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 왜곡
일본열도로 밀려난 백제인들은 신라에 대한 패배감을 극복하기 위하여 일본서기를 왜곡하였다.
A.D 670년경에 日本으로 나라 명칭을 변경한 대화왜는 A.D 712년에 백제인 태안만려로 하여금 고사기를 편찬하게 하고, A.D 720년에 역시 안만려로 하여금 일본서기를 편찬하게 하였다. 이는 백제 유민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일본국을 세운 후 신라에 대한 패배감을 극복하고 일본국의 역사를 미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서기에는 여러 가지 왜곡된 내용이 많이 들어 있는데, 일본서기의 歪曲 부분을 살펴본다.
1). 神代 歪曲
신대의 왜곡 요지를 살펴본다.
가. 고기에 나오는 7세의 환인을 모방하여 일본서기 신대 상에 7세의 가공 신을 만들었다.
고기에는 7세의 환인이 환국의 통치자로 적혀 있으나, 일본서기 신대 상에는 7세의 신이 고천원에 있는 신으로 적혀 있다. 고기에 나오는 7세의 환인과 일본서기 신대에 나오는 7세의 신을 대비해 보면 아래와 같다.
古記 日本書紀
1世 安巴堅 桓因 國常立尊
2世 赫胥 桓因 國狹槌尊
3世 古是利 桓因 豊斟淳尊
4世 朱于襄 桓因 泥土煮尊 沙土煮尊
5世 釋帝壬 桓因 大戸之道尊 大苦邊尊
6世 邱乙利 桓因 面足尊 惶根尊
7世 智爲利 桓因 伊弉諾尊 伊弉冉尊
나. 이장낙존, 이장염존 2신이 일본열도를 만들었다고 왜곡하였다.
신대의 마지막 신 이장낙존 이장염존 2신이 천부교에서 천지경모를 휘두르자 그 창날 끝에서 떨어진 소금물 방울이 엉켜서 한 섬을 만들었고, 2신이 그 섬에 내려와 부부가 된 후 교합하여 담로주를 포로 하여 대일본 풍추진주, 이예이명주, 축자주, 억기주와 좌도주, 월주, 대주, 길비자주 등 8주를 낳고, 대마도, 일기도 등 여러 작은 섬들은 바닷물 방울이 엉켜서 이루어 졌으며, 그 다음으로 海, 川, 山, 木, 草 등을 낳았다고 왜곡하였다.
다. 이장낙존, 이장염존 2신이 일본열도를 관할하는 신을 만들었다고 왜곡하였다.
신을 만든 순서는 먼저 일신을 낳아 하늘로 올려 보내고, 다음 월신을 낳아 역시 하늘로 올려 보내고, 그 다음 질아를 낳았으나 3년이 지나도 서지 못하므로 바람에 띄워 버리고, 그 다음 소잔명존을 낳았다고 적혀 있다.
라. 고기 문구를 뼈대로 하여 신대 하를 만들었다. 고기 문구를 살펴본다.
「무신년(B.C 2173년) 두지주의 예읍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에게 명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를 베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 땅을 소시모리라고 하다가 지금은 음이 바뀌어 우수국이 되었다. 그 후손에 섬야노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三島에 雄據하며 天王이라 稱했다. 豆只州濊邑叛命余守己斬其尊素尸毛犁自是稱其地曰素尸毛犁今轉音爲牛首國也其後孫有陝野奴者逃於海上據三島僭稱天王」
「사벌 단군 무오 50년(B.C 723년) 언파불합을 보내어 바다의 웅습을 평정하였다. 戊午五十年 帝遣將彦波不哈 平海上熊襲」
「매륵 단군 갑인 38년(B.C 667년) 협야후 배반명을 보내어 해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엔 삼도가 모두 평정되었다. 甲寅三十八年 遣陜野侯裵幣命 往討海上 十二月 三島悉平」
위 고기 문구에는 섬야노가 바다로 도망처 삼도에 웅거하여 천왕을 칭하자 기원전 723년에 언파불합을 보내어 웅습에 있는 섬야노를 토벌하였고, 그 후 기원전 667년에 삼도를 토벌하였다는 것이다. 즉 첫번째는 구주를 토벌하였고 그 뒤는 구주뿐만 아니라 본주도 토벌하였다.
일본서기 저자는 위 고기 문구를 뼈대로 하여 신대 하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섬야노가 사람이 아닌 神으로 적혀 있고, 이름이 소잔명존으로 바뀌어져 있다. 그리고 만주에서 이주한 사람이 아니고 이장낙존, 이장염존이 만든 神으로 적혀 있고, 소잔명존이 너무 잔인하여 부모 2신이 근국으로 축출하였다고 적혀 있다.
「부모 2신이 소잔명존에게 "너는 심히 무도하다 천하를 다스릴 임금이 될 수 없다. 마땅히 근국으로 가라" 하고 축출하였다. 故其父母二神勅素戔鳴尊 汝甚無道 不可以君臨宇宙 固當遠適之於根國矣 遂逐之.」 日本書紀 神代上 第5段
「여러 신이 소잔명존을 책하여 “그대의 소행은 심히 무뢰하다. 고로 천상에는 살지 못한다. 또 위원중국에 있어서도 안된다. 속히 저근국으로 가라.” 라고 하고 다같이 쫓아 보냈다.既而諸神 嘖素戔嗚尊曰 汝所行甚無頼 故不可住於天上 亦不可居於葦原中國 宜急適於底根之國 乃共逐降去.」 神代 上 第7段 1書3
위 문구에는 근국으로 축출하였다는 말이 나온다. 소잔명존은 이장낙존, 이장염존이 만든 신 중의 하나인데도 근국으로 축출하였다는 것은 소잔명존이 다른 곳에서 이주해 온 무리라는 것을 뜻한다. 이는 구주로 몰래 이주하여 웅습에 터를 잡은 섬야노가 언파불합에 의하여 구주에서 �겨난 것을 신화 형식으로 왜곡한 것이다.
신대에는 소잔명존이 고천원에서 축출된 후 천조대신을 찾아가 용서를 빌자 천조대신이 소잔명존을 용서하고 가지고 있던 칼과 소잔명존의 곡옥을 교환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는 섬야노가 구주에서 축출된 후 단군을 찾아가 용서를 빌자 단군이 섬야노를 용서하였다는 것을 신화 형식으로 왜곡한 것이다.단군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섬야노는 무리를 거느리고 아직 개척되지 않은 땅 위원중국으로 이주하여 그곳을 평정하여 터전으로 만들었다.
