 밝혔다. 金大中 정부가 미국에 알리지 않고 對北접촉을 진행했다는 관측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金大中 정부는 頂上회담 준비협상 초기부터 對北 접촉내용을 미국 측에 알려줬다. <(2000년 3월17일 上海 1차 접촉 직후) 임동원 국정원장이 박태준 총리나 보스워스 미국 대사 등에게 접촉 사실을 설명을 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으며, 보스워스 미국 대사가 저에게서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연락이 와서 제가 대통령께 보고를 드리니까, 『현장에 있었던 숨소리까지 사실대로 알려주라』는 지시를 받고서 상세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朴智元 진술) 鄭夢憲의 現代는 5억 달러라는 거액을 남북 頂上회담 성사의 대가로 代納(대납)하고 그 구멍을 어떻게 메우려고 했을까? 현대는 두 가지 방안을 모색했다. 하나는 「4억 달러는 對北 사업 독점권에 대한 대가」라는 이야기를 남북한 정부를 상대로 기정사실화해서, 거기서 이익을 내는 방안이었다. 다른 하나는 한국 정부를 상대로 『1억 달러를 대납해서 회사 사정이 어려우니 현대를 도와달라』고 압박하는 방법이었다. ![]() 對北사업권을 미국·일본 기업에 팔아 넘겨서 돈을 마련해 보겠다는 꿈은 일찌감치 깨졌다. 북한 투자에 관심을 가진 기업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부를 협박해서 현대그룹에 대규모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금융권의 지원을 얻어내는 데는 상당 부분 성공했다. 그 결과 5억 달러 對北송금으로 멍든 것은 鄭夢憲의 현대그룹과 한국의 금융기관이었다. 金大中 정부는 현대를 살리기 위해 IMF 위기 탈출을 위해 추진해 온 기업구조조정과 금융기관 정상화라는 국가적 과제를 내팽개쳐 버렸다. <문 현대가 북측에 남북 頂上회담 전까지 4억 불을 지급키로 한 이후, 이 자금은 어떤 방법으로 조달하려고 하였는지요. 답 정몽헌 회장은 2000년 4월 중순경 귀국을 하였으며, 그 직후에 김재수 구조조정본부장을 불러서 『우리가 북한에 사업을 하는 데 4억 불 정도가 나가야 할 것 같으니까 준비를 해보라』고 지시를 하자, 김재수 본부장이 『아, 그거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렇잖아도 4월 초순경 북경에서 미국 카길 곡물회사 관계자를 만났는데 돈을 끌어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문 그럼 이미 김재수(현대 구조조정본부장)가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하여 4억 불이 필요하다는 부분에 대해 준비하고 있었다는 말인가요. 답 그런 것이 아니고 카길은 세계최대의 곡물회사로서 중국에 아시아 본사를 두고 있는 회사입니다. 현대의 對北사업이 성공할 경우 카길에게 북한에 곡물을 판매할 수 있는 사업권을 주는 대신에 어느 정도의 투자금을 유치할 목적에서 김재수 본부장이 접촉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으며, 그런 논의가 진행 중에 있었기 때문에 4억 불 정도의 자금동원이 가능할 것 같다는 식의 보고였던 것 같습니다. 문 그 외에 다른 구체적인 자금동원 방법을 모색하지는 않았는가요. 답 2000년 4월26일 현대투자신탁 환매사태가 발생하면서 주식시장이 폭락했고, 鄭夢憲 회장이 私財를 출자하기로 하면서 저는 그 일에 매달리게 됐으며, 다른 한 팀에서는 對北사업 4억 불 송금관련 자금조달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제가 알기로는 일본에서도 對北사업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현대에서는 일본 측 관계자들에게 접촉하여 對北사업에서의 우선권 등을 조건으로 투자금을 유치하여, 동 자금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노력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李益治 진술) ![]() 對北사업권 轉賣(전매)를 통한 현금 확보가 불가능해지자, 현대는 對北 불법 송금자금을 떠안은 것을 근거로 청와대를 압박했다. 현대로서는 정당한 自救(자구)노력이었으나, 정권의 핵심 당국자들에게는 「떼쓰기」로 비쳤다. 현대는 정부 몫 1억 달러 외에 4억 달러도 사실상 남북 頂上회담 성사의 대가라는 비밀을 잘 알고 있는 林東源 국정원장과 朴智元 비서실장을 압박할 수밖에 없었다. 金保鉉 국정원 3차장의 진술이다. <답 정상회담을 하고 난 직후인 2000년 6월 중순경부터 김윤규가 사무실로 찾아오거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수차례에 걸쳐 현대가 정부 몫 1억 불을 도와주었으니 현대를 도와달라는 부탁과 떼쓰기를 한 바 있습니다. 문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답 저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말을 하였으나, 내심으로는 현대가 대신 지급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현대를 도와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문 정부 몫에 관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과 나눈 적이 있는가요. 답 저는 김윤규 외에는 말한 사실이 없고 2003년 1월경 참여정부 인수위 시절 신정부 쪽 인사로부터 對北 송금액 중 1억 불이 정부 몫이라는 말을 들은 사실이 있습니다. 문 鄭夢憲 회장은 현대가 정부의 1억 불을 부담하는 대가로 박지원 장관에게 자금지원을 부탁하였다고 하는데, 정부의 1억 불을 대신 부담하는 대가로 정부 측으로부터 단순 자금지원 차원이 아닌 보다 확실한 대가가 있었을 것으로 보여지는데 어떤가요. 