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핵'안보"
국민의밉상 이재오는 MB의 아킬레스건이다.
서석천
2009. 1. 14. 00:48
이재오의 이름이 또 己丑年 새해 벽두 정가의 화재가 되고 있다. 오는 3월에 귀국하여 특임장관이라는 자리를 맡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한나라당을 다시 뒤흔들고 있다. 국민은 이재오 하면 분란만을 일으키는 오만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대통령 경선이 끝나 이명박이 대통령 후보가 되자마자 이재오는 "당내에는 아직도 MB를 대통령 후보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세력이 있다. 패배자가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것이냐. 좌시하지 않겠다"고 패배한 박근혜 지지자들을 향해 독설을 퍼부었다.
그의 이러한 "미련한 입술"은 여론의 뭇매를 맞아 결국 자기 몸을 망치고야 말았다. 국민과 정치권의 빗발치는 비난을 못이긴 이명박 후보는 2007년 11월 8일 그를 한나라당의 최고위원직에서 사퇴시키고 2선으로 물러나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못 된 제 버릇 어디가나. 그는 비록 형식적으로 2선에 물러 앉았으나 이방호 사무총장을 지휘하여 '공천 물갈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박근혜 지지자들을 대거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탈락시켰다. 박근혜계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김무성의 공천파동과 서청원, 홍사덕의 공천 탈락은 마침내 친박연대라는 정파의 탄생을 가져왔다. 이리하여 한나라당을 친이명박계와 친박근혜계로 확연히 두 동강나게 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하수인이었던 사무총장 이방호가 사천에서 '낙동강
|
이러한 한나라당의 '한지붕 두 가족'의 갈등은 172석이라는 거대 한나라당이 82석 밖에 안되는 민주당에 끌려다니는 수모를 겪으며, 대한민국 국회를 '깡패들의 난투장'으로 만들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 모든 분란의 중심에는 언제나 이재오가 버티고 있었다.
야당과의 타협으로 중요한 민생법안 하나도 처리하지 못하고 戊子年을 넘기고 새해를 맞게되자 '무능한 지도부 인책론'을 들고 나와 한나라당을 또 다시 계파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한 것도 이재오계의 '함께 내일로'라는 정파였다. 그들은 이 기회에 빼앗긴 당권을 되찾고자 '한나라당 쇄신론'을 들고나왔고, 한나라당의 분란을 확산시키고 있는 것이다.
'함께 내일로'라는 이재오 계파는 거의가 옛 민중당 출신이다. 민중당은 1990년 11월 10일 출범했다. "민중의 수탈과 억압의 굴레를 박차고 일어나 분단과 예속체제를 타파하겠다"는 것이 발기취지였고, "외세와 군사독재를 종식시켜 민중주체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기본 목표"로 창당했다. "재벌을 해체하고 기간산업 및 일정규모 이상의 토지를 국유화 한다"는 것과 "연방제 통일"을 기본정책으로 삼았다.
민중당은 창당 이래 줄곧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해 왔었고, 1992년 2월 27일에 내놓은 총선공약에서는 국방비 대폭감축과 예비군 및 민방위군 폐지를 주장함으로써 대한민국 국군의 무장해제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러한 민중당의 정책과 공약 등은 북한의 김정일의 노동당의 정책과 강령과 똑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정가에서는 민중당을 '남조선노동당'이라고 불렀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민중당은 90년 8월 3일 이재오 조국통일위원장을 단장으로 한 대표단을 구성하고, 91년 2월 23일 조선로동당의 방북초청을 수락했다. 이 민중당의 김정일 앞잡이들이 96년 전후해서 대거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에 입당함으로써 한나라당의 이념적 분란과 계파분렬이 시작되었다.
김정일, "남한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동지는 이재오다"
|
|
김문수(경기지사, 전 민중당 노동위원장), 박형준(부산수영) 정태윤(부산 남을), 차명진(부천 소사), 임해규(부천 원미갑), 김성식(서울 관악갑), 허숭(경기 안산 단원갑)과 최유성, 노용수, 최우영, 조춘구 등 민중당 출신 들이 이재오계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되었어도 북한의 김정일의 이들에 대한 기대와 애정은 아직도 변하지 않고 있다. 김정일은 "내가 남한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이재오 동지다"라고 속내를 털어 놓은 적이 있었지 않은가.
고금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역량이 모자란 자가 정권의 2인자 노릇을 하면 그 권력은 반드시 망하고야 말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로마의 군단 출신 어떤 황제는 군단 경리를 맡으면서 군단경비를 착복할 줄 밖에 모르던 부관을 황제가 된 후 공동집정관으로 삼아 2인자로 발탁함으로써 그의 착취와 농간에 신물 난 군단병들에 의해 1년도 못돼 암살당하지 않았던가. 히데요시가 죽은 후 역량이 모자라면서도 권모술수에만 능했던 히데요시의 2인자 이시다 미쓰나리는 이에야스와 맞서다 히데요시 가문을 완전히 멸망시켰던 것이다.
이재오의 호가호위가 이명박의 국가경영에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교훈에 연유한다. 이재오는 상대방을 깔보는 막말을 쏟아냄으로써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최고위원직에서 쫓겨나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에 체류하면서 때가 오기만을 학수고대한다고 한다.
그는 자기를 비난하는 소리가 들리기만 하면 "내가 서울시장도 만들었고 대통령도 만들었는데 그 공로를 모르느냐"고 역정을 낸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노무현이 비판의 표적이 되었던 오만이요 독선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서울시민의 지지로 서울 시장이 되었던 것이지 이재오가 만들어 준 것이 아니다.
더욱이 이명박 대통령도 자기가 만들었다는 호언은 이명박 대통령을 우습게 보는 과대망상증이다. 뿐만 아니라 531만여 표차로 이명박 후보를 압도적으로 대통령으로 당선시켜 준 대한국민에 대한 모독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가장 아끼는 동지는 이재오라는 사실은 국민 모두가 익히 안다.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보호해 주어야 하는 것이 리더에게 주어진 멍에다. 이명박 대통령이 이재오를 살리고, 2007년 대선에서 보여 준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에 보답하여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하는 길은 이재오를 집밖으로 끌어내어 상처투성이로 만들지 말고 조용히 휴식하게 하는 것이다
펌글 [원작/필자 채병률 (사)실향민중앙협의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