「이에 일신은 소잔명존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일신이 낳은 3여신을 축자주로 내려보냈다. 그 때에 가르쳐 “너 3신은 해로의 도중에 내려가 천손을 도와 천손을 위하여 제사지내라”라고 하였다.於是 日神 方知素戔嗚尊 固無惡意 乃以日神所生三女神 令降於筑紫洲 因敎之曰 汝三神 宜降居道中 奉助天孫 而爲天孫所祭也.」 神代 上 第6段 1書1
「일신은 소잔명존이 처음부터 깨긋한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6남자를 일신의 아이로 삼아 천원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일신이 낳은 3여신으로는 위원중국의 우좌도에 살게 하였다. 지금은 해북도 중에 있다. 故日神方知素戔鳴尊 元有赤心 便取其六男 以爲日神之子 使治天原 即以日神所生三女神者 使降居于葦原中國之宇佐嶋矣 今在海北道中 號曰道主貴 此筑紫水沼君等祭神是也.」 神代 上 第6段 1書3
「이때 소잔명존은 아들 오십맹신을 데리고 신라국에 내려서 소시모리라는 곳에 있었다. 그리고 "이 땅은 내가 살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며 진흙으로 배를 만들어 타고 동쪽으로 가 출운의 파천 상류에 있는 조상봉으로 갔다. 是時 素戔鳴尊 帥其子五十猛神 降到於新羅國曾尸茂梨之處 乃興言曰 此地吾不欲居 遂以埴土作舟 乘之東渡 到出雲國簸川上所在 鳥上之峯.」 神代 上 第8段
「이때 소잔명존이 하늘에서 출운국의 파천의 상류에 하강하였다. 이때 한곳에서 곡성이 나는 것을 들었다. 소리를 찾아가 보니 노인과 노파가 한 소녀를 가운데 두고 어루만지며 울고 있었다. 소잔명존이 "그대들은 누구인가 어째서 우는가?"라고 물었다. 대답하여 "나는 이 나라의 국신입니다. 이름은 각마유이고 아내의 이름은 수마유입니다. 이 여자 아이는 우리 딸 기도전희입니다. 지난날 우리는 딸 여덟이 있었습니다. 해마다 팔지대사 때문에 하나씩 먹혔습니다. 이제 이 아이를 삼킬 차례입니다. 면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슬피우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소잔명존이 "만일 내가 이 여자를 살리면 나에게 주겠는가"라고 말하였다. "말씀대로 올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중략..때가 되니 과연 큰 뱀이 왔다..중략..그때 소잔명존이 차고 있던 칼을 빼어 그 뱀을 토막내었다..중략..거기서 서로 교합하여 대기귀신을 낳았다. 是時 素戔嗚尊 自天而降 到於出雲國簸之川上 時聞川上有蹄哭之聲 故尋聲覓往者 有一老公與老婆 中間置一少女 撫而哭之 素戔嗚尊問曰 汝等誰也 何爲哭之如此耶 對曰吾是國神 號脚摩乳 我妻號手摩乳 此童女是吾兒也 號奇稻田姫 所以哭者 往時吾兒有八箇少女 毎年爲八岐大蛇所呑 今此少童且臨被呑 無由脱免 故以哀傷 素戔嗚尊勅曰 若然者 汝當以女奉吾耶 對曰 隨勅奉矣..中略..至期果有大蛇..中略..時素戔嗚尊 乃拔所帶十握劒 寸斬其蛇..中略..乃相與遘合 而生兒大己貴神.」 神代 上 第8段
위 문구는 소잔명존이 신라국 소시모리를 거쳐 아직 개척되지 않은 땅인 위원중국의 출운 방면으로 이주하여 그 곳에 있는 나쁜 뱀(토착민을 비하한 것)을 죽이고 위원중국을 개척한 것을 신화 형식으로 적은 것이다. 소잔명존과 그 후손이 위원중국을 개척하자 고황산령존은 그 땅을 탐내어 소잔명존과 그 후손들을 제거하고 그 땅을 빼앗아 버렸다.
「천조대신의 자 정재오승승속일천인수이존이 고황산령존의 딸 고번천천희에 장가들어 천진언언화경경저존을 낳았다. 황조인 고황산령존이 특히 귀여워 하여 사랑을 모아서 각별히 키웠다. 황손인 천진언언화경경저존을 세워서 위원중국의 임금으로 하려고 하였다..중략.. 고황산령존이 모든 신을 소집하여 "위원중국의 나쁜 귀신들을 평정하려고 한다 누구를 보내야 좋은가? 그대들 모든 신은 숨김없이 말하라"라고 하였다. 천수일명이 가서 평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대기귀神에게 아첨하여 3년이 지나도록 보고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배반삼웅지대인을 보냈다. 이 역시 그 아버지에 따라 복명하지 않았다..중략..두 신이 오십전협의 해변에 내려 큰 칼을 빼어 거꾸로 땅에 꽃고 그 머리에 앉아 대기귀신에게 "고황산령존이 황손을 내려보내 이 땅의 임금으로 하려한다. 고로 우리 두 신을 보내 평정하게 하였다.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피하겠는가 아닌가"라고 물었다. 대기귀신이 "나의 자식에게 물어보고 답하겠습니다" 대답하였다..중략..그리고 바다 가운데 겹겹이 섭나무로 울타리를 만들고 뱃전을 밟고 피하였다. 天照大神之子正哉吾勝勝速日天忍穗耳尊 娶高皇産靈尊之女栲幡千千姫 生天津彦彦火瓊瓊杵尊 故皇祖高皇産靈尊 特鍾憐愛 以崇養焉 遂欲立皇孫天津彦彦火瓊瓊杵尊 以爲葦原中國之主 然彼地多有螢火光神 及蝿聲邪神 復有草木咸能言語 故高皇産靈尊 召集八十諸神 而問之曰 吾欲令撥平葦原中國之邪鬼 當遣誰者宜也 惟爾諸神 勿隱所知 僉曰 天穗日命 是神之傑也 可不試歟 於是 俯順衆言 即以天穗日命往平之 然此神佞媚於大己貴神 比及三年 尚不報聞 故仍遣其子大背飯三熊之大人 大人 此云于志 亦名武三熊之大人 此亦還順其父 遂不報聞..中略..二神 於是 降到出雲國五十田狹之小汀 則拔十握劒 倒植於地 踞其鋒端 而問大己貴神曰 高皇産靈尊 欲降皇孫 君臨此地 故先遣我二神 駈除平定 汝意何如 當須避不 時大己貴神對曰 當問我子 然後將報..中略..因於海中 造八重蒼柴籬 蹈船 而避之使者即還報命.」 神代 下 第9段