답 확실한 보장책을 요구했으리라는 짐작은 가나 그 점에 관하여는 제가 아는 바가 없습니다> 朴智元 장관과 林東源 국정원장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朴장관은 頂上회담 직전인 2000년 5월31일 林東源 국정원장과 함께 李起浩 청와대 경제수석을 만나, 『현대가 유동성 문제로 대단히 어려운 위기에 처해 있는데 현대가 어렵게 되면 對北사업 추진도 어렵게 되고, 특히 頂上회담을 앞두고 頂上회담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며 『현대에 대한 대출지원을 검토하라』고 강력하게 요청했다. 金忠植 현대사장의 진술이다. <산업은행에 가서 대출을 받은 날(2000년 6월7일) 다음날인지 정확하게 날짜가 기억나지는 않는데 李益治 회장을 찾아가 대출이 성사되었다는 보고를 했습니다. 그런 보고를 하는 중에 李益治 회장이 핸드폰을 2~3개 가량을 가지고 있는데 당시 국정원장에게도 전화를 하기도 하고 받기도 했습니다. 당시 전화기 목소리가 크게 들려서 저에게까지 들릴 정도였고, 또 통화내용이 『걱정하지 마십쇼. 잘 되고 있습니다. 김윤규 사장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라는 등등의 통화내용이었습니다. 그날 아침에 국정원장과 약 세 번 정도의 통화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며, 당시 비서가 전화기를 들고 들어오면서 『국정원장님 전화』라고 말한 것으로 기억되고, 또 통화를 하면서도 『원장님』이라고 호칭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당시 국정원장과 통화를 하면서 李益治가 産銀 대출건은 잘되었다면서 자금전달에 관하여 국정원장과 협의를 하였습니다. 당시 국정원장이 국정원 측에서 실무를 처리할 어떤 직원을 알려준 것 같고, 그래서 李益治 회장이 김윤규 사장에게 그 국정원 직원을 만나도록 지시했으며, 김윤규 사장이 국정원의 직원과 통화하여서 약속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그날인가, 그 다음날인가에 교육문화회관에서 만났습니다> 李起浩 수석도 현대 살리기에 나섰다. <2000년 6월3일 조찬간담회에서 이기호 수석은 이근영 당시 산업은행 총재에게 『현대가 어려움을 겪고 있고, 특히 현대건설의 단기 유동성에 문제가 많다. 현대에 대한 대출이 반드시 되어야 하며, 그러지 않아서 현대가 부도가 나면 앞으로 추진할 對北사업 추진에도 영향을 주고, 그렇게 되면 정상회담에도 영향이 갈 수가 있기 때문에 산업은행이 반드시 대출을 해주어야 되겠다』면서 사실상 현대에 대한 대출지시를 하였다> (특검 검사의 질문에서) 현대에 대한 공적자금 투하, 은행 대출, 현대건설 사모사채 불법 매입 등의 특혜가 여기서부터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산업은행 총재로 嚴洛鎔이 2000년 8월 부임하면서, 鄭夢憲의 현대는 파멸의 초읽기에 몰리기 시작했다. 對北사업에서 수익이 나지 않는 한, 현대에게 금융권의 지원은 돌려막기에 불과했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다. 아랫돌을 빼서 위에 올려놓는 식의 臨時變通(임시변통)으로 자금난을 하루하루 넘기던 현대 사람들은 엄낙용이라는 암초에 坐礁해 꼼짝을 할 수 없게 됐다. 鄭夢憲은 「산은이 대출금 4000억원 상환을 촉구한다」는 보고를 받고, 『산업은행 보고 정부 가서 받으라고 그래』라고 고함을 질렀다. 對北사업 독점을 통한 자금조달도, 금융권의 지원을 통한 위기 탈출도 무위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 <문 2000년 8월경 엄낙용 산업은행 신임 총재가 부임한 이후 산업은행이 현대상선에 4000억원의 상환독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요. 답 저는 현대중공업이 현대증권 현대전자를 상대로 한 민사소송과 관련하여 금융감독원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시점이었습니다. 문 2000년 8~9월경 신임 산업은행 엄낙용 총재가 김충식을 불러 『상환을 조금씩이라도 하고, 구체적인 상환계획을 내지 않으면 부도를 낼 수밖에 없지 않느냐』면서 강력하게 상환독촉을 하여, 현대사옥 鄭夢憲 회장실을 찾아갔을 때 진술인이 함께 있었으며, 그 자리에서 鄭夢憲 회장에게 『산업은행 엄낙용 총재가 구체적인 상환 스케줄을 내지 않으면 부도를 내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됩니까』라고 보고하니까, 鄭夢憲 회장이 대뜸 흥분하면서 『산업은행 보고 정부 가서 받으라고 그래』라고 하여, 다시 김충식이 『그렇게 이야기하면 엄총재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까』라고 했더니, 『그렇게 하라고 그래』라고 하였다는데 진술인도 그런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가요. 답 전혀 모르는 내용입니다. 저는 이미 2000년 8월 하순경부터 회사를 나오지 않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李益治 진술) 그러나 鄭夢憲 회장은 정부로부터 4000억원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특검 조서에는 鄭회장이 『이 돈(4000억원)을 정부로부터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는 현대상선 金忠植 사장의 얘기에 『그게 무슨 가당치 않은 말이냐. 말 같지 않은 얘기하지 말라』고 잘라버리는 모습이 나온다.● -아래글로 계속이어짐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