「천조대신이 천치언에게 “풍위원중국은 내 아이가 왕이 될 땅이다.一書曰 天照大神 勅天稚彦曰 豐葦原中國 是吾兒可王之地也”」 神代 下 第9段 1書1
위 신대 문구에는 황조인 고황산령존이 그 땅을 황손인 천진언언화경경저존에게 주려고 장군을 보내어 소잔명존의 아들 대기귀신 등으로부터 그 땅을 빼앗았다고 적혀 있다. 이때 대기귀신과 그 아들은 고황산령존이 보낸 장군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전략.그대가 다스리는 현세의 정치에 관한 일은 황손이 다스릴 것이다. 그대는 신사에 관한 일을 맡아서 해주시오. 그대가 살 곳인 천일우궁은 지금 지으려고 한다. 즉 천발이나 되는 고승 으로 튼튼하고 확실하게 잡아 맬 것이다. 宮을 짓는 식은 기둥은 높고 굵게 하고, 널은 넓고 두꺼운 것으로 하겠다. 또 논을 경작하여 주겠다..중략..그대를 제사지낼 자는 천수일명이다. 宜是吾孫治之 汝則可以治神事 又汝應住天日隅宮者 今當供造 即以千尋栲繩 結爲百八十紐 其造宮之制者 柱則高大 板則廣厚 又將田供佃 又爲汝往來遊海之具 高橋浮橋及天鳥船 亦將供造 又於天安河 亦造打橋 又供造百八十縫之白楯 又當主汝祭祀者 天穗日命是也」 神代 下 第9段 1書2
위에 나온 문구 중 고황산령존이 장군을 보내 대기귀신 등에게 한 말 중 "그대가 다스리는 현세의 정치의 일은 황손이 다스릴 것이다. 그대는 신사에 관한 일을 해 주시오"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신으로 모시고 제사 지내주겠다는 뜻이지만 죽인다는 뜻이다.
신대 하 문구에는 고황산령존이 황손 천진언언화경경저존에게 팔판경의 곡옥과 팔지경, 초치검 3종의 보물을 주어 세상으로 내려 보냈다고 적혀 있다. 이는 고기에 환인이 환웅에게 천부인 3개를 주어 세상으로 내려 보냈다는 내용을 모방하여 천손하강 신화를 만든 것이다.
신대 하 문구에는 이때 지상으로 내려온 황손이 혼인하여 4아들을 낳았는데, 그 셋째가 언화화출견존이고, 언화화출견존은 다시 아들 언파렴무로자초즙불합존을 낳았고, 언파렴무로자즙불합존은 다시 언오뢰명, 도반명, 삼모입야명과 협야존 등 4 아들을 낳고 서주궁에서 죽었다고 적혀 있다. 이는 신무천황의 가공세계를 만든 것이다.
2). 건국년도와 시조 왜곡
1세 신무천황
일본서기 신무천황기에는 신무천황이 B.C 667년에 동정에 나서 7년만에 변방을 제외한 중주의 땅을 평정하고 B.C 660년에 일본국을 건국하였다고 적혀 있다.
일본서기 저자는 무엇을 근거로 하여 신무천황을 일본국의 건국시조로 왜곡하였을까? 이를 알기 위하여 우리의 고기 문구를 살펴본다.
「36세 매륵 단군 갑인(B.C 667년) 협야후 배반명을 보내어 해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에 삼도(일본열도)가 모두 평정되었다. 遣陜野侯裵幣命 往討海上 十二月 三島悉平」
고기에는 B.C 667년에 협야후가 삼도를 평정하였다고 적혀 있고, 일본서기에는 B.C 667년에 협야존이 동정에 나섰다고 적혀 있다. 고기에 나오는 합야후와 일본서기에 나오는 협야존은 이름이 같고 또 같은 시기에 일본열도를 평정하였다. 즉 고기에 나오는 합야후와 일본서기에 나오는 협야존은 동일인물이다. 이를 보면 일본서기 저자는 일본서기를 만들기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기에 합야후가 삼도를 평정하였다고 적혀 있자 이 자료를 이용하여 협야존이 일본을 평정하여 일본국을 세웠다고 왜곡하였다.
고기에는 협야후가 삼도를 평정하였다고만 적혀 있지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는 내용은 전혀 없다. 또 신무천황 다음에 적혀 있는 2세 수정천황부터 9세 개화천황까지는 가공천황이다. 따라서 일본서기에 적혀 있는 협야존은 일본국의 시조가 아니다.
3). 가공천황을 만들어 넣어 왜곡
2세 수정천황 B.C 581년 즉위
3세 안녕천황 B.C 549년 즉위
4세 의덕천황 B.C 510년 즉위
5세 효소천황 B.C 475년 즉위
6세 효안천황 B.C 392년 즉위
7세 효령천황 B.C 290년 즉위
8세 효원천황 B.C 214년 즉위
9세 개화천황 B.C 158년 즉위
일본서기 저자는 신무천황을 가공시조로 만든 후, 신무천황 이후부터 숭신천황 이전까지의 천황공백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신무천황과 숭신천황 사이에 8명의 가공천황을 만들어 넣었다. 그 때문에 2-9세 천황들의 본기 내용에는 세자책봉, 천황의 즉위와 사망 사실만 적혀 있고 역사적 사실 기재가 전혀 없다.
위 천황이 가공천황이라는 것은 천황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다. 즉 중국황제의 시호에 “孝” 자를 사용한 시기는 한나라 때인데, 효소천황은 전한의 8세 효소제와 시호가 같고, 효원천황은 전한의 10세 효원제와 시호가 같다. 이는 일본서기 저자가 전한 황제의 시호를 일본천황의 시호로 일부 도용하였기 때문이다.
4). 구주왜 王이 일본열도 전지역을 다스린 듯이 왜곡
10세 숭신천황 B.C 97년 즉위
11세 수인천황 B.C 29년 즉위
일본서기에는 숭신과 수인에게 천황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지만 환단고기에 의하면 숭신천황이나 수인천황이 재위한 때는 일본열도에 아직 연맹왕조가 세워지지 않고 수십개의 소국으로 갈라져 있었다. 따라서 숭신천황이나 수인천황은 구주의 1개 소국의 왕에 불과하였다.
5). 재위기간 왜곡
12세 경행천황 A.D 71년 즉위
경행천황기에는 경행천황이 A.D 71년에 즉위하여 60년을 재위하고 A.D 130년에 사망한 것으로 적혀 있고, 2, 3, 4, 12, 13, 18, 19, 20, 25, 27, 28, 40, 51, 52, 53, 54, 55, 56, 57, 58, 60년조가 적혀 있다. 그 中 29년부터 50년까지 사이의 약 20여년 공백기는 경행천황의 재위기간을 약 20여년 늘리면서 생긴 공백이다. 따라서 경행천황의 실제 재위기간은 60년에서 약 20년을 뺀 약 40년이므로, 경행천황은 실제로는 A.D 71년부터 A.D 110년경까지 약 40년간 재위하였다.
경행천황의 사망년도를 A.D 110년경으로 보면, 경행천황 다음 천황인 성무천황의 실제 즉위년도가 A.D 155년경이므로, 경행천황이 실제 사망한 때로부터 성무천황이 실제 즉위한 때까지 약 40여년간의 천황공백기가 생긴다.
경행천황 다음 천황인 성무천황이 일본무존의 아들인 중애천황을 태자로 삼았고, 중애천황기를 보면 중애천황이 일본무존을 부왕이라 부르고 있으므로, 경행천황에서 성무천황 사이에 존재한 약 40여년간의 천황공백기는 일본무존이 통치한 기간이다.
일본서기 저자는 경행천황과 성무천황 사이에 존재한 약 40여년간의 천황공백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성무천황을 경행천황 바로 다음 천황으로 적고, 경행천황의 사망년도를 실제보다 약 20년 늦추는 동시에 성무천황의 즉위년도를 실제보다 약 20여년 앞당겼다.
일본무존 통치사실 은폐
A.D 110년경에 경행천황이 죽은 후 그 뒤 성무천황이 즉위할 때까지 약 40여년간 일본무존이 통치한 기간이 있었다. 일본서기 저자는 천황의 연속을 가장하기 위하여 A.D 110년경에 죽은 경행천황 대신에 일본무존이 죽었다고 적고, 경행천황의 재위기간을 40여년 늘려 놓았다.
13世 성무천황 일본서기년도 A.D 131년 실제년도 A.D 155년경 즉위
성무천황기에는 성무천황이 A.D 131년부터 A.D 190년까지 60년간 재위하였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성무천황이 실제 재위한 기간은 A.D 155년경부터 A.D 161년경까지이므로, 성무천황기에 적혀 있는 성무천황의 재위기간은 실제보다 앞쪽으로 20여년, 뒤쪽으로 29년 합계 50여년이 더 많게 적혀 있다.
성무천황의 즉위년도가 실제보다 20여년 빨라져 있는 것은 경행천황과 성무천황 사이에 일본무존이 40여년간 통치한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40여년 중 20년은 경행천황의 재위기간에, 20여년은 성무천황의 재위기간에 각 넣어 경행천황 바로 다음에 성무천황이 통치한 것처럼 왜곡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무천황의 사망년도가 실제년도보다 29년 늦어져 있는 것은 신공황후의 사망년도를 늦추기 위하여 신공황후 앞에 재위한 성무천황과 중애천황의 사망년도를 연쇄적으로 실제년도보다 뒤로 늦추었기 때문이다.
14세 중애천황 일본서기년도 A.D 192년 실제년도 A.D 165년경 즉위
중애천황기에는 중애천황이 A.D 192년에 즉위하여 A.D 200년까지 재위하였다고 적혀 있으나, 중애천황은 A.D 161년에 성무천황이 죽은 후 A.D 162년부터 A.D 164년까지 3년간의 공백기를 거쳐 A.D 165년에 즉위하여 3년간 재위하다가 A.D 167년에 사망하였다. 따라서 중애천황기에 적혀 있는 중애천황의 재위기간은 실제 재위기간과 틀린다.
중애천황기에는 1, 2, 8, 9년조가 적혀 있는데, 중애천황 재위 8년은 실제로는 재위 3년이고, 재위 9년은 가공년도이다.
일본서기 중애천황기에는 중애천황이 재위 9년(가공년도) 2월에 죽었다고 적혀 있다.
「중애천황 9년 2월 천황이 몸이 갑자기 아프더니 다음날 붕하였다. 그 때 나이 52세였다. 즉 신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일찍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一에 천황이 친히 웅습을 쳤는데 적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하였다) 황후와 무내숙녜는 천황의 상을 감추고 천하에 알지 못하게 하였다.후략 九年春二月癸卯朔丁未 天皇忍有痛身 而明日崩 時年五十二 卽知 不用神言而早崩 (一云 天皇親伐熊襲中賊矢而崩也) 於是 皇后及大臣武內宿禰 匿天皇之喪 不令知天下.후략」
고사기에는 중애천황이 웅습국을 토벌할 때 죽었다고 적혀 있다.
「그 황후인 식장대일매명자는 그때 신이 들렸다. 그것은 천황이 축자의 사지비궁에 와서 웅증국을 토벌할 때 일인데, 천황이 거문고를 타고는 건내숙니 대신은 정원에서 신의 명을 받게 하였다. 그러자 황후에게 신이 내려 신이 그녀를 통하여 말을 하기를 "서쪽에 나라가 있다. 금과 은을 비롯하여 눈부신 진귀한 보물이 그 나라에 많다. 나는 이제 그 나라를 복속시켜 너희들에게 주겠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천황이 대답하기를 "높은 곳에 올라가 서쪽을 바라보아도 국토는 보이지 않고 망망대해가 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이 신이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여겨 거문고를 타지 않고 밀어 제쳐 놓은 채 침묵하고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신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무릇 이 천하는 그대가 다스릴 나라가 아니다 너는 죽음의 세계인 황천국으로 가거라"라고 말하였다. 그때 건내숙니 대신이 말하기를 "황공하옵니다. 저희들의 천황이시어 거문고를 다시 한번 타보아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천황은 이윽고 그 거문고를 다시 잡아 적당히 줄을 당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거문고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즉시 불을 밝히고 들어다 보니 이미 천황은 숨져 있었다. 其大后息長帶日賣命者 當時歸神 故 天皇坐筑紫之詞志比宮將擊熊曾國之時 天皇控御琴而 建內宿禰大臣居於沙庭 請神之命 於時 大后歸神 言敎覺詔者 西方有國 金.銀爲本 目之炎耀 種種珍寶 多在其國 吾今歸賜其國 爾 天皇答白 登高地見西方者 不見國土 唯有大海 謂爲詐神而 押退御琴不控 默坐 爾 其神大忿詔 凡玆天下者 汝非應知國 汝者向一道 於時 建內宿禰大臣白 恐 我天皇 猶阿蘇婆勢其大御琴(自阿至勢以音) 爾 稍取依其御琴而 那麻那摩爾(此五字以音) 控坐 故 未機久而 不聞御琴之音 卽擊火見者 旣崩訖.후략」古事記 仲哀天皇紀 神功皇后의 降神篇
위 고사기 문구에 의하면 중애천황은 웅습을 토벌할 때 죽었다. 일본서기 중애천황기에 의하면 중애천황이 웅습을 칠 때는 재위 8년(실제는 在位 3년) 9월이었다. 따라서 중애천황은 재위 8년(실제는 재위 3년) 9월에 죽었다.
중애천황기에 중애천황이 재위 9년(가공년도) 2월에 죽었는 것처럼 적혀 있는 것은 신공황후기 섭정전 12월조에 신공황후가 중애천황의 아이인 응신을 낳았다고 왜곡해 놓은 것 때문이다.
일본서기 저자는 중애천황기를 적을 때 처음에는 중애천황이 재위 8년(실제는 재위 3년) 9월에 죽었다고 적었다. 그 뒤 신공황후기를 적으면서 A.D 247년에 멸망한 야마대연맹과 A.D 390년에 세워진 응신조를 동일한 천황가로 꾸미기 위하여, 신공황후기 섭정전 12월조에 신공황후가 중애천황의 아이인 응신을 낳았다고 왜곡해 놓았다. 이렇게 왜곡해 놓고 뒤에 보니 신공황후가 중애천황이 죽은지 15개월 후에 응신을 낳은 모순이 발견되었다.
일본서기 저자는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신공황후가 허리에 돌을 감아 10달이 되어도 아이(응신)가 나오지 못하도록 하여 15달만에 낳았는 것처럼 왜곡하였으나, 이것도 설득력이 없자 신공황후가 응신을 낳았다고 왜곡한 섭정전 12월에서 10달을 거꾸로 계산하여 같은 해 2월에 중애천황이 죽었는 것처럼 왜곡하였다. 즉 중애천황의 사망시기를 5달 늦춤으로써 외관상 신공황후가 중애천황이 죽은지 10개월 후에 응신을 낳았는 듯이 왜곡하였다. 그러나 응신천황은 A.D 390년에 즉위한 대화왜 천황이고, 신공황후는 A.D 247년에 죽은 구주왜 섭정왕이므로, 서로 다른 천황가이고 존재시기도 140여년 차이가 난다.
6). 신공황후기 왜곡
일본서기에서 가장 많이 왜곡된 내용이 나오는 부분은 신공황후기이다. 신공황후기의 왜곡 부분을 살펴본다.
「섭정전 10월 화이진에서 출발하였다. 때에 풍신이 바람을 일으키고 해신이 파도를 일으켜 바닷속의 큰 고기들이 다 떠올라 배를 도왔다. 바람은 순풍이 불고 범선은 파도에 따라갔다. 노를 쓸 필요없이 곧 신라에 이르렀다. 그때 배에 따른 파도가 멀리 나라안에까지 미쳤다. 이것으로 천신지지가 모두 도와 준 것을 알았다. 신라왕은 전율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러 사람을 모아서 "신라 건국 이래 아직 바닷물이 나라 안에까지 올라온 일을 듣지 못하였다. 천운이 다하여 나라가 바다가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을 하였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군이 바다를 메우고 깃발들이 해에 빛나고 북과 피리 소리가 山川에 울렸다. 신라왕은 멀리 바라보고 생각밖의 군사들이 자기 나라를 멸망시키려 하는가라고 생각하였다. 두려워 싸울 마음을 잃었다.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내가 들으니 동쪽에 신국이 있다. 일본이라 한다. 또한 성왕이 있다. 천황이라 한다. 반드시 그 나라의 신병일 것이다. 어찌 군사를 들어 방비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백기를 들어 항복하였다. 흰 줄을 목에 감고 스스로를 포박하였다. 지도와 호적을 바치고 왕선 앞에서 항복하였다. 그리고 "금후는 길이 건곤과 같이 엎디어 양마의 일을 하겠습니다. 선타를 말리지 않고 춘추로 말의 빗 및 말의 채찍을 바치겠습니다. 또 바다가 멀지만 매년 남녀의 손으로 만든 것을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거듭 맹세하여 "동에 나오는 해가 서에서 나오지 않는 한 또 아리나례하가 역류하고 내의 물이 하늘에 올라가 별(星)로 되는 때를 제외하고는 춘추의 조공을 빼거나 태만하여 빗과 채찍을 바치지 아니하면 천신지지와 같이 죄를 주십소서"라고 말하였다. 그때 어떤 사람이 "신라왕을 죽입시다"라고 하였다. 이에 황후가 "처음에 신의 가르침을 따라 장차 금은의 나라를 얻으려고 하였다. 또 삼군에 호령하여 '자복하는 자를 죽이지 말라'라고 한 바 있다. 지금 이미 재보의 나라를 얻었다. 또 사람이 스스로의 일을 맡겼다. 드디어 그 나라 안에 들어가 중보의 곳간을 봉하고 지도와 호적 문서를 거두었다. 황후가 짚고 있던 창을 신라왕의 문에 세우고 후세의 표로 하였다. 그 창이 지금도 신라왕의 문에 서 있다. 신라왕 파사매금은 미질기지파진간지를 인질로 하여 금, 은, 채색..중략..가지고 80척의 배에 실어 관군을 따라가게 하였다. 때문에 신라왕은 항상 80척 배의 조공을 일본국에 바친다. 이것이 그 연유다. 이에 고구려, 백제 2 나라 왕은 신라가 지도와 호적을 거두어 일본국에 항복하였다는 것을 듣고 가만히 그 군세를 엿보게 하였다.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영외에 와서 머리를 땅에 대고 "금후는 길이 서번이라 일컫고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내관가둔창을 정하였다. 이가 소위 삼한이다. 황후는 신라에서 돌아왔다. 冬十月己亥朔辛丑 從和珥津發之 時飛廉起風 陽侯擧浪 海中大漁 悉浮扶船 則大風順吹 帆船隨波 不勞 楫 便到新羅 時隨船潮浪 遠逮國中 卽知 天神地祗悉助歟 新羅王 於是 戰戰慄慄조身無所 則集諸人曰 新羅之建國以來 未嘗聞海水凌國 若天運盡之 國爲海乎 是言未訖之間 船師滿海 旌旗耀日 鼓吹起聲 山川悉振 新羅王遙望以爲 非常之兵 將滅已國 섭焉失志 乃今醒之日 吾聞 東有神國 爲日本 亦有聖王 謂天皇 必其國之神兵也 豈可擧兵以距乎 卽素 而自服 素組以面縛 封圖籍 降於王船之前 因以 叩頭之曰 從今以後 長與乾坤 伏爲飼部 其不乾船柁 以春秋獻馬梳及馬鞭 復不煩海遠 以每年貢男女之調 則中誓之曰 非東日更出西 且除阿利那禮河返以之逆流及何石昇爲星辰 而殊闕春秋之朝 怠廢梳鞭之貢 天神地祗共討焉 時或曰 欲誅新羅王 於是皇后曰 初承神敎 將授金銀之國 又號令三軍曰 勿殺自服 今旣獲財國 亦人自降服 殺之不祥 乃解其縛爲飼部 遂人其國中 封重寶府庫 收圖籍文書 卽以皇后所杖矛 樹於新羅王門 爲侯棄之印 故其矛今猶樹于新羅王之門也 爰新羅王波沙寐錦 卽以微叱己知波珍干岐爲質 仍齎金銀彩色及綾羅 絹 載于八十艘船 令從官軍 是以 新羅王常以八十船之調 貢于日本國 其是之綠也 於是高麗百濟二國王 聞新羅收圖籍降於日本國 密令何其軍勢 則知不可勝 自來于營外 叩頭以款曰 從今以後 永稱西蕃 不絶朝貢 故因以定內官家屯倉 是所謂之三韓也 皇后從新羅還之」
고대에 한반도에서 대마도나 일본열도로 이주한 무리는 이주한 곳에 소국을 세우고 나라 이름으로 근국의 이름을 많이 사용하였다. 일본서기 저자는 신공황후가 대마도에 있는 신라계, 백제계, 고구려계 소국을 정벌한 사실을 이용하여 그 사실에다 한반도의 신라 역사를 적은 신라기에서 왜가 신라보다 우위에 있는 사실을 발췌하여 이를 신공황후기에 가필해 넣음으로써 신공황후가 마치 한반도의 신라, 백제, 고구려를 정벌한 것처럼 신공황후기를 왜곡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파사이사금은 A.D 80년부터 A.D 111년까지 재위한 신라왕이고, 미사흔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A.D 390년에,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A.D 402년에 왜에 인질이 된 인물이므로, 모두 신공황후 시대의 인물이 아니다. 즉 파사니사금이나 미사흔은 모두 신공황후 시대의 인물이 아닌데도 이들에 관한 사실을 신공황후기에 가필해 넣어 신공황후기를 왜곡하였다.
「섭정전 12월 예전천황을 축자에서 낳았다. 그때 사람이 그곳을 우니라고 한다. [一에 말하였다. 중애천황이 (강일궁)에 있었다. 신이 있어 사마현주)의 선조 내피고국피고송옥종에 지펴 가르처 "천황이 보패의 나라를 얻으려고 하신다면, 정말로 주어도 좋다"라고 말하였다. 또 "거문고를 가지고 가서 황후에게 드려라"고 말하였다. 신의 말에 따라서 황후는 거문고를 탔다. 이에 신이 황후에 지펴 가르쳐 "지금 천황이 소망하는 나라는 녹각과 같다. 보패가 없는 나라다. 지금 천황이 타는 배 및 혈호직천립이 바친 수전 이름이 대전을 폐백으로 하고 나를 잘 제사 지내면 미녀의 눈썹과 같은 금은이 많은 눈이 빛나는 나라를 천황에게 주겠다"라고 말하였다. 그때 천황이 신에 대하여 "아무리 신이라도 어찌하여 속이려고 하는가. 어디에 나라가 있는가. 짐이 탄 배를 신에 바치고는 짐이 어느 배에 탈 것인가. 더욱이 어느 神이라는 것을 모른다. 아무쪼록 그 이름을 알고자 한다"라고 말하였다. 때에 신이 이름을 알려 "표통웅, 중통웅, 저통웅(주길삼신)"이라고 삼신 이름을 일컫고 또 거듭 "내 이름은 "향궤남문습대력오어혼속협등존"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때 천황은 황후에게 "듣기 싫은 것을 말하는 부인인가. 어찌 속등존이라 하는가"라고 말하였다. 이에 신이 천황에게 일러, "너 왕이 이렇게 믿지 못한다면, 반드시 그 나라를 얻지 못할 것이다. 다만 지금 황후가 임신하고 있는 왕자는 아마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 밤에 천황은 갑자기 병이 나서 붕하였다. 연후에 황후는 신의 가르침대로 제사를 지냈다. 황후는 남장하고 신라를 쳤다. 그 때에 신이 인도하였다. 배에 따른 파도가 멀리 신라 나라 안에까지 미쳤다. 이에 신라의 왕 우류조부리지간이 마중나와 무릎을 꿇고 배를 잡고 머리를 땅에 대고 "신은 금후 일본국에 계시는 신의 아들에게 내관가로서 끊이지 않고 조공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十二月戊戌朔辛亥 生譽田天皇於筑紫 故時人號其産處曰宇0[一云 足仲彦天皇居筑紫강日宮 是有神託沙마縣州祖 內避高國避高松屋種 以誨天皇曰 於孫尊也 若欲得寶國耶 將現授之 便復曰 今將來以進于皇后 則隨神言以皇后撫琴 於是 神託皇后 以誨之曰 今於孫尊所望之國 譬如鹿角 以無寶國也 其今御孫尊所御之船 及穴戶直踐立所貢之水田名大田 爲幣能祭我者 則如美女之 而金銀多之眼炎國以授御孫尊 時天皇對神曰 其雖神何 御耶 何處將有國 且朕所乘船旣奉於神 朕乘曷船 然未知誰神 願欲知其名 時神稱其名曰 表筒雄 中筒雄 底筒雄 如是稱三神名 且重曰 吾名向궤男聞襲大歷五御魂速狹騰尊也 時天皇謂皇后曰 聞惡事之言坐婦人乎 何言速狹騰也 於是 神謂天皇曰 汝王如是不信 必不得其國 唯今皇后懷妊之子 蓋有獲 是夜天皇忽病發以崩之 然後皇后隨神敎而祭 則皇后爲男束裝 征新羅 時神留導之 由是 隨船浪之遠及于新羅國中 於是 新羅王宇流助富利智干 參迎 之 取王船卽叩頭曰 臣自今以後 於日本國所居神御子 爲內官家 無絶朝貢]」
위 문구에는 신공황후가 중애천황의 아이를 잉태하여 섭정전(A.D 200년) 12월에 응신을 축자에서 낳았다고 적혀 있으나, 신공황후 사망(A.D 247년) 후부터 응신천황 즉위(A.D 390년) 사이에는 140여년간의 천황 공백기가 있었다. 따라서 신공황후가 응신천황을 낳았다는 위 신공황후기 문구는 왜곡된 것이다.
「섭정전 12월 전략.[一에 말하였다. 신라왕을 포로로 하고 해변에 와서 무릎근을 뽑고서 돌 위에 포복시켰다. 조금 있다가 베어서 모래 속에 묻었다. 한 사람을 남겨 신라에 있는 일본의 宰로 하고 돌아왔다. 그 후에 신라왕의 처는 남편의 시신이 묻혀 있는 곳을 모르고 혼자서 宰를 유혹할 생각을 가졌다. 宰를 꾀어서 "그대는 왕의 시신을 묻은 곳을 알려주면 마땅히 후하게 보답하겠다. 또 그대의 처가 되겠다"라고 말하였다. 재는 꼬이는 말을 믿고 가만히 시신이 있는 곳을 말하였다. 왕의 처와 국인이 공모하여 재를 죽였다. 왕의 시신을 꺼내어 다른 곳에 묻었다. 그때 재의 시신을 왕의 묘의 흙 밑에 묻고 왕의 관 아래에 놓고 "존비의 순서는 실로 이와 같은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군선이 바다에 가득하게 건너갔다. 신라의 국민이 모두 두려워 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서로 모여 공모하여 왕의 처를 죽이고 죄를 사죄하였다. 一云 禽獲新羅王 詣于海邊 拔王빈筋 令匍匐石上 俄而斬之 埋沙中 則留一人 爲新羅宰而還之 然後 新羅王妻 不知埋夫屍之地 獨有誘宰之情 乃 宰曰 汝當令識埋王屍之處 必敦報之 且吾爲汝妻 於是 宰信誘言 密告埋屍之處 則王處與國人 共議之殺宰 更出王屍葬於他處 乃時取宰屍 埋于王墓土底 以擧王 其上曰 尊卑次第 固當如此 於是 天皇聞之 重發震忿 大起軍衆 欲頓滅新羅 是以 軍船滿海而詣之 是時 新羅國人悉懼 不知所如 則相集共議之 殺王妻以謝罪]」
위 문구는 왜가 신라의 서불한 석우노의 말 실수를 빙자하여 석우노를 죽인 내용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석우노가 죽은 해는 A.D 253년이다. 따라서 석우노의 죽음은 A.D 247년에 죽은 신공황후와 전혀 관계가 없다. 석우노가 죽은 A.D 253년경은 사마대연맹이 와해된 후 일본열도가 다시 소국으로 갈라져 있을 때이고, 반면에 구태백제는 온조백제 등을 후국으로 거느리고 있으면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을 때이다. 따라서 강대국인 신라가 제대로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신라의 최고 대신을 죽도록 방관할 수밖에 없었는 상대방은 소국인 일본열도의 왜가 아니라 서.남해와 일본열도의 왜를 세력권에 넣고 있었는 강대국 구태백제이다. 일본서기 저자는 구 신라기에서 왜가 신라 대신을 죽인 내용이 나오자 이를 발췌하여 신공황후기에 가필해 넣음으로써 마치 신공황후가 석우노를 죽인 것처럼 왜곡하였다.
「원년(일본서기년도 A.D 201년 실제년도 A.D 173년) 겨울 10월 군신은 황후를 높여 황태후라 하였다. 이 해가 태세 신사 섭정 원년이다. 冬十月 群臣尊皇后曰皇太后 是年太歲辛巳卽爲攝政元年」
신공황후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여왕이라 칭한 A.D 173년에 즉위하였다. 일본서기에 적혀 있는 신공황후의 즉위년도는 실제년도보다 28년이 늦어져 있다.
「신공황후 5년 봄 3월 신라왕은 오례사벌, 모마리질지, 부라모지 등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그리고 먼저의 인질 미질허지벌한을 데리고 가려는 생각이 있었다. 허지벌한에게 거짓 "사자인 오례사벌, 모마리질지 등이 신에게 '우리 왕은 신이 오래 돌아오지 않으므로 처자를 모두 관노로 하였다'고 말을 합니다. 원컨데 잠시 본국에 돌아가서 허실을 알려고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황태후는 청허하였다. 그래서 갈성습진언을 딸려서 보냈다. 같이 대마에 와서 서해의 항구에 묵었다. 그때 신라의 사자 모마리질지 등은 몰래 배 및 수부를 수배하여 미질한지를 태우고 신라에 도망가게 하였다. 풀로 인형을 만들어 미질허지의 침상에 놓고 거짓 병에 걸린 양하여 습진언에게 고하여 "미질허지가 갑자기 병에 걸려 죽어간다"라고 말하였다. 습진언은 사람을 시켜 병자를 보게 하였다. 곧 속은 것을 알고 신라의 사자 3人을 붙들어 나무 우리 속에 집어넣고 불태워 죽였다. 그리고서 신라에 가서 도비진에 진을 치고 초라성을 함락시키고 돌아왔다. 五年春三月癸卯朔己酉 新羅王遣오禮斯伐.毛麻利叱智.富羅母智等朝貢 仍有返先質微叱許智伐旱之情 是以 許智伐旱 以給之曰 使者오禮斯伐.毛麻利叱智等 告臣曰 我王以坐臣久不還 以悉沒妻子爲拏 冀잠還本土 知虛實而請焉 皇太后則聽之 因以 副葛城襲津彦而遣之 共到對馬 宿于조海水門 時新羅使者毛麻利叱智等 竊分船及水手 載微叱旱岐 令逃於新羅 乃造추靈 置微叱許智之床 詳爲病者 告襲津彦曰 微叱許智忽病之將死 襲津彦使人令看病者 卽知欺 以捉新羅使者三人 納檻中 以火梵而殺 乃詣新羅 次于蹈비津 拔草羅城還之」
미사흔이 신라로 도망 온 해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A.D 418년이다. 즉 신공황후가 죽은 후 일백칠십여년 후에 일어난 일이다. 따라서 위 사실은 A.D 247년에 죽은 신공황후와 전혀 관계가 없다. 이처럼 신공황후기에 신공황후와 전혀 관계가 없는 사실이 들어 있는 것은 일본서기를 지은 백제인들이 신라에 대한 적개심으로 구 신라기에서 왜가 신라보다 우위에 있는 내용을 찾아내어 신공황후기에 가필해 넣었기 때문이다.
「신공황후 69년 여름 4월 황태후가 치앵궁에서 붕하였다. 그때 나이 100세였다. 皇太后稚櫻宮崩(時年一百歲)」
위지에 의하면 신공황후는 A.D 247년에 사망하였으므로, 일본서기에 적혀 있는 신공황후의 사망년도는 실제년도보다 22년이 늦어져 있다. 이는 신공황후의 사망으로 구주왜 천황시대가 끝이 나고 백제왕의 직할통치 기간을 거쳐 A.D 390년부터 대화왜 천황시대가 시작되자, A.D 247년부터 A.D 390년까지 142년 동안의 천황 공백기를 감추고 가야계인 구주왜와 백제계인 대화왜를 같은 천황가로 만들기 위하여, 신공황후의 사망년도를 실제년도보다 22년 늦추고 응신천황의 즉위년도를 실제년도보다 120년 앞당겼기 때문이다.
8). 응신천황 재위기간 왜곡
15세 응신천황 일본서기년도 A.D 270년 실제년도 A.D 390년 즉위
일본서기에는 응신천황이 A.D 270년에 즉위한 것처럼 적혀 있다. 그러나 응신천황 3년조를 보면 백제 진사왕이 죽은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A.D 392년에 일어난 사실이므로, 응신천황의 실제 즉위년도는 A.D 390년이다.
일본서기 저자는 앞에서 말한 142년 동안의 천황 공백기를 감추기 위하여 응신천황기에 신공황후가 응신을 낳았다고 왜곡하고 이 왜곡을 더욱 보강하기 위하여 신구 2년에 구주의 대분현에 "宇佐八幡神宮"을 짓고 비매대신, 신공황후, 응신천황 3신을 같이 모심으로써 신공황후와 응신천황이 같은 혈통인 것처럼 위장하였다.
9). 대화왜 왕이 일본열도 전지역을 다스린듯이 왜곡
16세 인덕천황
앞에서 본 것처럼 응신천황의 즉위년도를 120년 앞당겨 A.D 270년에 즉위한 것처럼 왜곡한 결과 응신조가 실제 멸망한 연도는 A.D 400년이므로, 이럴 경우 응신천황 혼자서 130년간 통치한 셈이 된다.
일본서기 저자는 응신천황의 재위기간이 너무 길자 A.D 270년부터 A.D 310년까지는 응신천황이 다스리고 그 뒤 A.D 313년부터 A.D 399년까지는 인덕천황이 다스린 것처럼 왜곡하였다.
일본서기에는 인덕천황이 A.D 313년부터 A.D 399년까지 재위하였다고 적혀 있으나, 응신천황이 실제 재위한 기간은 A.D 390년부터 A.D 399년까지이므로, 인덕천황은 실제로는 천황이 아니라 대화지방의 소국왕으로 추정된다.
10). 임나연정시대에 대화왜 왕이 일본열도 전지역을 다스린듯이 왜곡
17세 이중천황 A.D 400년 즉위
18세 반정천황 A.D 406년 즉위
19세 윤공천황 A.D 412년 즉위
20세 안강천황 A.D 453년 즉위
21세 웅략천황 A.D 456년 즉위
위 천황은 임나연정 시대에 일본서기에 나오는 천황이다.
광개토왕의 공격으로 응신조가 멸망한 후 광개토왕이 임나연정을 만들어 대마도와 일본열도를 대화왜, 구주왜, 임나왜로 분리하여 통치하였기 때문에 임나연정 시대에 나오는 위 천황은 대화지방의 왕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위 이중천황 등은 임나연정왕에게 복속한 대화왜 왕에 불과하였는데도 일본서기에는 이중천황 등이 마치 일본열도 전지역을 다스린 듯이 왜곡되어 있다.
11). 임나연정 멸망 후 대화왜 왕이 일본열도 전지역을 다스린 듯이 왜곡
22세 청녕천황 A.D 480년 즉위
23세 현종천황 A.D 485년 즉위
위 천황은 A.D 479년에 임나연정이 멸망한 후부터 A.D 488년에 구태백제가 일본열도에 인현조를 세울 때까지 일본서기에 나오는 천황이다. 이 시기 일본열도는 아직 대화왜와 구주왜가 통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청녕천황과 현종천황은 대화지방의 왕에 불과하였다. 그런데도 일본서기에는 청녕천황 등이 마치 일본열도 전지역을 다스린 듯이 왜곡되어 있다.